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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군단위 허구, 진짜 생활혁명의 시작 ‘읍면 커뮤니티'

by 권단

면 지역이 갖는 의미


우리나라에서도 예로부터 읍면단위 생활권이 가장 기초적인 생활권이었다. 하지만, 현재는 시군자치가 되면서 기초자치단체 인구가 많이 늘어났고 전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을 정도 기초자치단체 평균인구가 많은 실정이다. 기초자치단체 평균인구가 가장 작은 1천700여 명인 프랑스와 비교할 때 우리는 10배 이상 많으며 미국, 일본과 비교해도 상당히 많은 편이다.

지금처럼 우리나라 기초자치단체의 자치구역이 여느 나라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광대하게 설정된 것은 1952년 시작된 읍면자치가 1961년 5.16 군사정부에 의해 시군자치로 전면 개편된데다 1990년대 중반 정부의 강요에 가까운 종용으로 또 한차례 대규모 시, 군 통합이 이뤄졌기 때문이다. 그 결과 기초자치단체의 수가 1960년 1천467개에서 2009년 현재 230개로 대폭 줄었고 기초자치단체의 면적은 6.4배나 넓어졌다.

1995년 지방자치제가 다시 부활할 때까지 지방자치는 죽어 있었다. 하지만, 지방자치제 부활 이후에는 읍면자치가 아니라 시군 자치제로 바뀌면서 생활자치가 아닌 제도자치로 한계점을 많이 드러내고 있는 것이 현 상황이다. 유럽의 경우, 기초자치단체 평균 인구가 1만명 이하가 대부분이지만, 우리나라의 경우는 기초자치단체 평균 인구가 20만명 정도로 전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을 정도로 크다.

대전대 안성호 교수는 “풀뿌리 주민자치는 주민이 지방정부의 운영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느끼는 소규모 지역사회에서 효과적으로 실현될 수 있다. 주민자치는 지역사회의 사정을 소상히 아는 주민의 참여를 촉진함으로써 의사결정의 질을 향상시키고 자원봉사와 같은 사회적으로 유익한 주민활동을 고무하며 주민의 민주적 역량 함양에도 기여한다. 더욱이 주민참여의 확대는 그 자체로서 본질적 가치를 지니지만 공리주의적 관점에서도 행정효율의 재고에 기여할 수 있다”고 말했다.


시군단위 개발방식도 균형발전의 실패


옥천만 놓고 보아도 5만명 인구이지만, 옥천읍이 3만명으로 절반이 넘어 모든 정책과 예산, 기반시설 등이 읍편중으로 쏠려 있는 것이 현실이다. 옥천읍이 옥천군 인구의 절반이 넘는 인구(56%가량)를 가지는 읍 집중도는 도내 최고다. 읍의 인구가 물론 늘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읍은 한계치에 달해 포화상태이고, 면은 급속한 인구 감소로 말라 죽어간다. 면에서 읍으로 인구 이동을 하고 읍에서 대전 등 대도시로 이동하는 패턴이 고정화되어 있음에도 이를 해결할 의지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면은 읍에 비해 생활기반시설, 문화복지시설이 열악하고 읍은 갈수록 주거문제, 도심교통 문제 등으로 인해 쾌적성을 잃어가고 있다. 면은 면대로 읍은 읍대로 인구의 집중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형국인 것이다. 기실 군은 생활권인 읍면을 모아놓은 것이지 그 자체는 실체가 없다. 연간 3천억원이 넘는 예산이 옥천읍에 대부분 편중되어 있고, 수영장, 체육센터, 도서관, 문화예술회관, 다목적회관, 생활체육관 각종 사회기반시설이 읍에 편재되어 있다. 옥천군은 충청북도에 균형발전을 요구하고 충청북도는 정부에 균형발전을 요구하지만, 요구하는 당사자들부터 이를 지키고 있지 않아 그 진정성이 의심스럽다. 행정도 마찬가지다. 군 행정이 중심에 있고 면은 군에서 결정한 것을 하달 수행하는 기관으로 자체 기획능력도 없는 실정이다. 만일 그나마 물이용부담금을 재원으로 한 금강수계 주민지원사업비와 댐주변지역 지원사업비마저 없었다면 소외된 면은 더 열악해졌을 것이다.

아직 성에 차지도 않지만 면단위로 주민참여예산제 등으로 인해 일부 예산이 내려온 것은 긍정적인 변화지만 예산이 너무 적어 실효성이 의심된다. 예산을 더 증액해달라고 요구할 필요가 있다. 이런 지역의 불균형 발전으로 인해 안남면은 변변한 보육시설 하나 없어 지역 젊은 부모들이 고통받고 있으며 인구유출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마을 사업의 한계


정부의 마을사업은 생활권역을 못 읽어내고 개별 마을 단위 사업에 치중하면서 밑빠진 독에 물 붓기 사업이 될 공산이 크다. 이는 확장성과 지속가능성이 떨어질 뿐더러 생활권역 내 몇개 마을에만 집중지원하면서 되려 마을간의 불화와 갈등을 일으킬 소지가 다분한 것이다.

여기서 생활권역이란 매우 중요하다. 특히 농촌단위 생활권역이라하면 면단위라고 볼 수 있는데, 이는 예로부터 오일장이 서면서 자급 순환경제 체계를 갖추었던 곳이라 볼 수 있다. 또 지속가능한 자치의 최전선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조선시대까지 읍면에 향리가 자연스럽게 형성되었고 이를 기반으로 우리나라도 해방 이후 잠시 읍면자치제를 하였다. 하지만 박정희의 쿠데타에 의해 자치제가 아예 없어졌고 시군 행정체계를 갖추다가 95년 지방자치제가 부활될 당시에 이에 대한 고민없이 시군 행정체계를 아예 고착화시킨 것이다. 시군 행정체계가 고착화되면서 시군의 중심인 읍의 발전이 가속화되었으며 생활권역인 면단위의 발전은 쇠락의 일로를 걸었다. 시내버스가 읍중심으로 개편됐고, 읍의 장이 더 커졌으며 면의 장터는 하나씩 둘씩 사라지면서 그 명맥이 끊어지다시피 했다. 그렇게 자급순환경제 체계의 가장 기본인 장터가 사라지면서 급속히 자본이 집약된 읍중심으로 빨려들어간 것이다. 이렇게 된 데에는 몸에 맞지 않는 행정체계의 옷이 아주 지대한 구실을 했다.

현재의 면 단위는 자체 기획기능이 없고 군의 하부구조로 전락해 있으며, 군 단위 종합개발계획도 면단위를 삶의 정주 공간으로 보고 각 분야별 고민을 한다기 보다는 면 단위 특화된 작목 중심으로 관광코스 중심으로만 예산을 집중하고 있다.

가령 이원면은 묘목 중심으로 군서면은 깻잎과 장령산으로만 예산을 투여할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정주기반사업이라야 전부 죄다 토목공사에 다름 아니다.

면 단위를 지속가능한 생활공간으로 성찰하지 못하고 사유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아직도 면 단위에 보육시설 하나 없는 곳이 태반이고 도서관 하나 없는 곳이 즐비하다. 가장 기본적인 시설이고 당연히 갖춰야 할 것들이지만 이런 것에 대한 생각은 전혀 없는 것이다. 이는 면을 정주 공간이나 독립된 자립공간으로 인식하기 보다는 군단위 하부조직으로 보며 군 중심의 특화된 개발을 해 군의 치적을 쌓는데 활용하려 하기 때문이다.

이런 군 단위 개발방식은 주민들이 갖고 있는 정서적인 기반과도 위배된다.

아직도 주민들은 옥천군에 살면서도 이원사람, 안남 사람, 안내 사람, 청산 사람 등 면 단위 정서 기반구조를 갖고 있다. 이는 분열주의적인 사고방식이 아닌 지극히 자연스러운 생활권역에서 나온 말들이라 보면 된다.

하지만, 지금의 면단위는 여러 복합적인 요소로 인해 죽어가고 있다. 1면 1교 정책이 유지되고 있지만, 갈수록 인구가 읍으로 인근 도시로 쏠리는 단계별 이주는 아주 거부할 수 없는 당연스러운 것으로 생각하며 지자체도 거의 손을 놓고 있는 실정이다. 옥천의 경우, 면단위에서 읍으로 이주하고, 읍에서 대전으로 빠져 나가는 것이 거의 도식화되어 있고 이는 경제적인 문제 뿐만 아니라 교육적인 문제, 문화적인 문제 등 복합적인 요소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마을보다 면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다름 아닌 생활권역의 제대로 된 건사가 중요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나마 활동하는 젊은 사람이 남아있는 마을에 집중 지원하는 것은 마을 단위의 위화감만 조성하며 갈등만 유발시킬 수 있다. 거기는 공모사업도 잘 따오고 몇 사람이 들어가 활동도 열심히 하니까 돈이 잘 들어와라고 하지만 그렇게만 바라볼 수 없는 무언가가 있는 것이다.

마을은 최소 뿌리 단위이긴 하지만 현재의 요건도 그러하거니와 역사성으로 볼 때 다양성으로 볼 때 지속가능한 커뮤니티 공간으로는 면 단위가 적정하지 않나 생각한다.

그것은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살고 있는 주민들이 자연스레 느끼는 것들이다. 물론 이와 관련해서는 다른 이견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프랑스나 스페인, 스위스 등의 기초자치제, 커뮤니티 인구가 평균 1천500명에서 3천명 이내라고 보면 우리나라에만 갖고 있는 특수성은 아닌 듯 싶다.

그렇게 보면 면 단위가 상징하는 것은 크다. 자치자급의 가장 기본 단위이고, 지속가능한 농촌을 상징할 수 있는 중요한 삶의 공간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면 단위 공간을 성찰하고 사유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면단위 논의구조를 비롯한 자치구조, 경제구조, 문화구조, 교육시스템 등을 읽어내야 생활권역의 문제점을 통으로 볼 수 있다. 하부 조직이 아닌 독립된 자생력이 있는 공간으로 보아야 만 면단위의 정주 기반 정책이 제대로 세워질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우리의 먹을거리의 기반인 농업 정책에도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지속가능한 농업은 지속가능한 농촌에서 가능하기 때문이다. 농촌을 단지 농산물 생산의 전진기지로 생각하고 공장처럼 보는 시각에서 고정되어 버리면 우리나라 농업, 농촌은 죽는다. 경쟁력 있는 것만 살리고 특화하고 나머지는 다 죽여여 한다는 그 생각이 바뀌지 않는 한 우리나라 농업, 농촌의 희망은 없다. 그래서 최소 자급자치의 생활공간이기도 하고 작목반이나 영농조합법인 등이 꾸려질 수 있는 면 단위가 살아야 하는 이유이다. 사람이 계속 들어오고 순환되어야 지속가능한 농촌이 가능한 법이다. 이런 차원에서 우리나라는 정부에서 뿐만 아니라 지자체에서도 경쟁하며 귀농귀촌 정책을 세우는데 이의 실상을 제대로 보면 아연실색한다. 언발에 오줌누기이고 눈감고 아웅하기다.

귀농정책을 따로 별도로 세우는 것은 이 또한 이미 정주하며 오랫동안 살고 있는 토박이 주민들에게는 위화감과 갈등만 조장할 뿐이다. 귀농정책은 시골 농촌에 오는 사람에게 몇 푼 돈을 쥐어주거나 각종 정주할 수 있는 혜택을 주는 것인데 이는 또 다른 차별일 수 있다.

차라리 농촌 삶의 공간에 대해 성찰하고 가장 기본적인 시설 구축과 아울러 지속가능한 운영에 대해 고민해야 하는 것이 더 빠르다. 농촌 자체가 여전히 삶이 열악한데 돈 몇 푼 쥐어준다며 오라하는 것은 호객행위에 다름 아니며 사는 사람들을 무시하는 행위다. 귀농정책, 귀촌정책 하지 않아도 저절로 들어와 살만한 공간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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