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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향인의 아날로그 힐링법

적당히 살고 싶어서, 오늘은 아날로그 (7)

by 이제


<나 혼자 산다>에 출연하는 상상을 하면 더 보람찬 하루를 보낼 수 있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내 일상을 타인의 시선으로 객관화해 보면 생활태도가 달라지리라는 뜻이 아닐까.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일 내가 아날로그 휴일을 주제로 나혼산에 나간다면? 물론 시청률이 뚝 떨어질 거다. 대사도 인물도 사건도 없는, 심심하기 짝이 없는 내용일 테니까. 방에 처박혀 일기를 쓰고 책을 읽는다. 바깥에 안 들리는 디지털피아노를 친다. 묵묵히 산책을 하고 서점 구경을 한다. 공원이나 카페에서 가만히 앉아 멍을 때린다. 어떻게든 자막으로 살리기 위해 작가들이 머리를 싸매겠지. 최소한의 방송분량을 채우기 위해 장시간의 인터뷰를 진행하겠지. 말주변 없는 나는 그조차도 버벅거리겠지.


<나 혼자 산다>에는 못 나가겠지만, 나는 저런 하루가 딱 좋다. 내가 어떤 일상을 바라는지, 온전히 자유로운 하루가 주어지면 무엇을 하게 되는지, 아날로그 휴일을 통해 알게 되었다. 그전까지 나는 디지털기기 이용 시간을 제한하는 데만 급급했는데, 더 중요한 건 ‘아날로그 시간을 즐겁게 보내는 경험’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스마트폰 그만 보고 책을 읽어야 하는데’라는 의무감이나 자책보다, ‘스마트폰 없는 하루도 생각보다 매력 있네? 조용하고 자유롭고 홀가분하네?’라는 좋은 기분을 느껴보는 게 낫다는 것을.


드라마와 유튜브가 없으면 하루가 너무 심심하고 지루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할 게 많았다. 대문자에 볼드체 I, 내향인계의 선두주자, 등대지기가 꿈인 혼자놀기의 달인으로서 하루 동안 뭘 하고 놀았는지 써볼까 한다.




먼저, 책상 앞에 앉아 일기를 썼다. 일기라고 하면 우아하게 앉아서 차를 마시며 예쁜 일기장에 단정한 글씨를 채워 나가는 모습을 연상할 수도 있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산발한 머리, 닳아빠진 후리스 차림으로 앉아서 무선노트에 날짜와 시각을 적고, 의식의 흐름을 날것 그대로 휘갈긴다. ‘12. 00. 금. 07:42. 아 오늘 너무 일찍 일어났네. 아오 졸려. 다시 자면 안 되겠지……?ㅋㅋㅋㅋㅋ 오늘은 뭐하고 놀아볼까나. 아 배고파. 점심 때 고기나 구울까?’ 이딴 식이다.


시간을 정해 규칙적으로 쓰는 것도 아니다. 노트를 항상 펼쳐두고 내킬 때마다 쓴다. 한 줄 쓰고 말 때도 있고 두어 쪽을 내리 쓸 때도 있다. 종이에다 수시로 잡담을 하는 셈이다. 남에게 절대 보여줄 수 없는, 죽기 직전 소각 1순위인 헛소리가 70%지만 이렇게라도 기록해놓으면 훗날 여기서 글감을 발굴해낼 수 있다. 일기 쓰기는 아직 ‘글쓰기’가 아니다. 재료가 될지도 모르는 것들을 채집 바구니에 중구난방으로 던져 넣는 것에 가깝다. 선별, 손질, 요리, 플레이팅은 나중 얘기다.


회사에서도 기사가 잘 써지지 않으면 기사 쓰던 한글파일에 ‘하…… 겁나 안 풀리네 어떡하지? 밥이나 먹고 올까…… 이 문장 왤케 꼬이냐. 그러니까 여기서 결국 하고 싶은 말이 뭐냐고?!’라는 식으로 타이핑하면서 풀어간다. 한번은 이 혼잣말을 그대로 남겨둔 채 디자이너에게 기사 파일을 전송했다. 이 사실을 깨닫자마자 정신이 번쩍 들며 발송을 취소하려 했지만 이미 수신확인이 되어 있었다. 너무 쪽팔려 등골이 오싹했다. 아까 그 메일은 제발 잊어주시고 수정파일로 봐달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일기를 쓰며 오늘 뭘 할지 대충 생각해본 뒤, 외출 준비를 하고 단골 브런치 카페에 갔다. 몇 년째 같은 메뉴를 먹고 같은 자리에 앉는다. 언젠가 동생에게 그 얘기를 하자 “언니 원래 뭐 하나 꽂히면 그것만 먹잖아” 하기에 빵 터지고 말았다. 과연 그렇다. 생후 8개월에 새우깡에 꽂힌 나는 지금도 새우깡을 자주 먹는다. 어렸을 적 언젠가는 “난 나중에 돈 많이 벌어서 맨날 양념치킨만 먹을 거야” 했다. 그밖에도 치토스, 치즈계란말이, 김치참치볶음밥, 돈까스, 애호박전, 옛날통닭 등등 내가 집착한 단골메뉴들을 꼽자면 열 손가락이 부족하다.


창가 자리에 앉아 책을 읽으며 멜론과 하몽을 얹은 오픈샌드위치를 천천히 썰어 먹다보니 마음이 차분해졌다. 이때 읽은 책은 독립출판물 『작업자의 사전』(구구·서해인, 유유히). 프리랜서 작업자 두 명이 ‘미팅, 생산성, 피드백’ 등 작업과 관련된 단어들을 각자의 시선으로 정의한 책이다. 나도 곧 직장을 때려치우기로(≒프리랜서가 되기로) 결심한 참이어서 흥미롭게 읽었다.


카페를 나와 서점에 갔다. 책과 잡지를 좀 사고, 근처 가판대에서 종이신문을 한 부 샀다. ‘커피 마시며 종이신문 읽기’라는 로망을 실현해보고 싶어서였다. 집에 돌아와 호기롭게 커피를 타고 신문을 펼치니, 1면부터 열받는 소식이 실려 있었다. 분노하며 2면과 3면까지 읽고, 다음 장들을 차례로 넘겼다. 과연 인터넷 뉴스로는 접하기 어려웠을 유익한 정보들이 많았다. 1,000원짜리 종이신문에 이렇게 읽을거리가 많다니! 형광펜까지 꺼내 들고 줄을 그으며 읽었다.


신문을 읽다보니 솔솔 잠이 왔다. 황금 같은 휴일 오후를 낮잠으로 보내기에는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오늘은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하기로 했으므로 그냥 잤다. 오랜만에 낮잠다운 낮잠이었다. 핸드폰을 보다가 툭 떨어뜨리고 잠드는 것과, 오후의 햇살이 들어오는 방에서 이불을 덮고 아련하게 들려오는 집밖의 소음을 듣다가 까무룩 잠드는 건 달랐다.


그러나 역시 낮잠이 밤잠으로 이어지는 건 안 될 일이다. 한 시간 남짓 자고 기지개를 켜며 일어나, 근처 공원으로 산책을 나갔다. 의외로 겨울은 산책하기 편한 계절이었다. 거지꼴로 집에서 뒹굴다가도 대충 롱패딩만 뒤집어쓰고 나가면 되니까(어쩌면 롱패딩으로 가려도 거지꼴인데 나만 모르는 걸까? 그러거나 말거나). 롱패딩은 주머니가 커서 가방도 필요 없다.


겨울 오후의 공기는 차갑고 쾌적했다. 아날로그 휴일 첫날에 금단증상이 일어났던 ‘이어폰 없이 걷기’는 그럭저럭 적응해 가는 중이었다. 벤치에 앉아 햇볕을 쬐고 있자니 왠지 요양하는 기분이었다. 마른잔디와 하늘을 보며 한동안 넋 놓고 멍을 때렸다. 웬만큼 머리를 비우고 롱패딩 주머니에서 시집을 꺼냈다. 주머니에 시집을 넣고 다니는 사람이라니, 70년대 문학청년이 된 기분이었다.


고교 졸업 이후 시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왔지만 몇 년 전부터 가끔 시집을 사 보기 시작했다. 시를 시인의 의도대로 다 이해하지 못해도 괜찮다는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이다. 남의 생각과 감정을 완벽히 이해하는 것 자체가 어차피 불가능한데, 하물며 시는 어떻겠는가? 가끔 한두 문장만 마음에 와 닿아도 충분하다. 시인의 의도를 오해하거나, 엉뚱한 연상으로 상상의 나래를 펼쳐도 괜찮다. 시험 볼 것도 아니고 나 혼자 읽는 건데 뭐 어떤가? 무엇보다 시집에는 내가 전혀 상상조차 못했던 문장과 이미지가 많아 낯선 세계를 여행하는 느낌이 드는 게 좋다.


노란 표지가 예쁜 『모래비가 내리는 모래 서점』(문보영, 문학동네)은 재미있는 시집이었다. ‘사고실험하며 지내요’라는 머리말처럼 다채로운 상상들이 펼쳐졌다. 시에 이야기가 많아서 좋았고, 가끔 등장하는 졸라맨 같은 그림들도 귀여웠다.


그밖에도 틈틈이 그림을 그리고, 피아노를 뚱땅거리고, 냉동실에 있던 족발을 데워 먹으며 추리소설을 읽는 등 여유로운 하루를 보냈다. 새벽부터 나를 깨웠던 ‘회사에서 열받았던 일’이 가끔 떠올랐지만, 하루 종일 기분이 좋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가끔 기분이 나쁘다고 해서 그날 하루가 다 망쳐지는 건 아니니까. 밝은 그림에도 어두운 색깔이 섞여 있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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