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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제 Mar 02. 2016

창조하는 자의 길에 대하여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드디어 의자에 앉을 수 있게 되었다. 수시로 일어나 스트레칭을 해야 하고 걸을 때는 재활훈련이라도 하는 기분이지만 그럭저럭 나아가는 중이다. 아플 때도 꿋꿋하게 글을 쓰는 강인한 작가가 되고 싶었으나 그동안 한 일이라고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을 열 권쯤 읽은 것뿐이었다. 내가 그렇지 뭐.

   그러나 위대한 작가들은 역시 다르다. 예를 들어 니체 같은 사람. ‘힘들게 위액을 토하게 하는 사흘 동안 지속되던 편두통의 고문에 시달리는 와중에―나는 변증론자의 탁월한 명석함을 갖추고 있었으며, 사물에 대해 아주 냉정하게 숙고했다. 그보다 양호한 상태였더라면 나는 그렇게 숙고하지 못했을 것이고, 그럴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예리하지도 냉정하지도 못했을 것이다.’(『이 사람을 보라』) 역시 철학은 아무나 못 하는 듯.

   철학은 아무나 못 하는지 몰라도 철학책은 누구나 살 수 있다. 그래서 인문학 무식자인 나도 5년 전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구매해, 니체가 보면 펄쩍 뛸 만큼 어처구니없는 오독을 즐겼던 것이다. 어렵고 재미없는 책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읽어보니 이 책은 매력적인 문장으로 가득 찬 보물상자와도 같았다. 거의 모든 페이지에 박박 밑줄을 그어댔다.

   10년 동안 산속에서 정신과 고독을 즐기던 차라투스트라가 ‘보라! 나는 너무도 많은 꿀을 모은 벌처럼 나의 지혜에 지쳤다. 그러므로 이제는 나를 향해 내미는 손들이 있었으면 한다. …… 넘쳐흐르고자 하는 이 잔을 축복하라!’라며 산에서 내려오는 첫 장면부터 간지가 넘쳐흘렀다. 그 뒤로 세상을 유랑하며 무려 80가지 주제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데 제목만 봐도 흥미롭다.

   세계 너머의 세계를 믿는 자들에 대하여, 환희와 열정에 대하여, 창백한 범죄자에 대하여, 읽기와 쓰기에 대하여, 전쟁과 전사들에 대하여, 새로운 우상에 대하여, 창조하는 자의 길에 대하여, 자유로운 죽음에 대하여, 동정하는 자들에 대하여, 성직자들에 대하여, 도덕군자들에 대하여, 천민에 대하여, 자기 극복에 대하여, 고매한 자들에 대하여, 교양의 나라에 대하여, 결벽 성향의 인식에 대하여, 학자들에 대하여, 시인들에 대하여, 커다란 사건에 대하여, 지혜로운 대인관계에 대하여 등등 온갖 것에 대하여 말한다.

   그중 내가 가장 아끼는 장은 ‘창조하는 자의 길에 대하여’다. ‘그대는 새로운 힘이며 새로운 권리인가? 최초의 움직임인가? 스스로의 힘으로 돌아가는 수레바퀴인가? 그대는 또한 별들을 강요하여 그대 주위를 돌게 할 수 있는가?’라는 문장은 포스트잇에 적어 한동안 책상 앞에 붙여놓기도 했다. 나는 결코 ‘새로운 힘이며 새로운 권리’, ‘최초의 움직임’은 아닌 것 같지만,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한다는 것만으로도 꽤 멋진 인생이라고 느끼곤 했다.

   그런데 5년이 흐른 지금은 저 문장의 신비감이 약간 퇴색된 느낌이다. 현대에도 ‘최초의 움직임’ 같은 게 가능할까? 역사와 인구가 쌓이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온갖 ‘최초’들을 선점해 버렸으니 더 이상은 그 누구도 최초가 될 수 없는 것 아닐까? 이제 ‘새로움’이나 ‘최초’ 같은 단어는 자유나 해방이 아니라 경쟁, 특허, 신제품 같은 것들을 연상케 한다. 나는 여전히 새로워지고 싶고 최초의 시도를 하고 싶지만, 남보다 새롭고 남보다 빨라야 한다는 의미의 새로움이라면 상상만 해도 피곤하다. 차라리 이미 있는 것들을 깨뜨리고 변형시키고 재조합하는 놀이가 더 재미있다.

   이 책을 다 읽고 나서도, 책상 앞에 ‘새로운 힘’ 운운하는 구절을 붙여놓고도, 사실 나는 초인인가 뭔가 하는 것이 되기 위해 노력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내 머릿속에서는 엉뚱한 아이디어가 싹텄다. ‘차라투스트라 다시 쓰기’. 나 혼자 쓰든 80명이 나눠서 쓰든, 이 책의 소제목들을 가지고 니체와는 전혀 다른 글들을 써서 모아 보는 것이다. 내가 만일 ‘창조하는 자의 길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글을 쓴다면 어떨까? 다른 사람들은 ‘세계 너머의 세계를 믿는 자들에 대하여’, ‘도덕군자들에 대하여’, ‘자기 극복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할까? 이런 글들을 모아보면 니체 철학만큼 대단하진 않지만 나름대로 흥미로운 콜라주가 되지 않을까?

   하지만 ‘대체 그런 짓을 왜 해야 되는데?’라고 누가 물으면 도저히 할 말이 없기도 했고, 남의 제목으로 글 80편을 쓸 만한 끈기 역시 없었기에 이 구상도 아이디어 상태로 처박힌 지 오래다. 제목 표절이나 원작자 모독으로 욕을 먹지나 않을까 하는 소심함도 한몫 했다. 내가 그렇지 뭐.

   하여간 지금의 내게 ‘창조하는 자의 길’은 새로움보다는 즐거움을 향하고 있다. 5년 후, 10년 후에는 또 어떻게 될지 모른다. 어차피 이 길에 끝은 없으니 내키는 대로 쏘다니다 보면 나만의 궤적이 만들어질 거라 생각한다. 이번 글도 망한 것 같지만 앞으로 찍어나갈 숱한 발자국의 하나일 뿐이다. 인생 뭐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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