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드로잉 다음 과제는 '내 방 그리기'였다. 올 것이 왔구나 싶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공간이자, 오만 잡동사니로 어지러운 카오스. 욕심은 나는데 어떻게 그려야 할지 감이 안 잡혔다. 물론 이 방의 모든 사물을 다 그릴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내 방에서 제일 중요한 '책상'은 제대로 보이도록 그려보고 싶었다.
그냥 책상만 그리고 끝낼까? 이왕이면 이 공간 전체를 한 장에 담아보고 싶은데. 네 벽을 각각 그려서 4컷만화 식으로 붙일까? 별로다. 아파트 평면도처럼 위에서 수직으로 내려다본 구도로 그릴까? 그러면 모든 물건이 다 머리 꼭대기만 보여서, 그리는 재미가 없을 것 같은데.
자다 말고 새벽에 깨서도 이 고민이 머리를 떠나지 않아, 머리맡 수첩에 스케치를 해봤다. 여러 버전으로 그려보니 점차 방향이 잡히기 시작했다. 책상 주변의 자잘한 책장과 물건들이 보이도록 사다리꼴로 펼쳐 그리고, 그 주변에 책장이니 행거니 하는 다른 가구들을 배치해보기로 했다.
아침에 일어난 뒤 A5 드로잉북에 전체 구도를 다시 정리했다. 대충 감은 잡았지만 이 방을 담기에 A5는 너무 작았다. 신촌 오거리도 빌딩 사람 다 빼고 손바닥 크기로 그렸는데, 이 방의 자질구레한 물건들은 어느 하나 생략하기가 어려웠다. 아주 가느다란 펜을 쓰면 세밀하게 그려넣을 수도 있겠지만, 당장 0.2밀리 펜을 사러 나가기는 귀찮았다. 큰맘 먹고 야심차게 8절지 스케치북을 꺼냈다.
연필 선은 어차피 지울 거니까 겁없이 쓱쓱 스케치를 해봤다. 뭘 그리고 뭘 뺄지, 내 방을 새삼스레 둘러보게 됐다. 그려놓고 보니 구도가 꽤 그럴싸했다.
물에 번지지 않는 피그먼트 라이너로 선을 땄다. 만화가가 된 기분이었다. 책상이 좀 허전해 보여서 스케치북과 수첩 등등도 추가로 그려넣었다.
지우개로 박박박박 지우고 보니 이럴수가! 제법 느낌이 나잖아??? 이 지점에서 중차대한 기로에 놓였다. 색칠을 하느냐 마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색칠을 한다면 무슨 색으로 하느냐, 그것이 또 문제로다. 잘못 칠했다간 안 하느니만 못한 결과가 될 수 있었다. 디지털드로잉이 아닌 손그림이니 붓을 대는 순간 돌이킬 수 없다.
이 스케치를 여러 장 인쇄해서 여러 버전으로 칠해볼까 생각도 했지만, 그런 식으로 선택지를 늘렸다가는 끝이 안 날 것 같았다. 손그림의 묘미 중 하나가 고칠 수 없다는 점 아니었던가. 수정하고 수정하면서 완벽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 어느 정도는 그 순간의 우연에 맡기고 마음을 내려놓기로 했다. 선이 조금 엇나가도, 색깔이 좀 어색해도, 그 작은 실수들까지 추억으로 새겨질 테니까. 눈 감고 찍은 필름카메라 사진처럼.
그래도 붓을 대기 전까지 고민할 시간은 있었다. 너무 많은 색을 사용하지 않는다. 모든 부분을 색칠하지 않는다. 두 가지 주의사항을 생각하며 기본색을 조합해봤다. 가장 넓은 면적을 차지할 책상과 책꽂이 색이 특히 중요했다. 여기저기서 하나씩 사 모은 책꽂이들이라 색이 다 다른데, 칠할 때는 한 색으로 통일하기로 했다. 책상 색은 베이지로 결정. 책꽂이 색은 황토색, 밤색, 갈색, 올리브색을 가지고 몹시 고민하다가 밝은 느낌의 황토색으로 결정했다.
너무 많이 칠했나 싶은 느낌이 든 순간 마카 뚜껑을 닫았다. 깨알설명과 날짜를 쓰자 드디어 완성! 황토색 책장들이 책상을 향해 사다리꼴로 집중되는 듯한 구도가 마음에 든다. 한편, 책상에 비해 옷걸이 쪽은 굉장히 대충 그렸다는 걸 알 수 있다. 난 옷에 관심이 없기 때문에 ㅎ...
어려운 그림 한 장을 완성하니 너무 뿌듯했다. 내가 왜 이 수업을 이제야 들었을까! 진작 그림 그릴걸! 후회해 봤자 지난 세월이 돌아올 리 없다. 그림 그리기도 언젠가 부담스러운 숙제처럼 느껴지게 되지는 않을지 미리부터 걱정이 되지만 일단은 즐겨보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