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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제 Sep 18. 2022

8년 만의 부산국제영화제를 상상함

여행준비는 그 자체로 목적일 수 있는 행위이며, 여러 장점이 있다. 그중 하나는 '내가 누구인지를 정확히 알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다. ...(중략)... 여행준비의 과정에서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되는 이유는 여행준비가 선택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선택이란 포기의 다른 이름이다. 우리는 모든 것을 다 가질 수는 없다. 더 많이 원하는 것을 위해서는 덜 원하는 것을 버려야 한다.
(박재영, 「여행준비의 기술」, 글항아리)




명절 연휴가 끝나고 평범하게 울적한 하루하루를 보내던 중, '부국제를 가자!'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단 한 번의 추억으로 남아 있었던, 이 직장에 다니는 한 다시는 못 갈 거라고 믿었던(행사 기간이 겹침) 부산국제영화제를 짧게라도 가보자는 충동이었다. 지난 3년간, 코로나 터지기 전에 다녀왔어야 했다며 얼마나 후회했던가. 8년 전 그때가 내생애 처음이자 마지막 부국제가 되어도 좋은가. 앞으로 또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더 이상은 다음으로 미루지 말자. 결국 취소하게 되더라도 일단 숙소부터 잡아놓자.


딱히 대단한 시네필까지는 아니지만, 영화는 새로운 삶을 경험해보기에 좋은 방법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암전된 영화관에서 큰 화면을 바라보는 시간은 내 삶의 흔적이 가득한 방 안에서 책이나 드라마를 보는 것과는 다른 매력이 있다. 더구나 전세계의 온갖 독특한 이야기들이 한데 모이는 국제영화제란 얼마나 신나는 축제인지! 각각의 영화를 만들기 위해 애쓴 모든 이들의 잔치이자, 그들이 만든 온갖 색다른 작품들을 만나고 박수를 쳐줄 기회이기도 하다. 부대행사로 열리는 각종 공연과 이벤트도 즐기고, 낯선 도시를 여행하며 맛난 것도 많이 먹을 수 있다.


가장 먼저 숙소를 찾기 시작했다. 부국제 시즌 해운대 쪽은 여름휴가철보다 더한 성수기로, 숙소 예약도 힘들고 가격도 몇 배로 뛴다. 지난번에는 좁은 방에 이층침대 5개가 있는 10인실 도미토리에서 2박을 했는데, 이번에는 생애최초 나홀로 호캉스를 결심하고 나름 거금을 들여 비즈니스호텔 1박을 예약했다. 방은 좁지만 호캉스의 본질은 생활감 없는 깨끗한 방에 나 혼자 있는 것 자체가 아닐까?


다음으로는 교통편. 8년 전에 쓴 여행노트에 따르면, 새벽같이 일어나 종이 티켓으로 고속버스를 탔는데 차가 밀려 점심무렵에 도착했다고 한다. 그 뒤로도 지하철역에서 헤매고 짐 맡기고 하느라 여행 첫날부터 배곯고 지쳤었다. 개고생 끝에 먹은 팥빙수가 너무 맛있어서 좋은 기억으로 남긴 했지만 ㅋㅋㅋㅋ 아무튼 이번에는 SRT 고속열차를 타기로 했다. 2시간 반이면 도착하니 부산에서 아침을 먹을 수 있다. 다음 날 밤 지하철 끊기기 전에 돌아오는 것으로 왕복 차편을 예매했다.


그 다음은 영화 선택이다. 영화제 공식 홈페이지에서 해당 날짜에 상영되는 영화들을 하나하나 클릭해 시놉시스와 스틸컷 분위기를 보고 끌리는 것들을 메모했다. 참... 놀 궁리는 열심이다. 이중에 몇 편이나 예매에 성공할까. 피켓팅의 그날이 기다려진다. (메모한 작품들: 빌어먹을 휘게, 두 사람을 위한 식탁, 페어리테일, 사랑의 불꽃, 스토리텔러, 배달의 기사, 만찬, 유니버스, 화이트 노이즈, 지옥만세, 씨 유 프라이데이 로빈슨6명의 등장인물슬픔의 삼각형, 오픈 더 도어, 레이먼드&레이,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어쩌구ㅋ,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엄마의 땅사갈)


그 다음으로는 '가서 뭐하고 놀까' 공상을 시작해 아직도 끝나지 않은 상태다. 부산에 도착한 시간부터 떠나는 시간까지 약 35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잘 놀았다고 소문이 날까? 영화는 서너 편 정도만 보고 나머지 시간은 여유를 즐기고 싶다. 맛난 것도 먹고 야외공연도 보고 카페에서 일기도 쓰고 해운대 바닷가 산책도 하고 데일리 영화잡지도 보고 방에서 뒹굴뒹굴해야지...라고 써놓고 보니 장소만 바뀌었을 뿐 내 평소 주말 스케줄이랑 거의 똑같잖아?ㅋㅋㅋㅋㅋㅋ 와... 사람의 행동 패턴이 이렇게까지 안 바뀐다.


평소와 똑같은 일을 하더라도 여행지에서는 일분일초가 소중하게 느껴질 것 같아 신기했다. 인생도 여행 온 것처럼 하루하루를 특별하게 살 수는 없을까? 오랜만에 설레는 며칠을 보내고 나니 '여행준비는 그 자체로 목적일 수 있는 행위'라는 말이 새삼 절실히 공감된다. 결국 이 여행을 못 가게 되더라도, 여행을 계획하는 시간 자체가 즐거웠다. 내가 좋아하는 일로만 하루를 채워볼 생각을 하니 신이 났고, 칙칙한 일상을 벗어나는 상상만으로도 머릿속의 묵은 공기가 환기되는 느낌이었다. 이러다 진짜로 못 가게 되면 그땐 꽤나 울적할지도 모르지만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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