1.20년 동안 지켜오던 옥천 인구 5만명선이 무너졌다. 아등바등 공무원, 공공기관 주민등록이전까지 독려하며 지켜오던 5만 명 선이 무너지면서 인구는 급격하게 줄지 않을까 예상한다. 심리적 방어선이 무너졌기 때문에 주민등록만 이전 했던 인구는 서서히 빠지고 실거주 인구수로 확 줄어들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문제는 감소하고 있는 이 추세와 인구의 구조적 문제이다. 읍 집중 현상과 아울러 급격하게 감소하는 면 지역 인구의 지역별 불균형과 인구 고령화와 맞물리면서 있는 청년, 청소년 인구가 여전히 빠져나가 세대별 불균형이 맞지 않은 농촌인구의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답이 없다. 외부적으로는 '지역 소멸'이라는 주문을 외우며 걱정하는 척 하면서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다른 편에서는 중핵도시를 넘어 메가시티론에 한창 군불을 때고 있다. 광역전철을 연결을 기회로 지방선거 이후 당장이라도 추진할 기세이다. 매가시티란 사실 좀 인구가 되는 광역 거점도시들 간의 코어 결합일 뿐 군 단위 농촌지자체는 그야말로 '겉절이'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큰 우산 귀퉁이에서 온갖 혐오시설과 배후시설을 본격적으로 옮겨 놓으려고 아마 채비를 할 것이다. 일단 땅이 넒고 인구밀도가 작아 상대적 저항이 덜하기 때문이다. 자본과 권력은 이처럼 약한 곳을 교묘하게 파고 든다. 이미 농촌은 도시의 배후로 그렇게 활용되고 있다. 물과 에너지, 먹을거리, 쓰레기 등 마치 도시를 위해 농촌이 존재하는 것 마냥 그렇게 설정하고 있다. 메가시티가 되면 이런 움직임들이 더 격화될 거란 거다. 인구가 작은 곳에 '소멸'을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는 것은 '대규모 집단 인간은 바람직하고 살아갈 가치가 있지만 소규모 집단은 부적절하고 살아갈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이제 당신들에게 비용을 쓰고 싶지 않다라는 것은 국민들 중 어떤 사람을 배제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이다'(지방회생, 야마시타 유스케)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2.'지역소멸을 이야기하는 <마스다 보고서> 전체를 지배하는 가치가 바로 이 도시의 정의인 것이다. 게다가 이 바람직하다는 말은 도시 생활이 인간 집단에게 이성적이며 그래서 사회는 이러한 집단으로 통일되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지방회생, 야마시타 유스케) 이런 흐름으로 농촌을 벼랑끝으로 몰아가고 있는 것이다. '인구수'로만 도시를 평가하지 말고, 자치와 자급율을 포함한 자립지수로 환경오염지수로 각 도시의 건강성을 측정해야 할 것이다. 물과 에너지, 먹을거리 등을 스스로 자급하고 있는지를 따지면 도시는 낙제점이다. 낙후된 인구수와 벌어들이는 매출액으로만 단차원적으로 도시를 평가하는 지표로 삼지 말고 도시가 스스로 얼마나 자립하고 있는지, 환경오염을 얼마나 시키는 지에 대해 평가하여 지향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지금의 방식은 인구수 증가가 절대적 명제로 자리 잡고 모두가 도시국가를 지향해야 하는 것처럼 몰아가고 있다. 먹을거리는 스마트팜과 수입농산물로, 에너지는 핵발전으로, 물은 댐을 만들어 상수원으로 하면 그들에게 농촌은 굳이 필요없는 것이다. 그래서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다. 도시와 농촌을 가르면서 옥죄는 것이 아니라 자립지수를 부여하여 물과 에너지, 먹을거리를 스스로 자립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려고 한다면 모든 땅을 콘크리트로 덮어 건물을 짓지 않을 것이다. 각 도시마다 스스로 생산하여 먹을 수 있는 논과 밭을 만들어 식량자급을 높이고 마실 수 있는 수원과 에너지원을 갖추려고 한다면 정책의 방향은 달라질 것이다. 무뎌졌던 감수성이 다시 되살아날 것이다. 내가 버리는 쓰레기가 어떻게 처리되고 있는지, 내가 마시는 물이 어디서 오고, 내가 쓰는 전기가 어디서 어떻게 오는지, 내 가 먹는 먹을거리는 어떻게 생산되어 오는지를 절절하게 느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 모두 파국을 피할 수 있다. 분절된 삶, 단절된 관계들 사이에서 이간계를 통해 자본과 권력은 점점 더 몸집을 불린다. 그리고 인구수와 관계없이 보장되는 코뮌들의 광활한 자치를 보장해야 한다.
3.'자코뱅들이 꿈꿔 온 단일국가를 상호주의자들이 설파하던 자유로운 코뮌과 느슨한 지역연합으로 대체하려 한' 프루동은 '코뮌의 절대적인 자치를 각 코뮌의 완전한 권리를 보장하고 모든 프랑스인이 인간이자 시민, 노동자로서 자신의 소질을 완전히 발휘하도록 보장함으로서 프랑스의 모든 지방으로 확대된다. 코뮌의 자치권은 계약을 충실히 지키는 다른 모든 코뮌들의 평등한 자치권에 의해서만 제한될 것이다. 즉 코뮌들의 연합은 프랑스의 해방을 보장해야 한다'고 말했다. 인구수에 매몰되어 그들이 생각하는 적정한 인구수대로 칼부림을 하며 농촌을 잘라서 여기저기에 같다 붙이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면 이를 읽고 성찰하길 바란다. 관계가 살아있는 작은 공동체는 면대면 민주주의가 활성화되어 있고 지역 자급율이 어느 도시보다 높을 뿐더러 환경오염지수도 낮다. 크기와 수에 집착하는 도시를 택할 것인가? 작은 공동체의 관계성과 각 공동체가 만들어내는 다양성, 지역과 지구를 살리는 자치와 자급율, 환경오염지수에 초점을 맞출 것인가를 고민하면 답은 명확하다. 머레이 북친은 말했다. '정치활동의 물리적 공간은 언제나 도시나 마을, 즉 지역자치제였다. 정치가 가능하려면 도시의 규모가 적당해야 한다. 도시가 너무 클 경우 면대면 토론이 불가능하고, 시민들사이의 친밀한 관계유지가 어렵기 때문이다. 이제 권력은 둘로 나뉘어 자유로운 자치제와 국민국가 사이에 공개적인 긴장관계가 조성된다. 서로 다른 다양한 공동체가 존재하게 될 것이고 다양성이야 말로 문화창조의 원동력이다.'이제 더 이상 '돈의 지수'가 아닌 '삶의 지수'로 도시를 평가하는 지표를 바꿔야 한다. 그래야 모두가 살 수 있다.
4.<지방회생>이라는 책은 그나마 잘 쓰여진 책이다. <지역 소멸>이 음험한 음모를 갖고 있다면 <지방회생>은 이에 반박할 수 있도록 나름 논리정연하게 쓰여인 책이다. 이 책에는 '체계'와 '관계' 이야기까지 파고든다. '도시화는 사회와 사람들의 생활방식을 가족과 공동체중심에서 공공서비스와 시장 이용의 효율성에 중심을 두는 방식으로 전환시켰다. 행정과 시장에 대한 의존성이 강한 도시는 가정이나 지역생활에서 문제해결 능력이 낮아진다. 행정이나 시장에 의존함으로써 행정이나 시장이 대신해주기 때문에 도시민은 다양한 자유를 누리지만 이것은 또한 역으로 행정이나 시장이 해주지 않으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인구가 집중된 고밀도화 도시에서의 삶은 가까운 사람들가의 직접적인 관계나 교류가 없어도 지탱이 가능하다. 도시는 낯선 사람들과의 교환의 장인 시장과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장소 등을 설계하고 배치해 운영하는 행정기구인 셈이다. 그것이 도시화의 전제이며 이런 조건이 갖추어지고 사람들이 모이면 모일수록 도시적 생활방식은 더 발달하고 다시 도시화는 더 빠르게 진행된다.' 도시가 행정체계와 시장자본체계에 상당부분 의존한 삶이라면 농촌은 이런 체계자체가 무너진 삶이다. 이런 체계가 부족하면 공동체적인 체계와 공공행정체계에서 이를 채워줘야 하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 미디어를 타고 들어온 시장자본주의 삶은 공동체적 관계를 갈수록 끊어놓고 시장은 이미 철수한 지 오래다. 딱 보면 견적이 안 나오고 돈이 나오지 않을 거라는 것을 단박에 이미 눈치챘기 때문이다. 시장이 철수한 그 자리에 공공행정체계도 이를 메워주기는 커녕 마지못해 남아있거나 슬그머니 발을 뺄 준비를 하고 있다. 시골에 사는 사람들은 이미 내핍상태에 들어섰다.
5.야마시타 유스케는 저출생 문제를 나름의 방식으로 해석한다. '일반적으로 도시가 농산어촌에 비해 출산력이 낮다는 것은 역사인구학 등의 연구결과에 부합하는 사실이다. 그런데 아이가 태어나기 제일 어려운 도쿄나 대도시에 젊은이들이 흡수되어 집중적으로 거주하고 있다. 반대로 아이가 태어나기 쉬운 농산어촌에는 고령자들만 남아있다. 결국 인구밀도가 많고 고밀도인 장소는 도시이기 때문에(시카고파 도시사회학, 인간생태학의 정의에 따르면) 도시화의 정도가 심화될수록 인구재생산능력은 떨어진다고 말할 수 있다. 도시화가 출산율을 낮추고 인구 감소를 일으킨다. 이것을 인구감소의 도시화 원인설이라 정의하자.' 농촌은 그가 말한 것처럼 20대부터 50대가 진공상태로 빠져 있다. 옥천만 해도 고령화 비율이 30%에 달할 정도로 젊은이는 없고 노인들만 늘어나고 있다. 바람직한 인구구조는 아니다. 미래가 없는 인구구조인 것이다. 정부와 지자체는 인구 감소 문제를 단지 숫자에만 천착하는 데 이는 그렇게 단편적으로 외피적으로 판단할 문제가 아니다. 숫자에만 집착하지 말고 사람들의 삶을 바라봐야 한다. 또한 구조를 봐야 한다. 숫자 이면에는 젊은 세대의 인구 유출이 여전히 심각하게 진행되고 있고 지역적으로 볼 때는 면 지역 인구가 더 급격하게 감소하고 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종'형이 아닌 역 피라미드형은 미래가 없는 인구구조이며 읍 집중이 심화되며 면 지역 인구가 감소한다는 것 자체가 건강하지 않은 구조이다. 농촌인구는 숫자를 넘어서 세대별 지역별로 불건강한 상태에 있는 것이다. 절대 숫자가 줄어든다 할 지라도 세대별 인구가 균형적으로 유지되고 지역별 인구 편차가 쏠리지 않는다면 그 지역의 미래는 있다.
6.이 나라는 어떻게 된 게 중심병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늘 중심과 주변부를 가르고 주변부에서 고혈을 빨고 착취하며 중심부를 성장시키는 방식으로 커왔다. 균형발전을 외치는 충청북도도 청주 중심이고 충북도의 균형발전을 외치는 옥천군도 읍 중심이다. 역설적으로 외치는 레토릭을 실천하지 못하는 이 모순은 어떻게 설명할 텐가. 지역도 답습하고 있는 것이다. 서울의 논리를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변화는 없다. 수직적인 위계 방식이 아니라 수평적인 네트워크식 방식이 되지 않고서는 질적 변화는 힘들다. 체계 전체가 바뀌어야 한다. 어설픈 지방자치를 시작하고서 자치를 주었다 생각하지 말지어다. 공공기관 몇 개 이전해놓고 균형발전을 언급해서는 아니될지어다. 주변부에는 늘 혐오시설을 설치하고 필요한 알짜배기들은 다 가져가면서 그렇게 성장해 놓고 지역을 또 비하하는 이 구조는 '악마적'이다. 쓰레기장, 하수처리장, 발전소, 상수원 등 발전에 필요하면서도 정작 가까이 하기 싫은 것들은 다 주변부에 설치해놓고 있다. 너희들은 인구도 얼마 안 되니까 돈 조금 줄테니 그냥 감내하고 살아라는 식이다. 그렇게 송전탑이 세워졌고, 그렇게 하수처리장과 쓰레기 매립장, 장묘시설이 설치되었다.
7.이제 '지방분권'과 '균형발전'이라는 구호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 분권은 권한을 단순히 나눠주는 것 이상의 자치에 더 근접해야 하고, 균형발전은 기업과 기관 이전을 넘어서는 가치가 있어야 한다. 아니 그런 구호는 이제 폐기되어야 함이 옳다. 지방분권과 균형발전을 하면 세상이, 삶의 질이 더 나아지는 가. 그것을 해서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지향이 없다. 그 발전이라는 것이 서울과 똑같아지는 것을 뜻함인가. 도시화되는 것을 뜻하는가. 서울의 복제품을 여기저기 만들겠다는 것인가. 이제 균형발전이라는 용어는 '순환과 공생의 지역공동체를 만들자'는 구체적인 언어로, 지방분권이라는 용어는 '자치와 자급의 지역공동체를 만들자'는 용어로 구체화 시킬 필요가 있다. 밑도 끝도 없는 성장과 발전대신, 순환과 공생의 지역사회를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잘 되는 놈만 키워주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최소한의 삶을 유지할 수 있는 기본의 지역사회를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어느 부분을 착취해 성장하고, 경쟁과 도태로 거르는 방식이 아닌 협동과 연대의 방식으로 가장 기본적인 지역사회를 구축해야 한다. 행정체계와 시장체계에 예속되지 않고 관계에 의해 제어되고 이를 부릴 수 있는 새로운 지역사회가 건설되어야 한다. 야마시타 유스케도 다양성의 공생이란 표현으로 이런 이야기를 책에서 했다. '사회 구성원들을 어떤 기준에 따라 배제하지 않고 다양한 존재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모두가 함께 손잡고 살아가는 것, 그렇게 공생하는 것을 인정하는 것에서 도시를 형성하고 국가를 운영해가는 것이다.', '경제에 치중하고 도쿄로 집중하던 것을 일단 멈추고 하나로 묶여버린 것들을 재분할하고 분산시켜 다극화하는 것, 집중을 통해 통합하는 것이 아니라 힘을 분산시켜 다수의 극을 형성하고 그것을 서로 연결하고 순환시켜 나가는 방식으로 전체적으로 서서히 통일되어 가는 것이다'
8.그래서 다시 '코뮌'이다. 농촌 어려운 것 다 알고, 지역 힘든 것 다 아는데 언제까지 징징 거릴 것이냐고 묻는다. 그래서 대안이 뭐냐고 묻는다. 대통령이 바뀌어야 한다고 나라가 바뀌어야 한다는 이런 씨알도 안 먹히는 허무하게 소비되는 이런 말일랑은 하지 않을 런다. 그럼 우리가 조직화해서 선거로 쟁취해야 한다는 그런 말도 전부 믿지는 않을런다. 꼬리가 몸통을 흔들 수 있다. 체계의 힘이 약해진 곳에서 관계의 힘이 자라고, 관계에 의해 재구조화된 체계가 다시 관계를 살릴 수 있을 것이다. 관계가 체계를 기꺼이 아무렇지 않게 부릴 수 있는 사회, 지역사회 공론장을 새롭게 만들어야 한다. 강력하게 요구하고 실천하며 생활권 중심의 지역사회를 새롭게 구축해야 한다. 면단위 중심의 공공체계를 새롭게 정비해야 한다. 시장이 철수한 그 자리에 공동의 힘으로 공공의 영역을 재구축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일 수 있다. 무상교통과 기본소득, 사회주택, 사회적농업, 작은영화관, 작은도서관, 수영장, 어린이집, 보건지소와 진료소의 강화 등 새로운 의료시스템 구축, 쓰임새 있는 사회적 공공일자리 창출을 통해 새로운 사회를 만들 수 있다. 아니 이는 새로운 사회가 아닌 이전의 사회를 다시 재복원하는 작업이다.
9.도농상생이니 도농공생이니 하는 말도 조금 더 진일보한 용어로 바꾸어 갔으면 한다. 이제 도시, 농촌 가르지 말고 자립하고 연대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도시는 그 속성상 농촌을 계속 잠식하고 개발하여 발전하려 할 것이다. 성장하려 할 것이다. 마구니가 끼어 있어 무한 증식하며 무한 성장하려는 괴물이 되어 가고 있다. 닥치는 대로 먹어치우고 있다. 지향을 세워야 한다. 자치와 자급으로 자립하는 사회, 포용과 협동으로 연대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먹을거리의 자급, 에너지의 자급, 물의 자급을 하려면 더이상 개발을 멈추고 농지를 만들어야 한다. 남의 땅에 쇠말뚝 꼽듯이 송전탑을 만드는 것을 더이상 하지 않고 자체적으로 이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고민해야 할 것이다. 엄한 땅에 댐을 만들어 남의 고향 쑥대밭으로 만들지 말고 먹는 물과 사용할 물을 어떻게 만들 지 고민하게 될 것이다. 도시에서는 그런 고민은 생략되어 있다. 당연히 공급되는 것이어야 하고, 어디서부터 나오는 지 그 과정에 대해서 설명해주지 않는다.
10.생활의 토대를 이루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 어떻게 만들어지는 지 그 감수성이 결여된 사회에 살고 있다. 이것은 과연 타당한가. 그 무지와 감수성의 결여는 체계의 힘이 작동하고 이로 인해 지배당한다. 그의 말처럼 우리는 '어떻게 서로를 실감할 수 있을까?' 농산물 값이 폭등하면 왜 그렇게 비싸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고 농산물 값은 항상 싸야 하는 이 엄혹한 현실은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고 있다. 도농상생, 도농공생이 얼핏 아름다워 보이는 말 같지만, 그 이상을 원한다. 도시와 농촌이 모두 스스로의 힘으로 생활세계를 건사할 수 있는 작은 코뮌이 되길 원한다. 서로를 대상화하거나 착취하지 않고 스스로의 삶을 스스로의 힘으로 개척할 수 있기를 기원한다. 그런 코뮌들이 보충성의 원리로 협동하고 연대하길 희망한다. 사람이 비로소 사람으로 보일 수 있는 지역에서 그런 관계성의 토대로 풀뿌리 민주주의가 발현되길 소망한다.
11.일단 되고 보자. 일단 늘이고 보자 는 생각은 얼마나 아둔하고 위험한 것인가. 각종 공모사업에 응모해 무조건 사업비를 획득하고 보자는 생각과 태도, 인구는 무조건 늘려야 한다는 안일한 발상 등은 사실 그 공간을 제대로 망치는 주범이다. 아무런 성찰 없이 당선, 선정, 돌파 같은 이런 단어들이 암시하게 만드는 긍정적인 착시 현상으로 또 속는다. 어떠한 지향없이 그 자체로 마치 성공한 듯한 모든 사안이 종결된 듯한 인상에 매몰되다가는 답이 없다. 한발자국도 나가지 못한다. 몇십억 또는 몇 백억 사업비 확정, 인구 몇 만 돌파 이런 단어들이 펼침막에 걸려지는 순간, 지역에 돈이 풀린다는 착시, 소비 인구가 늘어나겠구나 하는 환상은 사실 그 외의 것들을 다 가려버린다. 서류만 그럴 듯하게 꾸며 받은 공모사업은 대체적으로 ‘망필’인 경우가 많고 또 사실 그런 수순을 고스란히 밟아나간다. 과정과 결과 포장까지 그럴 듯하게 꾸미고 공모하여 마치 성공한 사업처럼 끝까지 완벽한 거짓말로 종결짓는 기술을 가진 선수들도 있지만, 그런 것은 시간이 가면 기실 금방 탄로나게 되어 있다. 인구도 마찬가지다. 대부분의 지자체가 정책도 아닌 정책을 서로 베껴가면서 귀농귀촌을 유도하겠다는 거창한 심산으로 '우리 돈 얼마 줄테니 와요', '우리는 이런 혜택을 줘요'라며 저열한 영업전략으로 사는 사람들까지 부끄럽게 만들기도 한다. 인구를 어찌됐든 사수하려고 하니 군수는 공무원들 위장전입까지 질끈 눈을 감고 아는 사람이 사는 곳에주소만 옮겨 놓는 것 쯤이야 사실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위법임에도 불구하고 질끈 눈을 감아버리는 것이다. 이게 다 지역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도록 최면을 걸어버리는 것이다.
12.인구, 사람을 숫자로 본다. 숫자에 매몰되어 어떻게든 한 명이라도 늘여보려는 노력은 참 가상하나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사실 어떤 진정성도 느껴지지 않는다. 절대적인 수치에 매몰되어 어떻게든 인구를 늘여보겠다는 그 몸부림은 기실 뭐라도 해야겠기게 쇼에 그치는 수가 많다. 또 안 팎에서 지역소멸이라는 프레임으로 여기저기 압박을 해대니 지도에 빨간 것으로 표시하고 몇 년이면 소멸될 지역이니 어쩌고 저쩌고 낙인을 찍어버리니 그곳에 사는 사람은 덜컥 겁이 나는 것이다. 숫자에 매몰되어서는 사실 답이 없다. 5만명이 무너졌니, 3만명이 무너졌니 하는 공포감을 조성하는 것들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하늘이 무너져 내리기라도 한단 말인가. 지역이 금방 소멸되기라도 한단 말인가. 과한 호들갑으로 여기저기 회자되기 시작하면 마치 곧 그렇게 될 것처럼 느껴지는 집단 망상의 경험을 선사하려고 애들 쓴다. .인구의 양에만 천착하면 답이 없다. 인구의 구조를 봐야 한다. 군단위 안에서도 지역별 균형이 제대로 되고 있는가. 세대별 균형이 잘 이뤄지고 있는가. 이런 것에 대한 고민 1도 없이 그냥 무조건 늘여야 한다는 것이다. 들여다보면 이것이 얼마나 불건강한지 볼 수 있다. 옥천만 놓고 봐도 9개 읍면이 있는 지역인데 군 전체 5만명 남짓 인구 중에 읍에 거주하는 인구가 무려 3만에 가깝다. 한곳에 집중이 심하다는 것은 다른 변방 주변지역의 열악함을 반증하는 것이다. 굉장히 좋지 않고 바람직하지 않다. 고르게 균형 잡힌 곳으로 만들지 않고서 인구늘이기를 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처사다. 어떤 이들은 나름의 출사표로 예전에 옥천읍과 인근 면 몇개를 묶어 옥천시로 만들자는 이야기도 했었다. 개갈 안 나는 면 지역들은 아예 버리겠다는 처사다. 이쯤되면 어이 상실이다. 그런데 이런 얘기들이 솔깃하며 먹힌다는 데 문제가 있다. 또한 중요하게 봐야 할 것이 세대별 균형이다. 고령화비율이 30%를 넘나드는 농촌은 노인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다. 있는 청소년과 청년들마저 왜 떠나는 지에 대한 고민은 1도 안 하고 그냥 내면화시켜버린다. 농촌은 노인들이 사는 곳, 이렇게 기형적으로 뒤틀려버린 인구구조는 악순환을 거듭한다. 모든 세대들이 균형있게 살아야 끌어주고 당겨주며 성장할 수 있다. 역피라미드형 구조로 고착화된 인구구조에서 어떤 미래가 있을 수 있을 것인가. 그것에 마치 농촌의 종특으로 굳어져 있고 당연한 것처럼 회자되는 것 자체가 큰 문제다. 그런 것의 아무런 개선없이 인구늘이기를 한다고. 눈 가리고 아웅하는 짓이다.
13.5만 무너져도 3만 무너져도 사실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과잉 호들갑으로 큰 재난이 일어나는 것 마냥 그럴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삐끼처럼 영업하면서 단 기간에 사람 끌어들이려 격 떨어지는 짓 제발 하지 말고 맥락을 읽어내고 흐름을 알며 무엇을 어떻게 할 지 제발 고민을 하라는 것이다. 학교 학생 수가 줄어드는 것이 눈에 보이는데 그것은 교육지원청에서 할 일이라며 지자체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질끈 눈을 감으면서, 도교육청도 농촌학교 고사하는 것을 뻔히 알면서 농촌에 사람 줄어드는 것은 나랏님도 해결 못할 문제라며 두손두발 다 들고 폐교되기만을 기실 기다린다. 그렇게 기관의 공모가 진행되는 것이다. 교육부에서 내린 빌어먹을 학교총량제 때문에 도교육청은 농촌학교를 폐교하면 신도시에 학교를 신설할 수 있기 때문에 하루 빨리 폐교되길 빌고 있는 지도 모른다. 도시에 사람이 많고 그것이 바로 표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선거운동 방식인 것이다. 지자체는 이래저래 열악하다고 손 벌리는 면 지역은 과감히 정리하고 큰 틀에서 읍중심으로 재편하려는 모습이 보인다. 면지역 구심을 소거하려 하지 않아도 이미 하나둘씩 필수 서비스들이 축소되고 사라진다. 그러면서 읍으로 나오는 시내버스로 이를 대체하면서 읍 중심은 가속화 된다. 결국 면은 논과 밭만 남고 주거지로서 기능을 상실할지도 모른다. 삶이 스며들지 않는 지역들은 대부분 산업화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대농 기계농을 양산하면서 억대 농부를 양산하려는 정책과 맞닿아 있다. 정부의 사업도 효율과 효능을 강조하며 권역으로 묶는 것에 익숙하다. 몇 개 면을 묶어 한 개의 생활권을 만든다는 것은 결국 경쟁력 없는 면들은 그 기능을 상실하겠다는 뜻과 다름없다. 돈을 줄테니 알아서 통합해. 그 흐름대로 살살 가고 있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살아온 삶의 공간을 죽이는 것에 우리는 알게 모르게 동참하고 있는 것이다. .생활권 중심의 자치와 자급의 거점을 어떻게든 살려보려는 노력은 하지 않고 흔들면서 사람 없으니까 지역 소멸된다니까 어서 통합해야지. 이런 강박을 은연중에 수시로 하고 있다. 공간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위에서 보니까 중심에서 보니까 그렇다. 지금 농촌의 문제는 단순하게 사람이 없다는 것에 있지 않다. 사는 사람도 행복하게 하지 못하면서 염치없이 어디 사람을 더 끌어들이려고 하는지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다. 제발 오지도 않을 사람들한테 가서 발 동동거리며 오라고 하지 말고, 있는 사람, 사는 사람부터 챙겼으면 좋겠다.
14.난개발은 지속적으로 진행되어왔다. 틈이 나는 대로 농촌을 비집고 파헤쳤다. 도시는 성장하고 있었고 사람이 몰리고 있었으며 모든 자원이 집중되기 시작했는데 이를 가능케 하기 위해서는 배후농촌이 절실하게 필요했던 것이다. 물을 지속적으로 공급받기 위해서 댐을 건설했고 전기를 공급받기 위해서 송전탑을 곳곳에 세웠으며, 먹을거리를 공급받기 위해서 농촌을 생산기지화하며 줄을 세웠다. 도로를 쭉쭉 내기 위해 농촌을 아무렇지 않게 가로 질렀다. 마을은 초토화되었다. 수몰되거나 반쯤 쪼개지거나 볼썽사나운 송전탑이 곳곳에 꽂혀 있어 하늘과 땅을 망가트렸다. 이쯤 되면 수탈이다. 이제는 대안이라 일컫는 신재생에너지도 농지와 산지를 파헤치고 있다. 정부가 앞서서 조장하고 있고 돈 되는 자본이 이 냄새를 맡고 곳곳에 설치를 하고 있다. 산비탈이 벌거숭이가 되었고 자연스러웠던 자연이 파괴되었다. 토건업자들이 전망 좋은 곳에 전원주택 단지를 짓는 택지개발을 하여 멀쩡한 산이 파헤쳐지는 것은 일상다반사이다.
15.도시자본과 권력, 농촌 권력과 유지들의 결탁은 농촌을 한없이 망가트린다. 도시 자본의 입맛에 맞게 농촌을 어떻게 개발할까 이해관계가 딱 맞아떨어지면서 말 섞지 않아도 이심전심으로 공모하는 작품들이 하나둘 늘어난다. 그 놈의 농산업단지를 백날 만들고 유치를 해봤자, 땅만 저렴하게 대줄 뿐 대부분 도시에서 출퇴근하는 노동자들 즐비하고, 나중에 땅값오르면 부동산 팔아 먹튀하는 업자들 수두룩 한데 공적예산이 투여된 부분은 그냥 휴지조각처럼 날아가는 것이 눈에 보이는데 관행적으로 아무런 문제없이 산업단지를 또 조성하고 확장한다. 관광단지에 뭘 그리 목을 메는지, 볼 거리, 먹을거리, 놀거리가 없다는 그 말에 매몰되어 여기저기 다 하는 출렁다리 전망대 등을 몇 백억원을 들여 랜드마크 관광지를 만든다는 데 기가 찰 노릇이다. 도시민들을 끌어들여 돈을 벌겠다는 심산인데 돈을 많이 쓰게 해 지역경제를 활성화한다는 그럴듯한 명분을 들이대는데 어쩌나 인근 땅을 사고 카페나 식당 영업을 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근 도시에서 출퇴근하는 사람들인데 말이다. 도시민과 지역민을 가르자는 취지가 아니라 농촌 스스로를 대상화하는 사업에 막대한 공공예산을 흩뿌리대는 것이 너무 생각없는 짓이라 화가 불쑥불쑥 새어나오는 것이다.
16,거대하고 큰 사업을 해야 스케일이 크다고 칭송을 받는 것인지. 여전히 골프장과 대규모 아파트 단지, 큰 기업 유치에 사생결단을 하는 걸 보면 한 큐에 모든 걸 끝내려는 로또 정신이 여기저기서 인간승리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 주민 삶은 아웃 오브 안중이고 대상은 늘 바깥에 있다. 사람들을 많이 오게 해 머물게 해서 돈을 쓰게 한다는 낡은 패러다임, 지역에 남아있는 사람들의 삶은 거기에 의존하고 의탁해야 한다는 관념은 뿌리가 깊다. 다 기존 도시에서 이식되고 길들여진 패러다임이다. 그렇게 배우고 그렇게 보도가 되니까. 성공사례들이 그리 회자되니까. 따라하기 선진지 견학이 횡행하니까. 도시 기획자라고 명함 붙인 사람들이 농촌에 와서 하는 짓거리란 그 정도니까. 그렇게 사람들 많이 와서 돈 많이 벌고 일자리 많이 생겼다고 여기저기 발표하니까. 그게 전부인 줄 알고, 그게 다 인줄 알고 부나방처럼 떼로 몰려든다.
17.농촌을 식민지처럼 대상화하여 멋진 그림처럼 기획 포장하여 되파는 술수를 가진 사람들을 알고 있다. 그렇게 이름을 알리고 상도 수상하고 수차례 언론보도도 되며 평판 자본과 관계자본을 가볍게 취하지만, 이후 행적에 대해서는 모두들 관심을 갖지 않는다. 컨설팅이 끝난 자리에 주민들이 감당해야 되는 건 폐기물 처리반이다. 핑계대기도 쉽다. 우리가 열심히 설계 해줬는데 기획했는데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자립을 못하는 것 까지 우리가 책임지라면 할 말이 없다는 말들, 저렇게 되어 안타깝다는 면피성 말들은 여전히 지역에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책임을 떠넘기기 참 좋은 말들이다.
18.난개발은 태양광에 국한되지 않는다. 지금은 그림같은 호수라서 대청호 오백리길이니 뭐니 하면서 관광상품으로 새로 등극하는 그 길도 주민들의 피같은 삶터를 수장시키며 얻은 난개발의 산물이고, 여기저기 비벌리 힐즈처럼 만들어진 전원주택 단지도 난개발의 산물이며 밀집되어 있는 소축사와 양계장, 돈사도 난개발의 산물이다. 여기저기 여전히 만들어지는 도로는 어떠한가. 차는 많이 다니지도 않는데 도로는 왜 그렇게 뻥뻥 뚫리는 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이쯤 되면 개발과 발전은 중독이고, 그 중독 사회에서 이익을 챙겨가는 이들은 따로 있다. 포장과 명분만 그럴싸하게 해 놓고 돈 갖고 먹튀하는 이들은 따로 있다는 얘기다.
19.정말 낡은 균형발전 패러다임은 걷어 치워라. 자치와 자급의 관점으로 도시와 농촌을 바라본다면 도시는 낙제점이다. 물과 에너지, 먹을거리 등이 사는데 필수 불가결한 요소들을 대부분 농촌에 의존하고 있다. 수많은 균형발전 사업들, 지역과 농촌에 벌어지는 이런 사업들은 광역 거점도시에서 이뤄지거나 농촌에서 한다 해도 토건업자들의 몫으로 다 챙겨진다. 균형발전의 낡은 프레임은 지역과 농촌까지 지속적으로 수탈하게 만든다. 인구 숫자의 신화를 깨지 않으면 답이 없다. 절대적인 숫자가 중요한 게 아니라 5만명이 깨진다. 3만명이 깨진다.는 이런 선정적인 제목에 천착하면 안에 골병드는 것이 가려진다. 시골 농촌에서 조차 도시화 된 읍 중심 인구가 대부분으로 내부 지역별 균형이 깨진지 오래고, 고령화 인구가 대부분으로 세대별 균형이 깨진지 오래다. 왜 지역별 균형이 깨져 있는지 왜 세대별 균형이 아작이 났는지 살펴보지 않고 인구 늘리기에만 매몰되면 수많은 위장전입자들만 양산하는 꼴이 될 것이다. 숫자에 목메지 않고 사람들의 삶을 봐야 한다. 중층적이고 복합적인 문제이다. 여전히 도시는 농촌을 대상화하고 있고 빈민과 농민의 연대, 노동자와 농민의 연대는 그 간극만큼 멀다. 마치 다른 언어를 쓰듯 서로 다른 나라 이야기를 하는 것 같다. 그래서 농협 노조와 농민회의 갈등과 반목은 더 첨예화되기도 한다. 연대는 서로를 온전히 이해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겉으로는 같이 연대하는 듯 하나 지역 농촌을 바라보는 시선들을 깊이있게 같이 성찰하지 않고서 깊이 있는 연대는 어렵다. 이제 균형발전을 요구하는 치들의 진정성을 별로 믿지 않는다. 다 자기몫을 챙길 요량인 것이다. 각 지역의 시민사회단체들도 그 지역의 이익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광역 시민사회단체들 대부분이 광역이라는 명패 뒤에 전체를 아우르지도 못하면서 고작 거점도시안에서 맴맴 도는 것을 보면 안타까울 뿐이다. 진보, 보수의 문제가 아니라 결국 그들도 수직 위계의 틀에서 변방을 줄세우기 하려는 그 몸짓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위하는 척 하면서, 존중하는 척 하면서도 결국은 제자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