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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단 Jul 05. 2024

공동체 저널리즘 윤리에 대하여

마을신문도 진화한다. 그리고 저널리즘 윤리가 필요하다


 흔히 마을신문이라고, 공동체미디어라고 하면 알콩달콩 한 동네소식 다룬다는 생각을 하기 십상이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고 그런 소식들은 여전히 유효하다. 하지만, 그런 소식들만 담는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공동체 언론이라고 하는 것이 초기에 자리 잡을 때는 동네 소식들과 따스한 인터뷰나 탐방 등을 통해 시작할 수 있으나 그 쓸모가 더 강해질수록 매체가 주민들 속에 자리잡을수록 주민들은 더 많은 것을 요구하게 될 수밖에 없다. 각종 민원이나 제보 등이 쏟아질 때 그것에 대처할 수 있느냐는 매우 중요한 분기점이다. 어디에 살든 누구랑 살든 사람이 모여 살면 문제가 안 생길 수가 없다. 돈과 힘이 모여 있는 곳에 각종 부조리와 부패, 무능과 실정이 없을 수가 없다. '더'와 '덜'의 차이일 뿐,  소통되지 않고 공유되지 않으면 더더욱 그렇다. 언론이 공론장 기능을 하기 시작하면 할 수 있는 일이 정말 많아진다. 여기에서 우리는 결단을 내릴 수 밖에 없다. 그냥 사업비 받아서 취미 생활과 추억으로 1년에 한두 번, 세 네 번 싣는 동네 소식지로 만족할 것이냐. 아니면 조금 더 나아가 공론장의 그릇으로 거듭날 것이냐의 기로에 서 있게 된다. 그 때 쯤 되면 기민한 판단과 빠른 추진력으로 사실 결단을 내려야한다. 여기서 요구되는 것은 풀뿌리 민주주의를 사수하겠다는 의지, 공론장을 지켜야겠다는 마음, 그리고 이를 처리하고 해결할 수 있는 직무능력, 빼놓을 수 없는 언론인의 윤리의식이라 할 수 있다. 커뮤니티 저널리즘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단지 채널을 만드는 게 아니라 공동체저널리즘을 한다는 것


 미디어를 만드는 것과 저널리즘을 하는 것은 엄밀히 말하면 같은 듯 다르다. 하나의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는 것은 미디어로 상업적인 이익을 취하는 것일 수 있고, 동영상을 찍어주고 납품하거나 디자인 인쇄를 해주면서 미디어 관련 일을 할 수는 있으나 저널리즘은 이와 비교하면 완전히 다른 것이다. 사회의 공기를 만드는 것이다. 숨 쉬는 공기 뿐만 아니라 밥 먹는 공기, 즉 사회의 숨을 쉬게 하고 사회의 (말과 글)밥을 먹는 그릇을 만드는 것이다. 재밌는 이야기를 만들어서 유튜브 콘텐츠에 구독을 늘이고 뷰를 늘이는 것과는 다른 일이다. 물론 자생력을 기르기 위해 수익을 창출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겠지만, 주민들의 필요에 복무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커뮤니티저널리즘은 솔루션 저널리즘일 수밖에 없다. 주민들의 삶과 밀착될 수 밖에 없고 밀착되면 밀착될수록 다양한 민원과 제보가 잇따를 수밖에 없다. 그런 민원과 제보를 취재하다 보면 지역의 힘 있는 사람들과 여러 직책을 갖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돈 많은 사람들, 관료들과 반드시 부딪치게 되어 있다. 이는 필연적이다. 거기서 어느 편에 서느냐 보다 우리는 옳고 그름에 대한 상식적인 판단과 끊임없는 논의가 필요하다. 이 때문에 홀로 취재하고 기사 쓰는 것이 다소 위험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편집국이란 존재는 다양한 생각을 맞부딪치면서 주관적인 생각과 관점을 객관화하는 과정이다.


우리가 취재를 하면서 공들여야 하는 것들


 1차적으로 사안에 대한 다양한 이해관계자 이야기를 귀담아 들어야 하고, 2차적으로 사안과 관련된 참고 자료들을 찾아 읽어내고 관련 전문가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중요하다. 대충 인터뷰하고 행사 취재하는 것과 달리 민원 등 관련한 취재는 행정용어와 관련법에 대해서도 숙지를 해야 하고, 반드시 전문가 자문도 받아야 한다. 그래야 법적 다툼으로 가더라도 튼튼하게 준비할 수 있다. 팩트 확인을 넘어서 맥락적 진실에 대한 고민을 끊임없이 해야 한다. 사안들은 복잡다단할 수 있고 단 한 가지 팩트만 갖고 밀어 붙이면 한계가 명확한 기사가 될 수밖에 없다. 글은 기록으로 남고 기사는 많은 사람들과 공유되는 것이기 때문에 팩트 확인이 잘못 되었을 경우, 언론사 자체에 타격이 크다. 일단 다양한 이해관계자의 이야기를 듣고 사실 확인을 하면서 충실하게 취재를 해야 한다.  

 이렇게 취재가 되었으면 편집국에서 같이 논의해서 최종 어떻게 쓸 것인지 같이 방향을 잡는 것이 필요하다. 이런 많은 과정을 통해 폭넓은 시야와 관점을 확보하며 기자는 성장할 수 있다.  이 부분은 기성 언론과 별반 차이가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여기서 탑재되어야 할 것은 더 엄격한 윤리 의식일 수 있다. 대충 써낼 수가 없다. 내 일상을 공유하는 사람들을 때론 비판해야 하고 감시하고 견제해야 한다. 커뮤니티저널리즘은 '창'이 아니라 '거울'에 가깝다. 거울은 나와 내 삶터를 비춰보면서 문제점을 발견하고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것이다. 내가 완전히 공동체에서 벗어난 타자가 아니라 공동체에 속해있는 구성원이라는 것이다. 특히 인구가 얼마 되지 않은 한 다리 건너면 다 아는 농촌지역일 수록 더 엄격한 윤리의식이 요구된다. 그런 사회일수록 사회적 평판이 굉장히 중요하고 또 다른 의미에서 사회적 비판이 되면 견딜 수 없는 저항에 직면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공동체저널리즘일수록 윤리의식이 철저하게 필요하다


 공동체저널리즘에 충실하게 기사를 쓰면 처음엔 엄청난 기사 주목도와 직설적인 피드백이 들어온다. 여러 이해관계자가 걸쳐있는 기사일수록 주목도와 피드백이 높게 나타난다. 보도 자료만 다듬어서 내는 죽은 박제된 기사를 쓰는 게 아니라 사람들 속에서 민원을 발굴하고 이해관계가 많은 기사를 쓰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기사를 기다린다. 기사가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여론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신뢰를 쌓은 언론일수록 기사의 파장이 크고, 신뢰받는 기사를 쓸수록 언론의 신뢰도는 당연히 높아진다. 비판을 할수록 지역사회를 움직여왔던 기관단체장이나 관료들의 저항은 엄청나다. 전화로 욕설을 하는 것은 예사이고 어떻게든 언론사에 타격을 주기 위해 골몰을 하거나 해당기자에게 거센 항의를 하기도 한다. 전화로 하는 것은 익숙해지면 받아 넘기기도 하는데 문제는 밥 먹으로 식당 갈 때나 슈퍼 갈 때 마주친다는 것이 어렵다. 마주치면 격한 반응을 하기도 하고, 모른 척 쌩하고 지나쳐 가기도 한다. 사실 초창기 기자활동을 하면서 그나마 친했던 사람들의 관계가 다 깨졌고 상처도 많이 받았다. '니가 나한테 어떻게 그럴 수 있어'라는 반응과 '내가 그래도 잘 응대해줬는데 뒤통수를 때리네' 뭐 이런 반응들은 숱하게 많다. 보통 사회활동을 많이 하는 사람들, 단체장이나 여러 위원 등이 공적인 일을 하기에 언론에 등장하기 쉽고 이들은 그 만큼 사회적 평판을 중요시한다. 언론이 긍정적으로 아니면 부정적, 비판적으로 보도하느냐에 따라 그들의 입장은 확연하게 갈리기도 한다. 

 특히 관료들, 즉 공무원, 경찰, 교사 등은 언론의 보도방향에 따라 인사고과에도 반영이 될 수 있기 때문에 특히 민감하다. 사건사고 관련 초창기 때 취재를 했던 경찰 관계자는 매우 친밀하게 잘 응대해줬지만, 친하게 지냈다. 하지만, 친인척 업체에게 경찰서 내부 공사 수의계약을 맺었다는 제보를 받고 취재를 했다. 취재를 하면서 경찰 관계자는 갑자기 더 애걸하거나 아니면 냉대하거나 하면서 기사 만류를 하려고 애를 많이 썼다. 하지만, 취재 과정에서 친밀했던 관계는 깨졌고 기사를 보도가 되었으며 결국 해당 경찰을 정년을 얼마 앞두지 않은 상황에서 파면 처분을 받고 말았다. 좁은 지역에는 해당 경찰뿐만 아니라 경찰 가족과 친인척도 살고 있기 때문에 그 영향은 실로 크다. 

 .사회적 평판이 좁은 지역사회일수록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언론보도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투표로 선출된 단체장이나 의원, 시험을 통해 공직을 얻은 관료들은 기사에 따라 자신의 거취의 향배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기사에 예민하게 반응한다. 더구나 그들은 이미 막대한 권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언론이 아니면 그들을 비판할 수 있는 사람들이 없기도 하다. 언론의 사명인 권력과 자본에 대한 끊임없는 감시와 비판과 견제가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언론이 권력, 자본과 야합하기 시작하면 돈을 쉽게 벌수는 있으나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버림받는 길이다. 대부분의 사이비언론들이 걸어가는 행로이기도 하다. 구독료보다는 광고료가 금액이 크며, 사업비나 협찬비용이 더 규모가 크기 때문에 언론사 생존을 이유로 야합하는 사례가 빈번하다. 이는 '편집권 독립'이라는 말이 언론사 소유구조와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방증하기도 한다. 

 큰 권력일수록 기사를 무마하려는 노력이 집요하다. 10여 년 전 현직 군수가 선거운동원을 공고를 하지 않고 청원경찰 등으로 채용했을 때, 첩보를 입수하고 취재를 시작했다. 현직 군수와 연관된 사안이기 때문에 직접적인 정치적 타격을 우려하여 부군수, 국회의원 등이 신문사 문턱을 정말 닳도록 많이 찾아와서 기사를 막으려는 시도를 지속적으로 해왔다. 하지만, 결국 기사가 나가자, 역공을 하기 시작했다. 보도가 되기 전에는 사실을 다 인정하고 앞으로 그러지 않겠다는 다짐까지 입에 발린 말로 해 놓고서는 보도가 된 후에는 다른 지자체에서도 관행적으로 하고 있는 사안을 신문에서 현직 군수를 흡집 내려고 이런 보도를 계속 한다고 이야기를 하고 다녔다. 다른 언론에서 받아쓰지 못하도록 입막음을 했고, 실제 다른 언론에서는 이 같은 뉴스들이 나오지 않았다. 검찰과 경찰에서도 바로 수사하지 않고 1년 후 청와대에서 토착비리 수사를 하면 특진시킨다고 나오자 옛날 기사를 꺼내어 수사를 해서 결국 뇌물수수혐의까지 밝혀내어 구속된 사례가 있었다. 


이웃들도 아는 지인도 제보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공동체저널리즘이 더 많은 윤리의식이 필요한 이유는 정치인뿐만 아니라 생활인들도 언론에 오르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지역이 좁다보니 그 대상이 지인일수도 있고 이웃일수도 있다. 그럴 경우 상황이 난감해진다.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갈리는 사안에, 아니면 비판의 대상으로 지목되는 사람으로 제보가 되었을 때 일단은 객관성을 위해서라도 기자와 이해관계가 걸리면 피하는 것이 상책이다. 하지만, 작은 신문은 기자가 몇 명 없고 기사가 할당되면 또 쓸 수밖에 없다. 취재하는 과정에서 벌써 관계가 깨지기 시작한다. 내 이웃의 어르신은 한 지역사회단체장이었는데 10년이 넘도록 정기총회를 한 번도 하지 않은 것이 제보된 적이 있다. 문제는 이 단체가 국가와 지자체의 보조금을 받고 있다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 결국은 보도를 했고 회장은 사퇴를 했다. 하지만, 관계는 틀어졌다. ‘이웃에 사는 사람끼리 정말 너무하는 것 아니냐’고 하셨지만, 제보가 온 사안이었고 취재를 해서 사실 확인이 된 이상 보도할 수밖에 없는 사안이기도 했다. 또한, 지역에서 아이들을 키우면 아이 친구 부모 하고도 기사 관련 척을 질 수 밖에 없는 사안이 발생하기도 한다. 그렇게 되면 아이들 교우 관계까지도 영향을 주게 되기도 하는 등 여러 고충에 시달린다. 이런 상황을 겪다보니 ‘불가근 불가원’이라고 너무 멀지도, 너무 가깝지도 않은 비판할 수 있을 정도로만 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나름 본인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장치였던 셈이다. 그래서 한 후배기자가 조기축구회를 든다고 했을 때 한번 고민해보라고 한 적이 있다. 축구를 좋아하고 여러 사람 사귀는 통로로 조기축구회가 좋을 수도 있지만, 반면에 기사 관련 여러 청탁으로 힘들 수 있기 때문에 한 말이었다.   


익명과 실명, 어떻게 보도할 것인가?


 한 금융관계자가 대출 관련 뇌물 수수 등에 얽매여 기소가 되었을 때 취재가 되었을 때 해당 가족들이 신문사를 찾아오거나 수차례 전화를 하여 '제발 보도를 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다. 기소만 된 상태이고 아직 재판 결과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자칫 낙인을 찍히면 안 된다고 심각하게 보도 만류를 했다. 보통 공공기관이나 금융기관, 또는 공인의 경우에는 수사나 기소 단계에서도 보도를 하는 것이 관행이었으나 개인의 신분이 지나치게 노출되면 재판도 하기 전에 낙인이 찍혀 앞으로 지역사회에서 생활이 어렵다고 하소연을 했다. 그래서 타협을 한 결과 최대한 익명으로 사건을 보도했다. 농협이라고 하면 몇 개 밖에 안 되고 특정될 수 있기 때문에 금융기관으로 표기를 했고 이니셜과 무관하게 알파벳으로 해당 당사자를 전혀 유추할 수 없도록 표기를 했다. 하급 직원이었기 때문에 당사자가 ‘누구냐’보다 행위에 초점을 맞추었고 관리감독을 하지 못한 기관에 책임을 묻는 방향으로 보도했다. 

 익명성은 매우 중요하다. 30년 전 옛날 신문에는 용감하게 사건 사고 기사에도 실명과 나이, 사는 곳 까지 그대로 기재했다. 하지만, 이는 명백한 명예훼손이 될 수 있다. 누구냐보다 사건 행위에 그리고 이를 어떻게 처리했느냐에 방점을 찍어야지, 누구냐를 파헤치려고 들면 사회적관계망에 많은 피해자를 양산할 수 있다. 익명을 표기할 때는 철저하게 익명으로 읍면도 표기하지 않고 조금 더 높은 행정구역으로 표기를 하고 이니셜 영문이나 한글로 절대 표기하지 않고 상관없는 ABC표기를 하는 것이 좋다. 반면, 공인들과 책임 있는 공무원의 말일 경우 대체로 실명처리를 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팀장급 이상, 단체장이나 의원들의 멘트를 인용할 경우 실명처리가 바람직하다. 그들은 공인으로 활동하는 만큼 말 자체가 정치행위이기 때문이고 행정행위이기 때문이다. 말에 그만큼 책임을 져야 하는 위치이기 때문에 실명을 쓰는 게 맡다. 공동체 저널리즘에서 익명은 최대한 아무도 모르게 익명으로, 공인의 실명은 최대한 실명 그자체로 명기해야 한다는 원칙을 지켜야 할 필요가 있다. 


커뮤니티 저널리스트는 투명한 유리상자에 산다


 좁은 지역일수록, 인구가 많지 않은 지역에서 기자 활동을 한다는 것은 많은 제약이 따른다. 늘 사람들을 만나고 새로운 이슈를 쫓아다니는 것이 일이기 때문에 기자들은 관계망이 일반 주민에 비해 10배 이상 많은 인맥을 가질 수 있다. 아마 정치인에 육박하는 관계망들을 소유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주목을 받는다. 누가 기자인지를 알고, 그 기자가 누구를 만나는지, 어떤 말을 하고 다니는 지에 대해 귀를 쫑긋 세우고 듣는다. 도시도 그렇지만 특히 농촌지역은 씨족사회가 아직 형성되어 있고 집성촌이 있기 때문에 말을 함부로 하면 큰 코 다칠 수 있다. 그야말로 곳곳에 ‘움직이는 CCTV’가 있고, ‘내 귀에 도청장치’가 있으며 곳곳에서 언제 ‘말폭탄이 터질 줄 모르는 지뢰밭’이다. 그래서 여러 사람에게 많은 말을 듣는 만큼 그 말은 되도록 전하지 말거나 전할 때는 신중해야 한다. 기자의 말 한마디가 현상을 움직일 수 있고 왜곡시킬 수도 있다. 식당에 갈 때나 카페에서 기사 관련 이야기를 나눌 때 특히 조심해야 한다. 낮말도 밤말도 듣는 사람들이 꼭 있다. 기사 관련에서는 보안이 생명이다. 


 제보는 특히 신경을 써서 받는다


 그리고 사회적 약자가 부조리, 부패 제보를 할 때는 정말 보안을 지키면서 만나야 한다. 간호조무사나 사회복지사, 어린이집 교사, 비정규직 노동자 등 일터에서 약자인 그들은 한번 찍히면 그 판에서 아예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제보가 매우 두렵다. 그래서 제보를 하더라도 지역 안에서 만나는 것을 매우 꺼리게 된다. 옥천 같은 경우는 인근 대전이나 영동, 보은에서 남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만남을 청하기도 한다. 그럴 때는 제보자가 되도록 편안한 환경에서 만날 수 있도록 배려를 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제보자가 노출되지 않도록 철저하게 기사를 써야 한다. 기사를 조금 더 상세하게 현실감 있게 쓰기 위하여 특정하지 않더라도 상황이나 공간을 지나치게 자세하게 묘사하게 되면 제보자가 노출될 수 있다. 기사에 대한 욕심보다는 제보자의 안전한 생활이 더 중요하다고 인식해야 한다. 어디까지 보도해야 할지, 취재원과 편집국 사이에서 충분한 논의를 해야 한다. 그리고 기사가 나간 이후가 더 중요할 수 있다. 기사가 나간 후 흔히 대부분의 기관이나 사업장에서는 제보자를 색출하려고 난리를 치는 경우가 많다. 더 은밀하게 접근하고 후속 기사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취재원과 논의를 해서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보도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 


 누구나 뉴스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공동체저널리즘의 가장 큰 특질과 차이는 지역 안에 있는 사람 누구나 공론장에 쉽게 들어올 수 있도록 문턱을 없애는 데 있다. 뉴스가 특정 정치인이나 관료들, 그리고 기업들에 독점되지 않도록 50, 60대 남성들이 독차지하지 않도록 세대별 균형과 지역별 균형을 항상 인식해야 하고 공론장 접근이 어려운 소수자들에게 늘 적극적으로 다가가려고 노력해야 한다. 남녀노소, 중심과 변방 가리지 않고 뉴스가 균등하게 나와야 하고, 장애인, 노인, 이주여성, 외국인이주노동자 등 소수자에게 더 특별하게 신경을 써야 한다. ‘특별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모두가 특별하다’는 커뮤니티저널리즘의 격언을 되새기며 누구에게나 마이크와 펜을 건네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다양한 일반 주민들의 이야기를 듣는 코너, 청소년과 청년, 노인, 여성, 장애인들의 이야기를 듣는 코너를 기획하고 항시 이야기가 흘러나올 수 있도록 물꼬를 틔어줘야 한다.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옥천, 길 위에서 만난 사람’, ‘독자데이트’, ‘할말있수다’ 라는 코너를 만든 것은 누구나 만날 수 있도록 그렇게 기획한 것이다. 출입처와 쏟아지는 보도 자료에만 매몰되다보면 주변이 잘 보이지 않는다. 홍수같이 쏟아지는 정보들을 가려내고 내 일상의, 삶터의 뉴스들이 무엇인가 발굴해야 한다. 뉴스는 관에서 공급한 죽은 보도 자료에 있지 않다.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를 듣다보면 저절로 삶의 뉴스가 만들어진다.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운명같이 찾아온 '농업'이제는 떼려야 뗄 수 없게 됐죠"

한농연 옥천군연합회 사업부회장 신홍석씨


농사하게 되리라고는 꿈도 못 꿨다. 그러나 운명은 신기하게도 그를 농사일에 데려다 놓았다. 아버지가 농사를 짓고 있었지만 일을 돕는 것일 뿐 농부가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이제는 어엿한 농업인으로 자리한 신홍석(47)씨는 농사와 만난 것은 '우연'이라 말했다. 세 형제 중 막내로 태어난 그는 공무원 준비를 위해 고향에서 공부하며 조금씩 아버지를 도와 어깨너머로 배웠다고 말했다. "옥천고를 졸업하고 공무원 준비를 하면서 농사일을 조금씩 도왔어요.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농업인이 되더라고요."
 충주에서 열린 전국농업인경연대회에서 농업발전의 공을 인정받아 농촌진흥청장상을 거머쥔 신홍석씨는 딸기하우스 천평과 벼농사 3만평을 농사 짓는 어엿한 농부다. 그가 처음으로 농사를 시작한 작물은 사실 '느타리버섯'이었다. 기업화된 대규모 농사가 아닌 볏짚을 이용한 버섯농사를 했다. 그래서인지 공장형으로 대량 생산하는 버섯보다 소비자들로부터 꾸준한 인기를 얻었다. 18년간 느타리버섯을 재배하다 보니, 기관지에 무리가 생기는 일은 당연했다. 포자에 의한 호흡기 질환은 버섯농사를 짓는 사람이면 흔하게 걸리는 질병이라고 이야기했지만, 내심 아쉬운 마음이 컸다. 그래서 찾은 딸기농사는 농사일의 제2막이 됐다.
 "딸기 농사를 지은 지 4년째 됐어요. 딸기는 참 어려운 작물이에요. 다른 과일처럼 더울 때 나는 작물이 아니어서 더 신경이 쓰이죠. 추운날에 나오는 작물이 어려운 법이죠. 논산으로 딸기농사를 배우러 유학도 갔었어요. 딸기랑 벼농사 이렇게 두 개를 짓는데 어쩌면 농사짓는 기간이 잘 맞아서 계속해서 딸기농사를 열심히 지어볼 생각이에요."
 그저 씨를 뿌리고 물만 주면 나오는 게 아니고 정성에 공부를 더 해야 좋은 작물이 나온다는 생각에 신홍석씨는 백방으로 연수와 공부를 계속했다. 농업기술센터에서 강의한다고 하면 누구보다 빠르게 출석해 강연을 듣고는 했다. 신홍석씨의 딸기는 청산으로 생선국수 먹으러 오는 도시민들에게 소문이 날 정도로 맛이 좋다. 최근 들어는 지역에 생산된 건강한 먹거리를 학교 급식으로 출하하기도 했다. 농촌에서는 '청년'인 신홍석씨는 농사짓는 일이 자신에게 우연처럼 다가왔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그 삶의 길목에서 그는 벌써 20여 년 넘게 농사일을 보는 농부가 돼 있었다.
 "나름대로 열심히 했다고 생각했는데 상을 받으니 더 부끄럽더라고요. 항상 바쁜 일정에도 주위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받지 못했을 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늘 열심히 하는 농부가 될게요."
 


피해자의 입장도 존중하라


 사건사고 기사의 경우, 그리고 민원의 경우에도 경찰이나 행정관계자를 통해 이야기를 들어 기사를 쓰는 것이 대부분이다. 직접 가해와 피해자를 만날 수가 없다. 개인정보보호 때문에 연락처가 없어 연락을 못하는 경우도 대부분이다. 경찰발이나 행정발로 기사를 쓰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피해자가 기사가 나기를 원하지 않는 경우, 애매해진다. 피해자의 인권과 사안의 공익성 사이에서 치열한 논의가 필요하다. 보도됨으로 인해 얻을 수 있는 공공의 이익과 훼손되는 피해자의 인권 사이에서 우리는 더 많은 논의를 해야 한다. 하지만, 한 사람의 희생위에 얻어지는 공익이란 없다. 사안이란 이미 일어난 것이고 피해자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기사에 대한 욕심도 욕심이고, 이런 일들이 지역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현실을 일깨울 필요도 있지만, 피해자가 원하지 않는 뉴스를 과연 어떤 공익을 위해 내어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을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해서 묻혀 지는 기사들이 꽤 된다. 피해자의 인권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어떻게 보도를 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방법론적으로 고민이 필요하다. 


정정보도와 반론보도에 대하여


 팩트 확인이 잘못된 기사는 해당 면에 똑같은 폰트 크기로 정정 보도를 해줄 필요가 있다. 그리고 정정이 아니라 반론보도를 원하는 경우도 있다. 정정보도는 틀린 사실을 다시 정정하는 것으로 명백한 언론사 잘못이지만, 반론보도는 보도가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보도의 관점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을 때, 반론보도를 하게 된다. 반론보도는 대부분의 언론사에서 폭넓게 수용한다. 가장 좋은 것은 기사에서 반론이 충분히 담기는 것이 제일 좋다. 하지만, 모든 기사는 미완성이고, 마감에 쫓기면서 완성으로 가는 진행형이기 때문에 100% 완벽할 수 없다. 정정보도가 잦아지면 언론에 대한 신뢰가 떨어진다. 신뢰가 떨어지면 기자가 현장에서 취재하는 데 무척이나 힘이 든다. 보통 민감한 기사일 경우, 정정보도나 반론보도로 첨예하게 다투게 된다. 언론사와 소통이 어려워지게 되면 언론중재위로 가기도 한다. 어떤 사람들은 언론사랑 한 번도 이야기하지 않고서 바로 언론중재위로 직행하는 경우도 있다. 언론중재위에 가면 준비해야 할 서류들이 많아진다. 취재 경위와 팩트에 대해서 증명해야 하고, 여러 중재위원 앞에서 이를 설명해야 한다. 기사 쓰기도 바쁜데 언론중재위까지 가면 덜컥 겁이 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도 언론활동의 한 부분이라고 인식하고 절차대로 대처하면 된다. 대부분 정정보도나 반론보도로 귀결되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법정 소송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형사 소송과 민사 소송으로 이어지면 언론사가 받는 타격도 타격이거니와 취재 기자들이 많이 위축되기도 한다. 의연하게 대처하고 끝까지 가는 수밖에 없다. 경찰, 검찰 조사를 받게 되면서 기자들도 성장한다. 많은 것들을 경험하면서 기사를 어떻게 써야 하는지 배우게 되며 더욱더 팩트 확인과 반론을 들으려 노력하게 된다. 


[정정 및 반론보도] 옥천군청 공무원 코로나19 확진 보도 관련 [2021.09.03.]


 옥천신문은 지난 4월 30일 「코로나19 확진 B팀장, 방역 수칙 위반 직위 해제」 제하 기사 및 이후 다수 보도를 통해 옥천군청 자치행정과 소속 팀장(옥천-32번)이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았고, 같은 과 공무원 등 추가 확진자들의 감염원으로서 지역 연쇄 감염에 영향을 미쳐 방역수칙 위반을 이유로 직위 해제됐다는 내용을 보도했습니다.
  이에 대한 사실확인 결과, 옥천군청의 확진자 현황 공시에 따르면 해당 팀장(옥천-32번)은 동료 공무원(옥천-30번)과 휴가 중인 군인(옥천-41번)의 ‘감염원’이 아닌 ‘접촉원’으로 명시돼있음을 확인해 이를 바로잡습니다. 
  한편, B팀장(옥천-32번)은 “본인과 A팀장(옥천-30번)이 지난 4월 19일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은 바, B팀장이 A팀장의 감염원이라는 확정적 근거는 없으며, 또한 휴가 나온 군인(옥천-41번)이 확진 판정을 받은 시점도 지난 4월 22일이고 장례식장에서의 접촉자도 다수인 점에 비추어 B팀장이 위 군인의 감염원이라고 확정하기도 어렵다.”고 알려왔습니다. 
  이 보도는 언론중재위원회의 조정에 따른 것입니다.
 

지역사회의 트라우마가 큰 보도의 경우 


 살인이나 사망사건의 경우, 자극적으로 보도하는 경우가 많다. 옥천에서 일가족 사망사건이 일어난 적이 있었다. 생활고에 시달려 결국 아버지가 아내와 자식들을 죽이고 자살을 시도하다가 실패한 사건이었는데 굉장히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전국의 취재진이 다 몰렸고 사생활을 다 털어내며 자극적으로 보도하기 바빴다. 뉴스가 쏟아지는 동안 지역에 사는 주민들은 조용히 슬픔을 애도할 기회를 빼앗겼다. 이웃들이 받았을 충격, 아이들 학교 친구들이 받았을 슬픔과 고통에 대해서는 아무도 눈 여겨 보지 않았고 귀담아 듣지 않았다. 주민들은 트라우마 속에서 아픈 기억을 빨리 지우려 하고 있었다. 학교에서는 빈 책상에 국화를 놓고 세상을 떠난 아이에게 추모의 편지를 쓰고서 충분히 애도할 시간을 가졌다. 옥천신문은 그런 지점에 주목했다. 아픈 친구를 떠나보낼 수 있는 시간, 이웃의 아픔을 슬퍼하고 애도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이다. 클릭수를 올리려고 자극적으로 쓰기보다 지역주민의 눈으로 귀로 보고 듣고 써야 한다.  다음은 2018년 8월30일 기사이다. 


 [한 주 동안 옥천은 먹먹하고 비통했다. 옥천읍에서 발생한 일가족 4명 사망사건의 피의자가 바로 아버지이자 남편인 A씨라는 사실이 25일 언론을 통해 보도되면서 주민들은 극도의 우울감에 빠졌다.
  이번 사건은 피의자 A씨가 지역 체육계에서 많은 활동을 했던 점, 평소에 이웃과 친목을 다졌고 화목한 가정생활을 했다는 이웃 주민의 증언 등이 더해지면서 충격에 휩싸였다.
  마을 주민들은 말을 잇지 못했다. 해당 집이 보이는 창문을 막은 주민도 있고, 주민 몇몇은 아예 집에도 들어가지 못한 채 남의 집 생활을 전전하는 사람도 있었다. 모두들 쉬쉬하며 이야기를 꺼내지 못하고 있었지만, 마음 속에 멍울져 있는 슬픔은 부지불식간에 베어 나오곤 했다. 악몽을 꾸는 이도, 심리적 괴로움을 호소하는 이도 있었다.
  한창 해맑게 웃고 떠들고 신나게 놀아도 시원찮을 10살, 9살, 7살 아이 셋과 그 아이들을 너무나 사랑해서 언제나 같이 다녔던 아이 엄마가 저세상으로 떠나버렸다. 그들을 해한 사람이 아버지이자, 남편이라는 사실과 사채를 끌어다 쓴 빚을 감당하지 못해 그런 범죄를 저질렀다는 사실이 주민들을 절망케 했다.
  경찰 조사가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과열된 언론의 보도 경쟁은 필요 이상으로 구체적이고 선정적인 기사로 이어졌다.
  아이가 다니던 학교와 유치원도 큰 슬픔에 빠졌다. 어떻게 아이 친구들에게 설명을 해야 할지 학교는 당혹감에 빠졌고 담임교사들도 괴로움을 호소했다.]
 

학교 안 보도, 학생들이 다치지 않고 주체가 되도록


 학교 안의 문제가 언론에 등장할 경우, 가장 시끄럽다. 학부모와 교사들의 반발이 엄청나다. 일단 학교 안의 명예가 실추되었다고 제보자 학생을 색출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청소년기자단이 쓴 기사가 학교에 대한 비판 내용일 경우 학교는 대부분 민감하게 반응한다. 학생을 불러 기사를 쓰게 된 경위를 묻거나 왜 이런 기사를 써서 학교 명예를 실추시켰는지 계속 괴롭히는 경우가 많다. 이런 경우, 학생들이 괴롭힘을 당하지 않도록 보호해야 한다. 민감한 비판 기사의 경우, 사실 확인을 하고 기자가 쓰거나 익명으로 쓰도록 하는 배려가 필요하다. 학생이 실명으로 기사를 쓰고 싶다고 할 경우, 사실을 같이 교차 확인하고 교장이나 교감에게 이를 미리 말하며 학생들을 불러 뭐라 말하는 걸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 청소년 기자단 운영을 매우 중요하다. 어릴 적부터 비판적 사고를 키우고, 시민성을 기르는 교육일 수 있다. 학교안의 당당한 주인으로서 목소리를 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대학을 가기 위해 공부만 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사는 시민으로서 목소리를 내어야 한다고 말해줘야 한다. 그런데 아무도 이런 말을 해주지 않는다. 청소년은 학교 안, 지역 사회, 가정 안에서 독립된 주체로서 자기 목소리를 일찌감치 내는 방법을 길러야 하는데 모든 주체가 이를 반기지 않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옥천고등학교 청소년기자단을 했던 친구들이 학교 축제 당시 성희롱을 했던 교감을 옥천신문 여론광장에서 실명 비판해 지적한 것은 이런 의미에서 큰 성과이다.  


안녕하세요, 저는 현재 옥천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2학년 ㅇㅇㅇ입니다.(직접 실명을 이야기함)
 제가 이번 마성제에 관련하여 글을 쓰게 된 이유는, 이번 사건에 대한 비난의 화살이 자꾸만 피해자 쪽으로 가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여론 광장에 올라온 다른 글을 읽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이번 옥고 축제 중 '여장대회'코너에서 교감 선생님의 언행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현장에 있던 다수의 학생들이 충격을 받았고, 현재 교감 선생님 및 학교 측의 적절한 피드백을 절실히 원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제가 이번 사건의 당사자로서 느낀 건, 사과를 하고 용서를 구해야 할 사람이 의당 교감 선생님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이를 공론화시킨 학생들에게 욕이 돌아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읽어보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며칠 전 네이트판에 옥고 축제와 관련하여 한 익명의 글이 올라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에 대해 분개하였고, 공감해주었습니다. 하지만 해당 사이트에 글이 올라오고 난 후, 학교에서는 누가 그 글을 썼는지 찾아내는 것에만 급급했습니다. 해당 학생은 글을 익명으로 올렸습니다. 왜 그랬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인문계 고등학교에 다니는 학생으로서 학교생활 중 가장 중점을 두고 있는 부분은 바로 '대학 입시'입니다. 그리고 저희가 대학에 원서를 넣을 때 필요한 생활기록부의 세부내용을 작성하시는 분들이 바로 선생님들이십니다. 학생이 선생님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구조입니다. 학생이 실명으로 글을 올릴 경우 그 학생에게 피해가 갈 가능성이 있습니다.
 글이 올라온 후, 많은 사람들이 '그러게 왜 글을 올려서 학교 망신을 시키나', '그 학생 때문에 학교 이미지만 나빠져서 학생들 대학 입시에 피해 보는 거 아니냐.' 등 오히려 작성자를 욕하며 비난했습니다. 그 날 어떤 분께선, "교감선생님이 하신 말씁의 의도를 파악해라. 설마 악의를 가지시고 그런 말씀을 했겠냐.", "제발 조용히 살자." 등, 이번 일의 책임을 학생들에게 묻는 듯한 반응을 보이셨습니다. 네, 저희도 알고 있습니다. 교감 선생님께서 악의를 가지고 그런 말씀과 행동을 보인 것이 아니라는 걸요. 하지만 저는 도리어 "가해자의 의도가 어떠했건, 그게 중요하나요?" 라고 묻고 싶습니다. 가장 중요한건 피해자의 감정이고 피해자의 상태입니다. 설령 교감 선생님께서 그럴 의도가 없으셨다고 해도, 본인의 언행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학생이 존재한다면 그에 마땅한 사과를 하는 것이 옳은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해당 사이트에 익명으로 글을 작성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나 많은 비난이 돌아왔습니다. 만약 그 학생이 실명으로 글을 썼다면 어땠을까요. 지금 제 글을 읽고 계신 여러분 중 단 한 분이라도, 그 학생이 학교로부터 어떠한 부당 처벌도 받지 않았을 것이라고 호언장담하실 수 있는 분, 계신가요? 학교에선 SNS에 글을 올린 학생이 누군지 찾는 데에만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학생들에게 그런 글을 올릴 시 학교의 이미지가 얼마나 실추되며, 그것이 학생들의 대학 입시에 얼마나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에 대해 설명하며 학생들의 입을 막으려 합니다.
  제가 실명으로 글을 쓰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제가 익명으로 글을 쓴다면, 학교는 또다시 학생들에게 두려움을 주며 작성자를 찾는데 열을 올릴 것입니다. 저의 글로 인해 무고한 학생들이 또다시 부정의 말을 듣지 않길 바라기 때문에, 저의 생활기록부에 불이익이 갈 것에 대한 두려움이 앞섬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실명으로 글을 올립니다.
  누군가는 저의 글을 보며 제가 관종이라고 생각할 것이고, 누군가는 너무 나댄다고 말할 것이며, 또 누군가는 제 글이 거짓투성이인 글이라고 평가할 것입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이 글은 이번 사건에 대한 개인의 사회적 가치 중심이 흔들리지 않게 해줄 도구일 것이며, 누군가에겐 사이다일 것이고, 저에게 있어선 아직 사라지지 않은 양심의 소리입니다. 제 글을 어떻게 평가하시든, 어떤 피드백을 주시든, 상관없습니다. 중요한건 이번 사건이 그냥 이대 묻혀선 안 될 것이며, 많은 사람들이 이번 일에 대해 생각해보셔야 한다는 겁니다.
  왜 학교는 지속적으로 여성을 성상품화하는 코너를 만드는 것일까요? 왜 사람들은 그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며 환호하는 것까요? 잘못된 문화를 '전통'이라는 말로 묶어두는 것이 과연 정당한 일일까요? 정의는 피해를 보지 않은 사람들이 움직일 때 실현된다는 한 초등학생의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다수가 불의에 대항하여 함께 힘을 모을 때, 비로소 낡은 전통이 무너지고 새로운 가치가 세워질 수 있습니다. 고작 작은 시골 마을의 학교에서 일어난 일 가지고 정의니 뭐니 운운한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큰 변화를 만드는 것은 작은 변화들이 모였을 때입니다. 이번 글을 통해 교감 선생님의 언행 이외에 발생했던 학교 축제 과정 상에서의 문제점들도 개선될 수 있기를 희망하며, 이에 대한 학교 측의 적절한 피드백 기다리겠습니다. 또한, 앞으로는 피해자가 가해자인 것처럼, 목소리를 낸 사람이 비난을 받아야 할 대상인 것처럼 여론이 형성 되는 일도 보지 않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끝까지 제 글을 읽어주신 여러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전하며 한 가지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의 정의는 아직 살아있습니까?[2017년 5월18일]


공적 이슈와 사적 민원의 구분 방법


신문이 알려지다 보면 별의별 제보들이 다 들어온다. 하지만, 언론사는 모든 민원과 제보를 처리할 수 있는 흥신소가 아니다. 간혹 보면 남편의 불륜까지 카카오톡을 캡처하고 증거사진을 보내서 언론사에 제보하는 경우도 있고 이웃 간 땅 분쟁도 단골 민원 소재로 많이 제보된다. 하지만, 사인간의 갈등은 엄밀히 말하면 공적 이슈는 아니다. 공공예산이 들어갔거나 공공행정과 연계된 문제의 경우, 공적이슈에 들어가지만, 사인간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취재할 필요는 없다. 이는 민사법정에서 해결할 문제이다. 이 부분까지 언론이 개입하기 시작하면 문제는 해결도 안 되고 갈등만 불거지고 양쪽에서 욕을 먹기 십상이다. 하지만, 모든 것을 법정에서 시시비비를 가리면 사실 변호사들만 배불리는 꼴이 되고 치루는 사회적 비용이 엄청나다. 그래서 지자체에서는 이웃분쟁 조정센터를 만들기도 한다. 평택에서는 2019년 6월 전국 최초 이웃분쟁조정센터 조례를 만들어서 시행하고 있고, 광주광역시에서는 2015년부터 마을분쟁해결지원센터를 운영하고 있어 매해 500여 건에 달하는 민원을 해결하고 있다. 사적 분쟁도 공적으로 해결하는 지자체의 정책은 합당하고 마땅하다. 이는 언론보다는 실질적 해결이 가능한 지자체 분쟁조정센터에서 해결하는 것이 공익적으로도 유용하다. 언론은 이 분쟁조정센터의 사례를 보도하면 된다. 


잊혀 질 권리도 존중해줘라


 간혹 신문에 실렸지만, 시간이 지나서 인터뷰를 삭제해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행복한 부부로 소개됐지만, 이혼을 해서 이제 기사에서 지워달라는 요청도 있고, 어릴 때 인터뷰를 했는데 옛날 사진이 공개되는 것을 원치 않아서 지워달라는 요청도 있다. 이런 요청들은 대개 수용하는 편이다. 물론 신문에 실리면서 공적 자산이 되었지만, 개인적인 내용이 많이 들어있는 인터뷰의 경우, 대부분 삭제를 수용한다. 그들에게는 잊혀 질 권리가 있다. 또한 취재를 거부할 권리 또한 있다. 인터뷰나 취재를 요청할 경우, 두 번이상 권하지 않는다. 언론에 대한 취재를 거부할 권리 또한 시민에게 있다. 이를 계속 강권할 경우 주민들에게 스트레스를 주며 스토커의 인상을 주게 된다. 두 번 이상 취재 요청을 하지 않는 것이 좋다. 그리고 기사가 나간 후 일부 내용의 수정은 가능하기도 하다. 내용이 틀리면 당연히 정정 보도를 해야 하고, 취재 당시 이야기했지만, 나가기 부끄러운 경우는 삭제해달라고 할 경우에 인터넷만 삭제를 해준다. 사실 취재 결과물은 취재원과 함께 만드는 공동저작물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기사를 사전에 먼저 보여달라는 요구에는 대체적으로 응하지 않고 민감한 부분만 부분적으로 확인하게 해 준다. 일일이 사전에 기사를 보여주게 되면 그것도 대응하기가 만만치 않다. 취재한 것을 바탕으로 편집국에서 논의하여 기사를 내는 것이 원안이다. 


기자의 양심에 반하는 기사를 쓰지 않는다


 기자는 근본적으로 기자의 양심에 반하는 기사를 쓰지 않는다. 사주나 편집국장이 지시를 내리더라도 부당하게 여겨지는 기사는 쓰지 않을 권리가 있다. 이럴 경우 노동조합이 설립되어 있는 경우 노동조합에 이야기할 수 있다. 언론사 내부에도 사주의 권력을 견제할 수 있는 노동조합을 설립해야 하고, 편집국장의 권력을 견제할 수 있는 공정보도위원회가 있어야 하며 언론사 전체를 견제할 수 있는 독자위원회 설립이 필요하다. 언론사 자체도 권력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주민들에 의해 제어되지 않으면 변질될 수 있다. 언론사 내부의 권력도 지속적으로 견제되어야 한다. 공적인 가치가 없는 기사를 쓰라고 지시받았을 때, 혹은 본인 기사가 본인과 상의없이 이상하게 편집되어 기사가 나갔을 때 항의할 수 있다. 


차별과 편견, 혐오를 부추기는 보도는 금기해야 한다


 서울대학교 합격생이 나왔다고 해서 취재를 한다는 것도 차별을 부추기는 보도이다. 옥천신문은 20년 전에 서울대 합격생을 자랑스럽게 인터뷰한 적이 있으나 작금에는 학교 정문에 서울대 합격을 거는 행위 자체를 인권을 침해하는 차별행위라고 지적한다. 인권감수성은 해마다 높아지고 있으며 이에 맞게 언론도 변해야 한다. 특히 장애인이나 성소수자, 노인 등을 비하하는 문장이나 용어들은 특히 조심해야 한다. 귀머거리, 벙어리, 장님 이란 용어도 차별적인 언사이고,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군이나 양을 붙이는 것도 하대하는 표현이므로 조심할 필요가 있다. 학생이나 되도록 ‘씨’를 붙여주는 것이 바람직하다. 인권감수성은 나날이 높아지고 있고 이에 대해 주파수를 맞추며 인권침해형 단어나 문장을 쓰지 않도록 각고의 노력을 해야 한다. 


학벌주의 부추기는 특정대학 입학 현수막

서울대 등 입학 시 매년 관행으로 게시
 인권위, 이미 두 차례나 게시 금지 권고
 고교 뿐 아니라 졸업생 출신 초·중학교도 가세


 특정학교 합격을 알리는 현수막 게시가 차별을 조장한다는 국가인권위원회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일부 학교에 특정대학 합격을 축하한다는 현수막이 버젓이 걸려 있어 논란이 일고 있다.
  2일 기준 옥천고등학교(교장 김일환)와 죽향초등학교(교장 변상수) 입구에는 해당 학교 졸업생이 올해 서울대학교 입학이 결정됐다며 축하한다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
 
 옥천고 현수막은 '옥천고총동문회'가, 죽향초 현수막은 '죽향초 교직원, 학교운영위원회 일동'이 제작한 것으로 적혀 있다.
  이는 국가인권위원회의 권고를 무시한 행위다. 국가인권위원회는 2012년과 2015년 두 차례 걸쳐 전국 각 시도교육감에게 각 급 학교나 동문회 등에서 특정학교 합격 홍보물을 게시하는 행위를 자제토록 지도 감독하라고 권고했다.
  당시 인권위 권고 결정문에 따르면 "(현수막에 게시된 학교) 외의 학교에 입학하거나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않은 학생들에게 소외감을 줄 수 있어 교육적 측면에서도 바람직하지 않고 결과적으로 학벌주의를 부추길 우려도 있다"며 "학벌주의가 심화될수록 본인의 능력을 개발하기 위한 학교선택보다는 이른바 '명문학교'에 입학하기 위한 경쟁에 몰두하게 된다"고 밝혔다.
  이어 "학벌주의에 의한 '명문학교' 선호 현상은 개인의 역량이나 능력에 따른 인력채용과 운용을 저해할 뿐 아니라 인적 자원의 활용을 왜곡시켜 기업 및 국가 경쟁력 강화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며 "공교육 현장의 교육자들에 의해 특정학교 합격 현수막 게시가 행해지는 것은, 교육기본법이 제시하는 교육의 이념에도 부합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인권위는 학교뿐 아니라 일부 학원들이 특정학교 합격 홍보물을 게시하는 것 역시 학벌 차별 문화를 조성할 우려가 있다고 판단해 지난해 8월 전국 시도교육감에게 이런 관행 개선을 위해 관리감독을 강화하라는 의견을 표명하기도 했다.
  특정대학 입학 현수막 게시 관행은 단지 올해뿐만이 아니다. 옥천고는 올해로 5년째 서울대생을 배출하고 있는데 매년 서울대 입학 축하 현수막을 게시했다.
  청산고등학교 역시 서울권 혹은 국공립 대학 입학생에 대한 축하 현수막을 관행적으로 학교와 마을 곳곳에 걸고 있다.
  죽향초 학부모 A씨는 "학부모 입장에서는 사실 명문대라 불리는 학교에 얼마나 많은 학생들이 진학 했나 궁금하긴 하다"며 "하지만 공교육 기관에서 그걸 대놓고 홍보하는 건 문제가 있는 것 같다. 특히 고등학교도 아니고 초등학교에서까지 본교 졸업생이라고 이렇게 현수막을 내건 건 보기 좋지 않다"고 말했다. 죽향초 변상수 교장은 4일 "학교 예산을 들여서 한 건 아니고 학교운영위원회에서 죽향초 자랑 아니냐며 걸겠다고 해서 한 걸로 알고 있다"며 "국가인권위원회의 권고가 있는지 몰랐다. 듣고 보니 (학벌 차별주의를 조장한다는 지적이) 맞는 얘기이고 학운위에 얘기해 바로 현수막을 철거하겠다"고 말했다. 옥천고 김일환 교장은 "동문회에서 학교에 특별히 얘기하지 않고 현수막을 걸었다"며 "개인적으로 (특정 대학 입학 현수막을 거는 건) 적절치 않다고 보는데 동문회에서 하는 거라 학교에서 어떻게 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도교육청 역시 특정 대학 입학 현수막을 게시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 밝혔다.
 도교육청 중등교육과 중등장학담당 이광복 장학관은 "인권위 권고에 따라 당연히 현수막 게시는 하면 안 된다. 교장 회의나 이런 데서 충분히 얘기를 하고 있고 대부분 학교에서도 알고 있을 텐데 간혹 모르는 학교도 있어 그런 일이 생긴 것 같다"며 "편법 비슷하게 동문회나 학부모회 이런 데가 주체가 돼서 현수막을 거는 경우도 있지만 학교 차원에서 제재를 해야 한다. 미흡한 부분이 있었던 것 같은데 해당 학교에 얘기하고 전체적으로 다시 안내를 하겠다"고 말했다.  이창욱 기자 승인 2017.01.06



공동체저널리즘윤리 지키며 신뢰받는 커뮤니티 저널리스트가 되자


 공동체저널리즘은 일반 저널리즘과는 또 다르다. 일반 저널리즘이 체계에 근접한 저널리즘이라면, 공동체저널리즘은 생활세계에 천착한 저널리즘이다. 그 역할과 책임이 조금씩 다르지만, 저널리즘의 그 원칙과 기본을 크게 다르지 않다. 외려 더 윤리적이어야 하며, 더 언론의 근원적, 본질적 접근이 필요하다. 결국 공동체저널리즘은 풀뿌리 민주주의를 사수하는 초석이자, 마지막 보루가 될 것이다. 말과 글은 권력과 자본에 의해 좌우되서는 안 된다. 결국 말과 글은 시민사회의 힘으로 지켜야 하며 공동체저널리즘은 시민사회의 최고의 수준 높은 기술이 됨에 틀림없다. 시민성과 주체성을 가지고 기록하는 글은 지역 안의 부조리와 부패를 소거하고, 소수자의 소외됨없이 지역사회 공동체 관계망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 것이다. 더 변방으로 더 낮은 곳으로, 더 소수자의 곁으로 다가가는 공동체저널리즘이야 말로 그 자체로 윤리적이다. 

 공동체저널리즘 윤리를 잘 지키는 신뢰받는 커뮤니티 저널리스트가 많아질수록 지역의 민주성은 한없이 높아질 것이며 지역의 공동체성도, 삶의 질도 한껏 나아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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