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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단 Jul 04. 2024

‘헬조선’ 탈피하려면 ‘탈서울’부터

지역은 식민지다. 단지 중심과 주변부라 칭하는 건 적절치 않다. 그럼에도 워낙 오랜 문제라 별 저항 없이 당연스레 받아들인다. 일제가 그토록 바랐던 ‘내선일체’가 ‘서지일체’(서울과 지역은 한몸)로 현현하게 실현되는 것을 목도하지 않는가? ‘말은 제주로, 사람은 서울로’라는 속담을 하지 않아도 ‘모든 길은 서울로 통하고 있다’. 그것은 내밀하게 오랫동안 의식화된 결과기도 하다. 스스로 존재를 부정하고 배반하게 만드는 삶은 얼마나 비참한가?


청년은 도시로, 서울로 내몰린다. 그것은 개인의 선택으로 위장되지만, 사실 구조적인 문제다. 개인의 의식 형성에 큰 영향을 주는 미디어와 교육, 어느 하나 지역을 제대로 알려주는 곳이 없다. 알량하게 초등 3학년에 부록처럼 껴 있는 지역교과과정은 내용도 조잡하고 잘못된 정보도 많아 안쓰럽다. 옥천의 교사와 공무원은 대부분 대전, 청주에서 출퇴근한다. 교사들은 지역에 무지한 채 “공부 못해서 농사나 지을래?” “지역에 남으면 루저다”라고 공공연하게 말한다. 그것은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 15년 가까이 체화된다. 가정은 다른가? “농사일 거들지 말고 공부나 해”라는 말은 거의 입버릇처럼 되어 있다. 정부의 ‘농’정책이, 농촌·농업·농민에 대한 처우가 땅에 떨어졌으니 이를 먼저 아는 것이다. 물려주거나 가르치려 하지 않고 이 ‘농’자 붙은 것이 자기 대에서 끝나기를 바란다.

미디어는 어떤가? 옥천을 보면, 라디오는 인접한 대전에, 티브이는 행정구역인 청주에 귀속되어 있다. 라디오를 켜면 대전 소식들이, 티브이 뉴스를 보면 청주 방송이 나온다. 똑같은 수신료를 내지만, 인구 5만 안팎의 군 단위까지 방송시설을 설치할 생각은 없다. ‘걸어서 세계 속으로’도 가고, 해외 가서 비일비재하게 촬영하는 것을 비판하는 건 아니지만, 정작 지역에 일상화된 취재망·통신망을 구축하면서 풀뿌리 저널리즘을 실현하고 지역 아카이브로 축적하는 것이 공영방송의 목적에 부합하는 것 아닌가? 뉴스를 보면 우리나라의 위계가 드러난다. 청와대와 서울, 수도권, 그다음에 광역 소식. 옥천은 나올까 말까? 식민사회, 수직위계사회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왜 똑같은 수신료를 내면서도 지역에 더 중한 일을 첫머리 뉴스로 볼 수 있는 권리를 갖지 못할까? 왜 지역은 소규모라도 방송을 가질 수 없는 걸까? 이런 갈망으로 1989년 옥천 주민들은 스스로 마음을 모아 독립운동하듯 <옥천신문>을 만들었지만 공중파의 식민지는 여전하다.

그것은 위해하다. 사람을 블랙홀처럼 도시로, 서울로 빨려가게 하는 전초기지 구실을 하기 때문이다. 지역 농촌을 대상화하며 음험하게 탈출하라고 강요한다. 한낱 전원이나 고향으로 그려내는 농촌은 그런 인식의 한계이기도 하다. 당최 언론인이나 지식인이나 정치인이 지역에 살지 않으니 그 실정을 알 수가 있나? 그 빤한 의식과 한계로 수많은 권력을 움켜쥐니 뿌리 절단나는지도 모르고 에프티에이(FTA)다, 티피피(TPP)다 무슨 훈장처럼 주렁주렁 매달려고 하는 것이다.

뿌리가 썩는데 나라가 바로 설 리 없다. 풀뿌리가 엉망인데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할 리 만무하다. 세종시가 만들어졌다고 분권이 됐는가? 균형발전 운운했지만 단물은 광역도시들이 다 빼갔다. 그것을 내면화해 옥천도 읍 인구가 절반을 넘을 정도로 읍 중심이 과하다. 깊숙이 뿌리박혀 있는 중심과 주변 구조, 이것은 ‘있는 사람’이 ‘없는 사람’을 착취하는 구조에 기반한다. 묻고 싶다. 과연 이 나라에 지역이란 존재하는가? 현장에서 느끼는 삶의 궁핍이 예사롭지 않다. 동학농민혁명이 어디서 발화됐는지 잊었는가? 변화는 변방에서 시작된다. 부디 ‘헬조선’을 탈피하려면 ‘탈서울’부터 하시라. 그대들에게 드리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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