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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제 Jan 29. 2023

병과 함께 살기

건선 치료기

두 달에 한 번, 대학병원을 간다. 큰 병원은 저녁이나 주말에 외래진료를 하지 않으니, 평일에 회사 외출을 쓰고 다녀와야 한다. 의사쌤은 배우 정진영의 젊은 시절 모습 같다고 늘 생각하는데, 남들이 보면 전혀 공감 못할지도 모른다. 피곤하고 시니컬한 인상이어서 처음엔 좀 대하기 어려웠지만 정기적으로 보다보니 익숙해졌다.


정진영 쌤이 아직 조금 남아 있는 환부를 보고 주사약을 바꿔보면 어떻겠냐고 한다. 대신 한 달에 한 번 주사를 맞아야 한단다. 또는 두어 달에 한 번씩 주사약을 처방받아 내 손으로 주사를 놓는 방법도 있단다. 주사 맞을 때 바늘도 못 쳐다보는 내가 직접 내 팔뚝에 바늘을 찌르다니, 말도 안 된다. 한 달에 한 번 병원 외출도 부담스럽다. 무엇보다, 지금도 예전에 비하면 획기적으로 나아진 상태다. 그냥 이 약으로 유지하기로 한다.


내가 가진 온갖 질병 가운데 허리디스크와 쌍벽을 이루는 골치아픈(또는 아팠던) 녀석이 바로 건선이다. 아토피 같은 자가면역질환 중 하나로, 피부가 쓸데없이 지나친 면역력을 발휘해 생기며, 피부가 빨갛게 두꺼워지면서 하얀 각질이 쌓인다. 남들에게 설명할 일이 있을 땐 ‘옮지는 않아요’라고 재빨리 덧붙인다. 피부병은 전염된다는 인식이 퍼져 있으니까.


10년 전쯤 처음 병에 걸렸을 때, 점점 심해질 때 마음고생이 컸다. 인터넷에 ‘건선’으로 검색해보면 ‘저래서 어떻게 사나’ 싶은 무시무시한 사진들이 주루룩 뜬다. 병원 광고를 위해 환부를 최대한 심각하게 클로즈업한 사진이 많은데, 저게 남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니 무섭고 억울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저마다의 이유로 경험했을 ‘왜 하필 나에게 이런 불행이’였다.


그런데 막상 진짜로 심해지고 보니 그 환부들 바깥에도 인생이 있긴 있었다. 말 못할 고충이 많았지만 어쨌든 죽을병은 아니었고, 살아 움직이는 데는 지장이 없었으니까(아, 디스크까지 터졌을 땐 살아 움직이는 데도 지장이 있었다. 젠장). 글을 쓸 때, 상상을 할 때, 책을 읽을 때, TV를 볼 때, 사람들을 만날 때까지 하루 24시간 내내 피부 생각이 나는 건 아니었다. 요컨대, 인간은 역시 적응의 동물이었달까?


이 병이 왠지 내 성격을 닮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자가면역질환이란 ‘세균, 바이러스, 이물질 등 외부 침입자로부터 내 몸을 지켜주어야 할 면역세포가 자신의 몸을 공격하는 병’이라고 한다(서울아산병원 질환백과 참조). 그중에서도 건선을 일으키는 면역세포는 피부에 너무 많은 각질을 너무 빨리 만들어내는 활동을 한다. 다시 말해, 딱히 위협적인 침입자도 없는데 괜히 혼자 겹겹이 철갑을 두르고 있는 것이다. 의미심장하지 않은가?


많은 난치질환 환자들이 그렇듯 나도 치료를 위해 별짓을 다 해봤다. 각종 연고, 각종 영양제, 광선치료, 한의원 등등. 8체질 한의원에서 돼지고기, 닭고기, 향신료, 뿌리채소 등등등을 피하라기에 식단조절도 해봤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사실 지금도 생활습관을 완전히 바꾸면 건강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내 의지력으로는 어렵겠지. 언젠가 한 번쯤은 장기 템플스테이를 가서 한두 달쯤 절밥만 먹으며 살아보고 싶긴 하다. 다시 말해, 절에라도 들어가지 않는 이상 내 생활습관을 바꾸기는 어려울 거라는 얘기다. 아무튼,


그 와중에도 의학은 발전하고 있었다. 6~7년을 고생한 끝에 생물학적 제제 치료를 시작해 드라마틱한 효과를 봤다. 한 방에 150만 원이 넘는 비싼 주사지만, 중증 건선으로 인정되어 산정특례를 받으면 90%를 깎아준다. 국가에서 관리하는 중증난치질환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병에 걸리기 전까지는 산정특례라는 게 있는 줄도 몰랐다. 지금은 ‘산정특례 질환 00개 추가’ 같은 기사가 예사로 보이지 않는다. 해당되는 환자들이 저 소식을 얼마나 기다렸을지 생각해본다.


중학생 때던가? 학교에서 단체로 수련회를 간 적이 있었다. 텐트를 청소하고 짐을 나르고 할 일이 많은데 그날따라 머리가 아파서 일하기가 어려웠다. 국딩 때부터 두통이 잦아 타이레놀을 달고 살았던 나다. 같은 조 아이한테 아프다고 했더니 “여기 안 아픈 사람이 어딨어?” 한다. 깜짝 놀랐다. 나만 아픈 게 아니었어? 여기 있는 애들 다 아픈 거였어? 아픈데도 참고 일하고 있는 거였어? 인생이란 이런 거였어?


세상에 완벽하게 건강한 사람이 얼마나 될까? 길거리의 인파를 보면서도 저 사람들 대부분 어딘가 아픈 채로 사는 거겠지 싶어진다. 아픈 데는 있지만 지금 이 순간은 거리를 걸으며 자기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 거겠지. 녹슬면 닦아내고 금가면 땜질하고, 삐걱대는 몸을 고쳐 가면서 그럭저럭 데리고 산다. 앞으로도 또 어떤 문제들이 속출할지 알 수 없지만, 다사다난했던 이 몸과 영영 헤어지기 전까지는 최대한 잘 활용하고 즐기면서 살아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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