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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에 뿌리내리는 교육

by 권단

방학이나 졸업을 싫어하는 학생들을 본 적이 있는가? 안남 어머니학교 할머니들은 ‘즐거운 배움터이자, 평생 빠지지 않고 가고 싶은 곳’이라고 말한다. 안남 어머니학교는 안남면의 한 할머니가 보은까지 가서 한글을 배운다는 소식을 실은 옥천신문의 보도를 접한 주민들이 할머니들이 생활터전 바깥으로 나가 배우게 할 수 없다는 생각을 모아 만들어졌다. 신문 보도가 촉매제 역할은 했지만, 지역 학교를 설립해야 한다는 주민들의 공감이 있었기에 빠르게 추진되었다.

매주 화요일과 금요일이면 할머니들이 구름떼처럼 모여들었다. 안남초등학교 학생 수가 40여 명인데 할머니 학생 수는 80여 명이 넘었으니 ‘구름 떼’라는 말도 과장은 아니다. 가장 소외됐던 농촌의 나이 든 여성들이 학교를 매개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시내버스를 타거나 걸어 다니는 등 교통편이 열악했던 할머니들은 서로 만날 시간을 좀처럼 낼 수 없었다. 마을과 마을 사이의 거리가 꽤 멀다는 환경에 더불어 여전히 가부장제 문화가 남아있는 농촌 지역에서 여자가 나다니는 것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더해져 할머니들은 서로 마주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예전에는 오일장에서 만남에 대한 갈증을 해소했다. 그러나 삼십 년 전부터 면 지역 단위의 오일장이 급격히 사라지면서 만남의 장은 소멸되어 버렸다. 안남 어머니학교는 농촌 지역의 할머니들에게 억압의 굴레를 잠시 벗어나게 해준 해방이었다. 할머니들은 학교에서 배움에 대한 열망과 서로를 만나고 싶은 간절한 바람을 동시에 충족할 수 있었다. 이렇듯 학교는 할머니들의 지역공동체가 되었다.


교육을 받는 사람들이 교육 현장을 만들기


안남 어머니학교의 이름은 ‘한글학교’가 아니다. 한글을 모르면 창피하다는 인식이 퍼져 있는 터라, 학생들의 마음을 헤아려 ‘어머니학교’라고 이름을 지었다. 학교 선생님들의 직업도 공판장 주인, 목사, 토마토 농부, 여성 농민 등 참 다양했다. 안남 어머니학교에서는 선생님이 되는 데 자격증이나 학위가 필요하지 않았다. 같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옮기는 데에는 마음이면 충분했다.

만약 정부나 지자체에서 문해 교육에 나섰더라면, 출석 체크를 하고 시험을 보고 졸업을 하는 같은 교과 과정을 밟았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할머니들을 대상화하여 ‘계몽’을 목적으로 지식을 주입시키려 했을 것이다. 지자체의 위탁받은 복지관에서 이뤄지는 대부분의 한글 교육이 그렇게 진행된다. 교육의 성과와 실적을 위해 선생님이 반장을 지목하고 관리하며, 주기적으로 시험을 보고 검정고시 응시를 종용한다.

하지만 생활세계에서 건사한 교육은 달랐다. 할머니들을 주체로 세운 것이다. 할머니들은 스스로 자체 학생회를 구성해 스스로 일어섰다. 학생회에서 합의하여 학생회비를 걷고 학생회장을 뽑았다. 지역 학교의 수혜 대상에만 머무르지 않고, 학교를 운영하는 중심 주체로 거듭났다. 체계상 교장이 있긴 했지만, 학교 행정의 구체적인 사항들은 교사 회의라는 공론장에서 할머니 학생회와 함께 논의했다.

학교의 핵심 구성원이 된 할머니들은 학교에서 우정과 연대를 쌓았다. 지역사회에서 마련해 준 식당에 가서 당번을 정해 식사를 하고, 각자 텃밭에서 가져온 농산물을 나눠 먹었다. 매년 겨울에 열린 도서관에서 하룻밤 자기 행사에서는 속 시끄러운 사연 하나씩을 나누며 마음의 짐을 덜어냈다. 요양병원이나 장례식장에 갈 때도 서로의 마음을 다독였고, 생의 끝자락을 바라봐주는 사이가 되었다.

글을 모른다는 사실이 알려질까 두려워 어머니학교에 나가길 주저했던 할머니들은 이제 누구보다 안남 어머니학교를 자랑스럽게 여긴다. 사회적 약자로 늘 시혜를 받고 돌보아야 할 존재로, 가엾이 여겨야 할 존재였던 그들이 당당히 주인으로 일어선 것이다. 쭈뼛쭈뼛하며 가기를 두려워했던 관공서와 농협을 이제 거리낌 없이 방문하기 시작했다. 글을 배워서 그리 된 것이 아니라 모여서 서로를 만나고 서로의 삶에 대해 어루만지고 보듬어줬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안남면은 지역의 정서와 삶의 터전의 무늬를 살린, '터무니 있는 교육'을 만들어냈다.

2003년에 설립된 안남 어머니학교는 이제 문해 교육을 넘어서 문화 교육까지 지평을 넓혀 죽을 때까지 하는 평생교육을 지향한다. 방학과 졸업이 싫은, 배움이 즐거운 학교. 이것이 삶의 교육이 이뤄지는 대학의 원형 아닐까?


면 단위에서 장소성을 살린 새로운 지역학으로 가자


안남 어머니학교의 성공은 장소성에 바탕한다. 생활세계가 주축이 되어 옥천 지역의 특수성을 살린, 삶에 밀착한 교육이 이뤄졌다. 이제는 옥천뿐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도 지역공동체 교육을 만들어 가야 하지 않을까?

나는 이런 사색의 여정에서 지역학을 떠올린다. 단지 한 지역을 이해하는 차원이 아니라, 지역 생활권과 생활 터전에 기반한 실질 학문, 지역공동체를 지속 가능하게 만드는 지역학을 발전시켜야 한다.

여기서 핵심은 가장 작은 생활권 단위로 돌아가야 한다는 점이다. 농촌 지역에서는 읍이나 면 단위를 생활권으로 꼽는다. 시내버스의 읍 집중 교통으로 오일장이 와해되면서 읍면 생활권 단위가 무너지고 있지만, 지역에서는 오랜 세월 면 지역 단위로 정서가 형성되어 왔다. 이는 사람들이 만나고 영향을 주고받으며 쌓은 지역 공동체성이다.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지역학은 ‘안남학’, ‘청산학’, ‘군서학’처럼 각 면의 이름을 붙인 학문이어야 하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전반을 아울러야 한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자면 이런 문제의식을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 ‘안남천의 환경오염을 막기 위해 주민들과 관이 실천해야 할 일들은 무엇인가?’, ‘안남초등학교와 안내중학교 폐교를 막기 위해 민관에서는 무엇을 고민해야 하는가?’, ‘안남면사무소 앞 광장의 효율적인 활용 방안은?’, ‘안남면 서낭당고개에서 겨울에 미끄러지지 않도록 하기 위한 방안’, ‘안남 마을버스 발전 방향’ 등등. 지역 속에서 연구해야 할 과제들은 수없이 많다.

삶의 문제, 지역과 마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학문이 곧 지역과 주민을 위한 학문이다. 지역에서 세운 대학에서는 지역의 실질적인 문제들을 연구하도록 기반을 닦아야 한다. 지역 출신 화가가 그린 그림에 대해 공부하고, 농촌이나 지역 관련 음악을 듣고, 학교가 터를 잡은 곳의 지리와 생태를 전문적으로 분류하고 정리하는 작업이 이뤄져야 한다. 이러한 장소성은 결코 역사, 지리, 과학 분야에 국한되지 않는다. ‘떡갈나무에 달린 도토리 개수 세어 보시오’라거나 ‘농암저수지의 지름과 반지름, 너비를 구하시오’ 하는 등의 수학 문제를 얼마든지 상상상할 수 있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초등학교 3학년 교과서만 들여다봐도 지역에 대한 잘못된 지식이나 업데이트 되지 않은 정보가 그대로 실려 있는 것을 금세 발견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지역학을 고민한다. 느슨하지만 끈덕지게, 엉성하지만 단단하게 지역학을 주민들이 다시 세울 수 있다. 온 삶이 교육이어야 하고, 온 생활 터전이 교육이 될 수 있다. 궁금증과 불편함을 겪은 주민들이 직접 삶을 위한 학문을 만들어나갈 수 있다. 주민의 삶이 바영되지 않은, 지역의 대학과 연구소에서 컨설팅 사업의 일환으로 작성하는 탁상공론 보고서들은 무의미하다. 주민들이 발언할 수 없는 지역에 대한 세미나와 토론회는 공허하다. 연구자들이 주축이 된 지역 연구가 아닌, 주민들과 장소가 구심점이 되는 학문이 우리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다.



지역 언론이 대학 교육을 수행할 수 있다면


그렇다면 지역의 담론은 어디에서 이뤄질 수 있을까? 정보 교환의 장은 어디인가? 다시 안남 어머니학교를 떠올려 보자. 언론의 역할을 학교가 맡을 수 있다.

지역 언론은 풀뿌리민주주의의 초석이자 마지막 보루다. 흔히 말하듯 언론이 세상을 보는 창이라고 한다면, 지역 언론은 스스로를 돌아보는 거울에 가깝다. 언론이 창 너머 세상을 관전하는 역할을 한다면 지역 언론은 삶터를 들여다본다. 지역 언론은 내 주변의 사람과 일을 대상화하지 않는다. 기사에 실어도 되는 문제와 나의 문제를 분리하지 않는다. 모든 존재를 동등하게 특별하다고 여기기에,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지면에 등장할 수 있다.

지역 언론은 사실상 지역 대학의 역할을 한다. 비판적 사고와 공동체에 대한 관심으로 무장하여 지역 속을 파고들어 끊임없이 취재하고 글로 쓰기 때문이다. 언론에서 지역의 이슈는 쉽게 사장되고 만다. 연예인 가십과 소모적인 정치 놀음에 대한 이야기로 지면이 가득 차기 일쑤다. 그러나 지역신문은 쓸모 필요, 민주주의를 담보한 언론이다. 삶터를 변화시키고 생활의 문제를 해결하고, 지역에 대한 유용한 정보가 담겨 있는, 일상 속 민주주의를 구현할 수 있는 ‘솔루션 저널리즘’이다. 지역신문은 자발적으로 이슈를 발굴해 새로운 담론을 형성한다.

옥천에는 700명에 달하는 공무원이 있고 군의원 여덟에 도의원 둘, 군수와 지역구로 하는 국회의원 등 12명의 선출직 공무원이 있다. 이들을 주축으로 매년 6천억 원에 달하는 군 예산이 편성되고, 의회를 통해 예산이 통과되거나 삭감된다. 지방자치가 시작되어 대표자를 선출하기만 할 뿐 어떤 정책이 시행되는지 그때그때 알 수 없다면, 이는 가짜 자치, 가짜 민주주의다. 신문은 이런 상황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옥천신문 기자는 언제고 군의회 방청석에 앉아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의회 영상이 공개되긴 하지만, 홈페이지 접속하는 사람도 이를 시청하는 사람도 거의 없다. 그러나 주민들은 옥천신문을 읽고, 피드백을 하고, 관련 정치인에게 직접 연락하기도 한다.

옥천신문은 1989년 군민주 신문으로 만들어졌다. 32년의 동안 오로지 ‘저널리즘’으로 승부를 걸었고, 아직 건재하다. 지역에 뿌리내린 역사를 바탕으로 옥천신문은 지역신문의 새로운 모델로 발돋움하기 위한 방편으로 옥천저널리즘스쿨을 고안했다. 더 많은 청년을 지역신문의 기자로 불러모으고, 지역의 담론을 활성화하기 위함이었다.

삼선재단과 서울시에서 제공한 인프라 덕분에 우리는 옥천저널리즘스쿨을 상상할 수 있었다. 맨 처음에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제안사업으로 풀뿌리청년언론학교를 1주간 기획했다. ‘학교’라는 이름에 걸맞게 강좌를 전체 커리큘럼의 80퍼센트로 계획했지만, 강좌보다는 실전 취재, 동행 취재 수업이 좋았다는 수강생들의 의견을 따랐다. 이를 바탕으로 2021년, 옥천저널리즘스쿨을 열었다.


지역 언론인을 길러내는 민립대학


옥천저널리즘스쿨은 옥천에 새로운 그라운드를 제공한다. 지역 언론을 활성화하여 지역 담론을 생산하고, 종국에는 지역이 재생되는 미래를 꿈꾼다. 그래서 옥천저널리즘의 예비 기자들은 현장에서 부딪쳐 가며 옥천이라는 특수성과 지역, 농촌이라는 보편성을 동시에 배운다. 지역의 메커니즘과 직업 교육을 현장에 살며 배우는 것이다. 옥천저널리즘스쿨에는 2019년에 18명, 2020년에 20여 명의 인원이 거쳐갔다.

그러나 지역 언론의 이상적인 모델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지역에만 머무를 수 없다. 장기적으로 청년들이 모여 언론을 조직하기 위해서는 옥천저널리즘스쿨을 교육 과정으로 ‘인정’받는 것도 중요하다. 지역의 교육이 중앙에서 바라보는 교육과 동등한 가치, 그리고 그 이상일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중이다. 충남대학교, 동국대학교와 학점인정 인턴십 교류도 하고 있고, 제천간디학교, 금산간디학교와 1개월~3개월 진로캠프 등 교육 과정도 비정기적으로 열고 있다. 경력을 취업이나 창업에 연결하는 방법들도 염두에 두고 있다.

옥천이 지리적으로 남한의 중심인 만큼, 옥천을 지역 언론의 근거지로 만들자. 지역 언론인을 꿈꾸는 청년들을 길러내어 민들레 홀씨처럼 전국에 흩뿌려 보자는 거창한 기획으로 시작했지만, 두고 볼 일이다. 지역신문 하나 없는 곳도 태반이며, 사이비 언론만 그득한 지역도 많다. 온라인에서 떠도는 자료들을 그대로 복사한 뉴스만 보면서 생활하는 주민이 과반수다. 언론은 여전히 공급자 중심의 뉴스 체제에서 복무하고 있고, 주민들의 눈과 귀와 입을 가린다.

플랫폼이 아무리 날고 기고, 뉴미디어가 매일 새롭게 나타나도 지역 생활 정보는 간과할 수 없다. 당근마켓이 생활 권역 시장을 열고 배달의 민족 같은 온라인 플랫폼 서비스가 지역 시장까지 잠식해도 지역 언론은 대체되지 않는다. 지역의 이야기는 지역에 사는 사람만이 쓸 수 있기 때문이다. 지역신문이 각자의 삶터에 뿌리내리고, 전국적 네트워크를 형성하게 된다면 문화의 다양성이 확보되고 언론의 새 패러다임이 펼쳐질 것이다.

지역신문은 오늘의 지역을 기록하는 역사이다. 사람들로부터 시작되는 관계형 언론이라는 점에서 지역신문이야말로 초창기 언론의 원형질에 가장 근접하다. 옥천저널리즘스쿨은 단순한 언론인 양성 기관이 아니다. 지역 생활의 문제를 짚어내고 대안을 끊임없이 고민하는, ‘민립대학’의 역할을 수행한다. 비판적 사고를 바탕으로 지역 문제에 접근하고, 주도적으로 담론을 형성하며 해결책을 찾는 진정한 시민을 길러내는 대학이다.


태어난 지역에서 계속 살아가려면


학교는 맨 처음 지역에서 만들었다. 동네 유지와 주민들이 힘을 모아 땅을 기부했고, 그 터 위에 학교가 세워졌다. 학교 운동회 날은 지역 축제와 다름없었다. 담장과 문턱이 없었고, 온 세대가 어우러져 학교 운동회를 즐겼다. 그런 의미에서 학교는 지역의 구심이었다. 같은 학교에서 동문수학했던 선후배 동기들이 지역을 떠나도, 서로를 끈끈하게 묶는 끈이 되었다. 하지만 30년 전후부터 지역의 학교는 급격하게 쇠락의 길을 걸었고, 학생 수가 줄어들면서 폐교 위기에 직면했다. 분교와 폐교 수순으로 학교는 사라졌고, 학교 설립을 위해 기부했던 부지는 마을로 환원되지 않은 채로 교육청 재산에 귀속되어 현재 일부는 매각하거나 임대사업에 사용되고 있다.

생활권 구심으로 작동했던 학교는 통폐합되면서 더 커졌고 그만큼 체계화됐다. 하지만 주민들이 학교 담장 안의 소식을 접하는 일은 적어졌고, 학교 시설을 이용하는 일은 거의 사라지면서 어린이 청소년이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학교에 대한 관심은 옅어졌다. 학교는 이제 지역 청소년들에게 열악하고 피폐해진 농촌을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가 되었다. 온갖 미디어와 학교에서는 사실상 지역 농촌을 어떻게 탈출할 것인가를 가르친다. 대학은 그 종착지인 셈이다.

불행히도 학교 교육은 ‘장소성’을 잃었다. 중앙중심적인 국가체계 교육과 서울, 도시 중심의 미디어 콘텐츠의 과잉으로 사라져 버렸다. 정부, 시도교육청, 지역교육청, 일선 학교까지 수직 위계체계로 운영되며 지역의 고유한 문화를 소거해왔다.

나는 지역 재생의 대안으로 새로운 지역의 풀뿌리 대학을 제안한다. 지역을 공부하고, 지역의 담론을 생산하고, 지역의 사람들이 지역 이야기의 주체가 되는 삶을 학교에서 시작하고자 한다. 지역의 대학이 지역의 일자리를 만들고, 지역에서 삶을 꾸리는 근간이 될 것이다. 삶에 뿌리내리는 교육을 지역에서 시작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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