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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 you wanna build a egloo?

적당히 살고 싶어서, 오늘은 아날로그 (8)

by 이제

폭설이 내리는 공원 풍경은 보기만 해도 흐뭇했다. 여기저기서 꺅꺅 소리가 들려오고, 아이들이 눈에 푹푹 빠지며 뛰어다니고, 언덕에서는 썰매들이 죽죽 내려오고, 눈싸움 눈덩이가 날아다니고, 눈사람 눈덩이가 굴러다녔다. 자판기에서 뽑은 대추생강차를 마시며 벤치에 앉아 한참이나 눈 구경을 했다. 패딩 위로 눈이 쌓여 나 또한 눈사람이 되어갔지만, 일어설 마음은 들지 않았다. 역시 나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이날의 외출에는 큰 용기가 필요했다. 눈길을 무서워하기 때문이다. 겨울에 빙판길을 걷다 엉덩방아를 찧은 일이 부지기수며, 스케이트니 스키니 하는 빙상스포츠는 다른 세상의 얘기다. 20년 전 어쩌다가 스키장에 갔는데, 5분짜리 초보자 코스를 두 시간 동안 내려왔다. 넘어지는 거야 초보니까 당연한데, 더 큰 문제는 넘어졌다 일어나지를 못 하는 거였다. 기다란 스키를 신고 있으니 일어설 자세를 잡을 수가 없었다. 한참을 좌로 구르고 우로 구르다 겨우 일어서면 또 넘어지고, 또 한참을 버둥거리다 일어서서 또 넘어지고…… 그것이 스키와의 처음이자 마지막 인연이었다.


스키처럼 미끄러지는 것뿐만 아니라 롤러스케이트나 자전거처럼 바퀴로 굴러가는 것들 또한 내 인생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운전면허도 없다. 요컨대, 내가 운용할 수 있는 이동수단은 오직 내 다리뿐이다. 허리디스크가 터진 30대 이후로는 걸어다닐 때도 ‘한번 넘어지면 끝장이다’라는 각오로 최대한 조심하고 있다. 이날도 꽤 고민하다가, 눈이 막 쌓여 푹신할 때가 그나마 덜 미끄럽다는 생각에 겨우 마음을 먹고 집을 나선 것이었다.


보기 드문 설경을 감상하다 보니, 한동네에 사는 막내를 불러내서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불러낼 핸드폰이 없었다. 공중전화를 찾아 헤맸지만 보이지 않았다. 그냥 무작정 가서 문을 두드려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옛날에는 다들 친구네 집 앞에서 ‘누구야~ 놀~자~’ 하고 불러내지 않았던가? 혹시 집에 없어도 그냥 혼자 놀면 된다. 밑져야 본전이다.


공원을 나와 조심조심 걸어가서 동생 집 현관문을 두드렸다. 텔레비전 소리가 나는데 인기척이 없었다. 이웃집에 들릴세라 소심하게 문을 두드리고 벨을 누르고 “야, 야……!” 하고 불러댔다. 한참만에야 걸쇠가 걸린 채로 문이 빼꼼 열렸다. 빼꼼 나타난 눈이 잠시 후 커다래졌다.


“아니, 누나야? 난 이상한 사람인 줄 알았네.”

“야, 눈 보러 갈래? 귀찮으면 말고.”

“어? 그, 그래……”

“그럼 준비하고 20분 뒤에 밖에서 봐.”


용건만 전한 뒤 곧장 내 집으로 돌아와 젖은 양말을 갈아신었다. 그리고 잠시 망설이다가 부엌 찬장에서 직사각 반찬통 하나를 꺼내 롱패딩 주머니에 넣고 집을 나섰다.


눈을 보자며 문을 두드리다니 <겨울왕국>에서 엘사의 방문을 두드리며 ‘Do you wanna build a snowman’을 부르던 안나 같다고 생각했는데, 막내는 <기생충>의 한 장면 같았단다. 마스크 쓴 얼굴에 시커먼 패딩후드를 뒤집어쓰고 눈 녹은 물을 뚝뚝 흘리는 몰골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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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내는 나보다 여덟 살 어리다. 네 살쯤 되어 한창 아장아장 걸어다닐 무렵, 한번은 집에서 사라진 적이 있었다. 국민학생이던 나는 ‘어딘가 있겄지’ 하고 안방 침대에 엎드려 책을 읽고 있었는데, 엄마가 들어와 “너는 동생이 없어졌는데 책을 읽고 있냐?” 하고 혼을 냈다.


그제야 몸을 일으켜 찾아나섰다. 어디로 갔을까 생각하다 근처 모델하우스 앞 놀이터가 떠올랐다. 이상할 만큼 느긋하게 그쪽으로 슬슬 걸어갔더니, 정말로 저 앞에 혼자 가는 꼬맹이가 보이는 게 아닌가? 겁도 없이 아스팔트 길 위를 총총 걸어가던 작은 뒤통수가 지금도 기억이 난다. 핸드폰은커녕 삐삐도 없던 시절이었다. 아직도 엄마는 찾고 있을 텐데, 연락도 못 한 채 동생을 데리고 집으로 걸어갔다.


그랬던 시절도 있었는데 지금 동생은 내가 한참 올려다봐야 하는 장정이 되었다. 동생과 함께 다시 도착한 공원에는 그새 눈사람이 우후죽순으로 솟아 있었다. 초입부터 커다란 눈사람이 웃는 표정으로 사람들을 맞이했고, 여기저기 2단 눈사람 3단 눈사람이 즐비했다. 언덕 꼭대기에 올라서자 벤치 위에 눈사람 네 가족이 마트료시카처럼 나란히 서 있었다. 그걸 본 막내는 잠시 망설이더니 “나 라이언 만들어 볼래. 누나는 펭수 만들어.” 했다(나는 펭수 팬이다).


“그래? 좋았어! 그렇다면……!”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비장의 무기 반찬통을 주머니에서 꺼냈다.


“이렇게 철저하게 준비해온 거야?!”

“이글루 만드는 게 40평생의 로망이었다고.”


펭수보다 훨씬 전부터 좋아한 펭귄이 있었다. 뽀로로냐고? 아니, 바로 클레이 애니메이션의 고전, 핑구다. 몰랑몰랑 동글동글한 핑구가 펭귄어를 재잘대고 날개를 휘저으며 장난치는 모습이 어찌나 귀엽던지! 제일 좋아한 장면은 이글루를 짓는 부분이었다. 하얀 얼음을 날개로 툭툭 잘라 착착 쌓으면 둥근 집이 뚝딱 완성됐다. 너무 재밌어 보였다. 나도 해보고 싶었다.


그러나 이후 30년간 이글루를 만들어볼 기회는 의외로 잘 오지 않았고, 이날이 바로 평생을 기다려온 대망의 그날이 된 것이었다. 나와 동생은 각자 자기 작품(?)을 만들기 시작했다.


반찬통에 눈을 담아 꼭꼭 다진 뒤 거꾸로 들고 톡톡 치자 하얀 벽돌이 쏙 빠져나왔다. 벌써부터 재밌었다. 큰 규모에 도전할 용기는 없었으므로 일단 여섯 개 정도를 원형으로 늘어놨다. 그 다음은 2층, 그 다음은…… 3…… 음? 아니, 이게 맞아? 왠지 나의 이글루는 이글루라기보다는 하얀 두부 무더기가 되어가고 있었다. 반면에 동생의 라이언은 누가 봐도 라이언인 라이언 그 자체였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대문자에 볼드체 I로서 너무 부끄러워 어쩔 줄 몰랐다.

“어머 너무 예쁘다. 핑구가 튀어나올 것 같네.”

“우리나라 사람들 작품 잘 만들어.”

“사진 좀 찍어도 돼요?”


아아, 우리네 이웃은 따뜻했다. 심지어 어떤 분은 푸우 인형을 이글루 입구에 놓고 연출컷까지 찍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언덕 꼭대기에 뜻밖의 포토존을 만든 뒤 수줍게 자리를 떴다. 나는 핸드폰이 없었으므로 기념사진은 동생 보고 찍으라고 했다.


“야, 이글루 만들기 생각보다 어렵더라.”

“그럼 우리 본격적으로 더 크게 만들어볼까?”

“앗, 진짜?”

“누나가 벽돌 만들어. 내가 쌓을게.”

“좋지!”


동생이 적당한 자리를 잡았고, 나는 열심히 눈 벽돌을 찍어내기 시작했다. 단순노동에 몰입하니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아예 눈밭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신나게 벽돌을 만들었다. 문득문득 돌아볼 때마다 진짜 그럴싸한 이글루가 조금씩 완성되어 가고 있었다. 지름은 70~80센티미터 정도일까?


“여기 좀 받치고 있어봐.”


그 소리에 돌아보니 동생이 이글루 입구의 아치를 만들고 있었다. 잊고 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맞다, 이글루 입구가 저렇게 생겼었지? 내가 아치 양쪽을 붙잡고 있는 동안 동생이 쐐기 모양의 눈덩이를 꼭대기에 꽂았다.


“이게 키스톤.”

“뭐라고?!”

갑자기 튀어나온 전문용어에 깜짝 놀라 소리쳤다.

“아치 맨 위에 끼우는 돌을 키스톤이라 그래.”

“와 대박! 이글루 만드는 데도 지식이 필요했구나!”


키스톤을 끼워 입구를 완성한 뒤, 이글루 맨 꼭대기에 네모난 벽돌이 아니라 둥글넓적한 눈덩이를 올린 동생. 그래, 저거구나. 저렇게 해야 하는 거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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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완성된 이글루 앞에서 손뼉을 치고 기념셀카를 찍었다. 막내는 엠제트세대답게 이글루 입구에 아이폰을 집어넣어 인스타 감성의 내부 사진을 촬영하는 신기술을 선보였다. 벽돌 틈 사이로 햇빛이 새어 들어오는 모습이 신비로웠다.


“완전 신나는 하루였어!”

“오늘은 진짜 잠이 잘 올 거 같아.”


눈밭에서 실컷 뛰어놀고 밥 먹으러 집에 가는 강아지처럼, 폴짝대는 기분으로 집에 돌아왔다. 빙판길의 무서움 따위는 어느새 까맣게 잊은 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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