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당히 살고 싶어서, 오늘은 아날로그 (5)
집에 돌아와 마주한 ‘폰 없이 점심 먹기’ 난관은 최종보스와도 같았다. 어느새 뽀로로 영상 없이는 밥을 못 먹는 아이가 된 걸까? 영상도 소리도 없이, 묵묵히 밥만 먹으면 너무 심심할 것 같았다.
나는 야근할 때도 회사에서 저녁을 먹지 않았다. 점심저녁을 다 회사에서 먹으면 하루종일 나만의 시간이 전혀 없었던 것 같아 우울했기 때문이다. 밤 8시 9시까지도 쉬지 않고 일해서 최대한 빨리 집에 갔다. 집에서 혼자 드라마나 예능, 유튜브 영상을 보며 양념치킨이나 마라찜닭을 먹는 것이 유일한 낙이자, 하루 중 처음으로 긴장을 풀고 마음 편히 즐기는 시간이었다. 그 시간을 조금이라도 늘리기 위해 최대한 더 천천히, 많이 먹었다. 충분히 재미있는 프로그램을 찾지 못하면 짜증이 나고 시간이 아까웠다.
어느새 내게 ‘맛난 거 먹으며 재밌는 영상 보기’는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중요한 일과가 되어 있었다. 일이 너무 많아 어쩔 수 없이 회사에서 저녁을 먹고 자정이 다 되어 퇴근하는 날에도, 편의점에서 과자 한 봉지라도 사 와서 ‘맛난 거-영상 시간’을 가져야만 했다. 그 결과 체중이 급격히 늘고 활명수를 음료수처럼 달고 살았으며 고혈압과 대사증후군 진단을 받았다. 주말에도 누워서 영상만 보다가 매 끼니 배달음식을 먹었다. 글쓰기, 그림, 독서, 산책 등의 다른 취미는 뒷전이 되었다. 이건 아니다 싶어 핸드폰 사용시간을 제한하고 채소를 먹고 새 그림도구를 사는 등 여러 시도를 했지만 오래가진 못했다.
알코올 중독에 빠졌던 주부가 1년간 술을 끊은 경험을 솔직하고도 유머러스하게 기록한 책 『금주 다이어리』(클레어 풀리, 복복서가) 앞부분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와인을 끊어도 삶이 있을까?’
무언가에 중독된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절절히 공감할 한마디가 아닐까? 와인 없는 삶은 상상조차 할 수 없고 상상하기도 싫은 것이다. TV를 보며 와인을 마시고, 친구와 가족과 와인을 마시고,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와인을 마셨던 지난 기억들을 떠올리며, 와인 없이는 기쁨과 슬픔과 즐거움과 인간관계를 충분히 누리지도 못하고, 마음을 달래고 충족감을 느끼지도 못할 거라고 믿는 것이다. 그래서 나 또한 궁금했다.
‘맛난 거-영상 시간’이 없어도 삶이 있을까?
참고로, 『금주 다이어리』에서는 물론 와인을 끊어도 삶이 있었다. 술을 끊은 것만으로도 몸과 마음이 더 건강해졌으며, 가족관계가 좋아졌고, 일상생활이 행복해졌고, 고난을 이겨낼 힘이 생겼다. 이 책을 읽다보면 나도 뭐라도 끊고 싶어진다. 이거 하나만 딱 끊으면 인생이 달라지는 무언가가 내게는 없을까 생각하게 된다.
맵고 짜고 기름진 음식을 먹으며 재미있는 영상을 보는 시간을 과연 포기할 수 있을까? 아예 포기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가끔은 그래도 되지 않을까? 어떤 연예인은 그랬다지 않는가? 고기와 밀가루를 멀리하면 오래 살 수 있지만, 그렇다면 딱히 오래 살 이유가 없다고.
모르겠다. 어쨌든 딱 하루만 실험을 해보는 거다. 내일은 다시 평소처럼 치킨을 먹으며 드라마를 볼 수 있으니까, 오늘 하루만 참아보면 된다. 그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많은 생각을 하며 후라이팬에 삼겹살과 통마늘을 구웠다. 접시에 옮겨 담고 스테이크처럼 나이프와 포크로 썰어 먹으며 책을 읽었다. 생각보다 괜찮았다. 충분히 맛있고 충분히 재밌었다. 화면과 소리 없이도 식사를 즐길 수 있었다. 자신감이 생겼다.
그 후로도 공원 벤치에서 시집을 읽고, 버스를 기다리다 심심해 그림을 그려보고, 서점에 가서 책도 사고, 저녁으로 전도 부쳐 먹으며 호젓하고 여유로운 하루를 보냈다.
핸드폰 없이 하루를 보내도 괜찮았다. 심지어 힐링이 되기까지 했다. 디지털 기기들이 보이지 않게 커튼으로 가린 아이디어도 제법 효과적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하루쯤은 커튼을 닫아놓고, 커튼 속 물건들은 아예 없는 셈치고 살아볼 수 있었다. 현대인으로서 핸드폰을 술 끊듯이 아예 끊을 수는 없지만, 종종 이렇게 아날로그적인 하루를 보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이 휴가는 지속가능할 것 같았다.
‘심심하면>핸드폰’, ‘배고프면>치킨’ 식으로 고정되어 있던 뇌의 작동 경로를 다양하게 넓혀보자. 핸드폰 말고도 내게 필요한 것, 내가 좋아하는 것, 즐길 수 있는 것이 뭔지 알아보고 새로운 길들을 뚫는 거다. 힘들 때 힐링하는 방법이 ‘핸드폰 보며 치킨 먹기’로만 고정되어 있다면 치킨 외에 다른 음식들이 있고, 필요하고, 맛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못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했다. 내가 현재 ‘꼭 필요하다’고 믿는 그 어떤 것이든, 그것 없이도 살 수 있을지 모른다고.
어쩌면 핸드폰 없이도, 고기 없이도, 직장 없이도 살 수 있을지 모른다. 평생이 아니라 단 하루 단 며칠만이라도, ‘무엇 없이 살아보기’를 시험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집착해 온 뭔가를 잠깐이라도 내 삶에서 제외해 보면, 이전에는 몰랐던 새로운 재미와 의미를 찾게 될 것이다. 그것만이 유일한 길은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생각보다 괜찮고 흥미로울 것이다. 내 뇌가 분명 어떻게든 빈자리를 채워낼 것이다.
나 자신과 가족, 나만의 공간, 생존에 꼭 필요한 것, 내게 정말 소중한 것까지 포기할 필요는 없지만, 내 믿음이나 취향이 한편으로는 내게 짐이 되거나 해를 끼치고 있다면, 한번쯤은 ‘그것 없는 하루’를 시험해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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