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당히 살고 싶어서, 오늘은 아날로그 (6)
전쟁 같은 12월을 보냈다. 한 해 업무가 대충 일단락된 연말에야 겨우 잠깐 숨을 돌렸다. 몸과 마음은 너덜너덜했다. 회사 앞 크리스마스 트리를 보며 소원을 빌었다. 제발 내년 크리스마스에는 내가 여기에 있지 않기를!
유난히 시달린 만큼 이번에는 더 오래 속세를 떠나고 싶었다. 연차를 써서 금·토요일 이틀간 모든 미디어와 네트워크를 끊고 아날로그 휴가를 보내기로 했다. 지난 경험에 힘입어 이번에는 더 꼼꼼히 준비를 했다. 이틀간의 날씨를 미리 검색하고, 작은도서관 운영일시, 가족들 전화번호, 체크카드 잔액, 사고 싶은 책의 서점 재고도 메모해 두었다. 이어폰을 빼고 스마트폰을 끄고 커튼을 닫자 세상이 고요해졌다. 방에 들어와 책을 읽다 잠이 들었다.
그로부터 여섯 시간 뒤.
회사에서 열받았던 일이 떠올라 새벽같이 잠이 깼다. 잠이 많은 나로서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다른 때 같았으면 바로 핸드폰을 집어들어 재밌는 영상으로 기분을 풀거나, 더 화나는 글을 읽으며 분노를 증폭시키려 했겠지만 이날은 그럴 수 없었다. 바로 여섯 시간 전에 야심차게 결심하지 않았던가? 이틀 동안 화면도 소리도 없이, 온전한 나만의 하루를 보내기로.
열받는 일을 하릴없이 곱씹으며 어두운 천장만 멀뚱멀뚱 올려다봤다. 가습기에서 폴폴 솟아오르는 하얀 김이 눈에 들어왔다. 변화무쌍하고 예측불가능한 형태로 피어오르는 수증기를 멍하니 보다가 문득, ‘방 안에도 구름이 생길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떠올랐다. 아주 실험적으로 통제한 환경에서라도, 실내에 구름을 만들어 비나 눈을 뿌릴 수 있을까?
검색 충동이 솟구쳤지만 이날은 검색도 할 수 없었다. 인터넷이 없던 시절에는 이런 특이한 궁금증을 어떻게 해소했을까? 내가 좀 더 끈기와 탐구심이 있는 사람이었다면, 도서관에 가서 구름이 생기는 원리를 기초부터 공부해 이런저런 실험을 해보고, 그렇게 과학을 전공하고 대학원생이 되어 나를 이 고생길로 끌어들인 그놈의 수증기를 원망하게 되었을지도.
그러나 나는 그 정도로 학구적인 사람은 아니었다. 답을 알아낼 수 없는 벽에 가로막히자 금세 생각이 딴 곳으로 흘러갔다. 방 안에서 조그만 구름을 만들 수 있다면, 그 구름을 반려동물처럼 데리고 다닐 수 있다면 어떨까? 가끔은 비나 눈도 뿌리고, 조그맣게 우르릉 천둥도 치고, 반짝 하고 하찮은 번개도 치고, 하찮아 보여도 맞으면 제법 따끔하고, 공원에 나가면 사람들이 구름을 풍선처럼 동동 띄운 채 산책을 다니고, 서로 상대방의 구름을 구경하거나 구름끼리 인사를 하기도 하고, 뭐 그런 세계가 있다면 어떨까?
재밌는 아이디어 같았다. 만화로 그리거나 작은 그림책을 만들어볼까? 이부자리 옆 수첩에 메모를 남겼다. 불과 20분 전까지 화가 나 있었는데 어느새 실실 웃는 나를 발견했다. 재밌는 콘텐츠가 없으니 내 뇌가 직접 재밌는 생각을 만들어낸 모양이었다.
12월의 바쁜 와중에 <크레센도>라는 영화를 보았다. 피아니스트 임윤찬이 우승한 반 클라이번 국제 피아노 콩쿠르의 진행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였다. 콩쿠르에 참가한 피아니스트들은 약속이나 한 듯 ‘경쟁에서 이겨 1등을 하려고 온 게 아니다’라고 말했다. 우승하고 싶은 마음도 아예 없지는 않았겠지만, 진짜 이유는 ‘내 비전을 나누기 위해서, 내가 하고 싶은 음악을 보여주고 싶어서, 내 음악의 깊이를 스스로 검증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성공과 실패에 연연하지 않는다면 선택이란 생각보다 쉬울 수도 있겠구나. ‘그 일에 도전해서 성공할 수 있을까? 실패하면 어떡하지?’라는 방향이 아니라, ‘내가 한 번뿐인 삶을 통해 표현하고 싶은 게 뭔지,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고 싶은지, 사람들과 나누고 싶은 나만의 비전이 뭔지’를 기준으로 생각한다면 오래 고민할 필요도 없는 것이었다.
물론 실패할 수도 있지만 그 실패는 마지막 순간에 경험하는 결과일 뿐이다. 실패하기 전까지는 어쨌든 내가 보여주고 싶은 것을 보여주고, 살고 싶은 방식대로 살면서, 내 인생의 한 시기를 보낸 것 아닌가? 내 연주가 결국 어떤 평가를 받든, 사는 동안 즐겁게 연주하며 음악을 나눴다면 그걸로 좋은 것 아닌가?
내가 살고 싶은 삶을 살자. 내 글을 쓰고 내 책을 만들자. 재밌는 상상과 경험을 하고, 그것들을 내 식대로 표현하면서 살자. 먹고살기 위해 돈을 벌어야 한다면, 내 삶의 대부분을 빼앗지 않는 최소한의 일을 하자.
나는 공무원 생활을 끝내기로 결심했다.
p.s. 아날로그 휴가가 끝난 뒤 검색해보니, ‘베른나우트 스밀데’라는 작가가 실내에 순간적으로 구름을 만들어 사진을 찍는 작업을 한다고 한다. 경남 남해에 와서 시연과 전시를 한 적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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