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아날로그 외출이라는 모험

적당히 살고 싶어서, 오늘은 아날로그 (4)

by 이제

2023년 12월 어느 토요일,

대망의 첫 아날로그 휴일을 맞이했다.


실컷 늦잠을 자고 일어나자, 방 안은 밝고 조용했다. 하얀 도화지처럼 텅 빈 하루가 내 앞에 있었다. 동네 아이들의 외침 소리, 새 지저귀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세수를 하고 책상 앞에 앉았다. 오늘 뭘 하고 싶은지 노트에 끄적거려 보고, 원반 모양 모래시계를 보며 한참 멍 때리고, 피아노도 좀 뚱땅거리며 노닥거리다가 마침내 용기를 내 ‘외출’이라는 것에 도전해보기로 결심했다.


가방도 없이 롱패딩 주머니에 노트 한 권, 볼펜, 체크카드만 집어넣었다. 신발을 신고 문을 여는 순간, 쎄한 느낌이 밀려왔다. 외출할 때마다 습관적으로 확인하던 필수품이 주머니에 없었다. 핸드폰 없이 집밖에 나가보기는 20여 년 만에 처음이었다.


소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더글러스 애덤스, 책세상)』에서, 지구에 불시착한 외계인 포드 프리펙트는 지긋지긋한 지구를 탈출할 그날을 15년간 오매불망 기다린다. 분신처럼 가지고 다니는 장치, ‘서브-에서 센스-오-매틱’에 비행접시의 신호가 포착되면 히치하이킹으로 지구를 떠날 수 있는 것이다. 포드 프리펙트가 그 서브-어쩌고를 집에 두고 외출을 한다면 이런 기분일까?


핸드폰도 없이 나돌아다니다가 뺑소니 사고를 당해 죽기 직전인데 119도 못 부르면 어쩌지? 누군가의 도움으로 응급실에 실려가 의식을 되찾았지만 기억상실증에 걸려 내 이름도 모르는데 핸드폰도 없으면 어쩌지?


정신 차리자. 그런 우연이 무서워서 잠시도 핸드폰을 몸에서 떼지 못한다면, 영화를 보거나 시험을 치르지도 못한다. 대낮 주택가에서 뺑소니 사고를 당하거나, 사고를 당해 죽어가는데 주위에 아무도 없을 확률 또한 극히 희박할 것이다. 기억상실증에 걸린다면 가까운 경찰서에서 내 지문을 조회해 신원을 파악한 뒤 가족에게 연락해줄 것이다(아마도?).


마음을 굳게 먹고 문 밖으로 발을 내디뎠다. 공포가 아니라 스릴이라고 생각하자. 미지의 세계를 향해 용감한 첫발을 내딛는 것이다. 낯선 일에 도전하는 설렘이란 살면서 자주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무엇과도 연결되지 않은 채, 오롯이 혼자 길을 걸어보자. 할 수 있다 파이팅!


그렇게나 거창한 결심이 필요했던 첫 외출의 목적지는 겨우 도보 7분 거리의 작은도서관이었다.




모험의 첫 난관은 이어폰이 없다는 것이었다. 아무 소리도 듣지 않고 타박타박 걷기만 하는 게 너무 허전하고 어색했다. 따지고 보면 이어폰 습관이 핸드폰 습관보다 더 오래되었다. 핸드폰은 고등학생 때, ‘워크맨’은 중학생 때 처음 갖게 되었으니까. 휴대용 카세트가 CD플레이어로, MP3로, 스마트폰으로 진화하는 동안 이어폰은 늘 나와 함께였다.


왜일까? 왜 길을 걸을 땐 뭔가 들어야 할 것만 같은 느낌이 들까? 녹음된 음성을 쉴 새 없이 귓구멍에 꽂아넣어 난청을 재촉하지 않아도, 이런저런 생각을 하거나, 주변 풍경을 보거나, 머릿속으로 노래를 부르거나 할 수도 있는데 말이다. 소리의 부재가 내게 어떤 의미이기에?


묵묵히 걷기만 하는 일이 왠지 시간낭비 같았다. 이동시간이란 길바닥에 버리는 시간이니, 음악이든, 유익한 정보든, 재미있는 농담이든 뭐라도 들으면서 멀티태스킹을 해야 할 것 같았다. 심심한 시간은 낭비하는 시간이었다. 단 한 순간도 심심해선 안 되었다. 심심하지 않도록 벼라별 취미를 만들고, 틈 날 때마다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보지 못할 때는 듣기라도 하면서 모든 시간을 재미나 유익으로 채우려 했다.


20여 년 만에 혼자 이어폰 없이 길을 걷자니 속절없이 심심했다. 금단증상이 오는 것 같았다. 주변의 가로수와 건물들, 도로와 차들은 내 심심함을 달래주기에는 너무 재미가 없었다. 이런 게 바로 도파민 중독일까?


두 번째 난관은 검색 충동이었다. 걸어서 10분도 안 걸리는 곳인데, 오래전이지만 가본 적도 있고 가는 길도 대충 기억나는데, 늘 그랬듯 지도 앱을 열어 최단거리 경로를 검색해보고 싶었다. 최단거리라고 해봐야 1~2분 차이일 테고, 지도를 봐도 방향을 헷갈려 핸드폰을 손에 쥔 채 뱅뱅 도느라 시간을 허비하기 일쑤인데 말이다.


그러고 보니 도서관 운영일시도 궁금했다. 큰맘 먹고 갔는데 휴관일이면 어쩌지? 불안감이 밀려왔다. 평소라면 곧장 포털사이트에 들어가 검색했을 것이다. 약 4분 후면(지금까지 3분쯤 걸어왔으므로) 문이 열렸는지 닫혔는지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는데 말이다. 혹시 닫혔더라도 운동한 셈치고 근처 슈퍼마켓이라도 구경하다 오면 될 일 아닌가? 하루 종일 이렇게 시간이 많은데 뭐가 급해서 4분을 못 기다릴까?


그동안 내가 얼마나 검색에 의존하고 있었는지, 버튼만 누르면 즉시 답이 튀어나오는 속도에 길들여져 있었는지 실감이 났다. 심심함을 참지 못하듯 궁금함도 참지 못했다. 문제를 보자마자 답안지를 확인해야 직성이 풀리는 삶을 살고 있었다. 그렇게 얻은 인스턴트 해답 중에서 머리에 남은 게 얼마나 될까? 그 조급함이 지금까지 내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이런 생각을 하며 검색 충동을 참아내자, 지도가 아닌 주변의 지형지물을 둘러보며 길을 찾는 감각이 되살아났다. 탐험하는 기분이었다. 지도와 길을 번갈아 비교할 필요 없이 내 갈 길에만 집중하면 됐다. 나무들이 앙상한 겨울 거리와, 부쩍 낮아진 해, 골목이며 건물, 행인들이 눈에 들어왔다.


최단거리 경로는 아닐 수도 있지만 곧 도서관에 도착했다. 다행히 휴관일도 아니었다. 『아날로그의 반격(데이비드 색스, 어크로스)』이라는 책이 흥미로웠다. 아날로그 시대를 경험하지 않은 젊은 세대도 의식적으로 아날로그식 물건이나 아이디어를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아날로그는 물리적 사물과 경험이 사라져가는 현대에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물건을 만들고 소유하는 기쁨을 준다. 디지털 영역은 ‘속도, 완벽함’과, 아날로그 영역은 ‘정서’와 관련이 많다.


오늘 같은 아날로그 휴가가 흘러간 과거를 애써 붙잡으려는 미련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아날로그에도 엄연한 가치와 매력이 있는 것이었다. 아무리 기술이 발전해도 아날로그에 대한 욕구와 수요는 남아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안심이 됐다. 종이책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지는 않으니까.


이즈음 세 번째 난관을 마주쳤다. 타이핑 충동이었다. 중요한 구절, 떠오르는 생각을 노트에 손글씨로 메모하자니 느리고 팔이 아픈 데다 글씨도 엉망진창이었다. 키보드로 와다다다다다다닥 치면 금방일 텐데 답답했다. 익숙한 한글 프로그램으로 컨트롤C+컨트롤V를 비롯한 각종 단축키를 활용하며 글 한 편을 뚝딱 완성해버리고 싶었다. 막상 글을 쓰겠다고 컴퓨터 앞에 앉으면 어느새 딴길로 새서 더 많은 시간을 낭비하기 일쑤였으면서.


손글씨로 장편소설을, 심지어 대하소설을 써낸 옛 작가들이 새삼 대단하게 느껴졌다. 아니, 거기까지 갈 것도 없이, 나도 학창시절에는 손글씨로 독후감 숙제를 하지 않았던가? 20대 때에는 『토지』를 2부 1권까지 필사하지 않았던가? 그 시절을 떠올리며 답답함을 꾹 참고 손글씨로 쓰다 보니, 타자연습하듯 기계적으로 타이핑하는 것보다 중요한 부분만 요약해가며 천천히 쓰는 쪽이 더 머리에 잘 들어오는 것 같기도 했다.




집에 돌아가는 길, 거리를 둘러보니 핸드폰을 보며 길 가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어제까지 그랬던 것처럼.


그러고 보면 핸드폰이 늘 한 뼘쯤 앞장서서 나를 이끌었다. 주머니 속 핸드폰은 언제든 붙잡을 수 있는 손잡이고 길잡이였다. 에스컬레이터의 까만 컨베이어 손잡이처럼, 미지의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꼭 잡아야 할 안전장치였다. 핸드폰은 내가 현실이라는 오르막길에서 혼자 굴러 떨어지지 않도록 안전과 연결을 책임지고, 길을 알려주고, 뭘 묻든 바로바로 대답해주고, 심심하지 않도록 끊임없이 재잘댔다. 그 에스컬레이터가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해도, 원치 않거나 옳지 못한 방향으로 가고 있대도, 손잡이를 놓고 홀로 서기는 쉽지 않았다.


다음 글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지속 가능한 휴식을 위해, 아날로그 공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