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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지현 Nov 08. 2021

순도 100%에 가까운 욕망

바스락거리는 크고 하얀 침대 위에 앉아, 내 인생 최고의 미련한 순간은 언제였는지 생각한다. 조용한 방안은 남편과 유은이의 크고 작은 숨소리로 가득 차 있다. 이곳은 하루 투숙에 30만 원이나 하는 호텔 111121호. 굳이 이곳까지 와서 수영장 한번 이용 못한 채, 밤에 노트를 펴고 앉아 글을 쓰는 내가 이 호텔에서 가장 미련한 투숙객인 것 같다. 호텔에 온 이유도 미련하다. 신용카드 프로모션 중 하나인 호텔 숙박권을 코로나 때문에 1년 내내 쓰지도 못하고 있다가, 다음 연회비를 낼 때가 다 되어서야 등 떠밀리듯 잠만 자러 온 것이다. 황금색으로 번쩍이는 호텔 로비에서 명품 옷을 입고 활보하는 사람들 가운데, 유은이 손을 붙잡고 에코백을 메고 서 있는 나는 완전한 이방인 같았다.


창문 너머 반짝이는 불빛들 사이로 인천국제공항의 플랫폼이 깜빡거린다. 타지 못할 비행기들이 이착륙하는 공항 플랫폼을 보며, 혼자서 머나먼 이국 공항에 도착하던 일들을 생각한다. 어렸을 땐 미련한 일들을 잘도 해냈었던 것 같다. 미련한 행동만 찾아서 하는 것처럼 느껴질만큼.


대학생 때다. 방학 때 떠날 배낭여행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학교에 다니면서 주말도 없이 여러 알바를 닥치는 대로 했었다. 그중에는 찜질방에서 양말을 파는 일도 있었다. 고생스럽게 돈을 모았지만, 무리한 탓에 몸이 상해서 한약을 두 번이나 지어먹어야 했다. 미련스럽기 그지없었다. 배낭여행은 결국 휴학하고 갈 수 있었다.


더 옛날로 가보자. 아무래도 인생에서 미련한 행동을 가장 많이 한 때는 초등학생 때다. 어린이 시절이란, 참 쓸데없는 일을 많이 하는 시기인 것 같다. 시간은 남아돌고 심심하니 뭔가 그럴듯한 일이 벌어지기만 기다리고 있어서 인가. 어린 마음에도 미련했다고 생각되는 일들은 대개 비 오는 날 길을 헤매고 다닌 일들이다. 그 시절 기억 때문인지, 비 오는 날 우산이 없어서 비 맞는 것을 여전히 싫어한다.


초등학교 4학년 소풍날이었다. 왜인지, 아침에 엄마에게 간식을 사다 주겠다고 약속을 하고 나왔다. 소풍은 동네의 작은 산으로 갔다. 오후 2시쯤 소풍지에서 하교했는데, 걷다 보니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잃어버렸다. 하필 비가 내렸고, 우산은 없었다. 주머니에 있는 동전이면 버스를 타고 금세 집에 돌아갈 수 있을 거리였다. 아니 길을 잃었으니, 공중전화로 데리러 오라고 전화라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미련한 초등학생은 동전으로 밭두렁을 사고는 버스도 타지 않고 울면서 집으로 걸어갔다. 길을 헤매느라 비를 쫄딱 맞았는데, 그 와중에 밭두렁을 손에서 놓칠까 봐 걱정하면서 걸어왔던 기억이 난다. 초등학생의 마음엔 도대체 무엇이 있었던 걸까. 엄마에게 간식을 사다 주겠다는 약속을 지키려는 마음이 그토록 강할 수 있었다는 게, 지금의 나는 이해할 수가 없다. 미련스럽게 빗속에서 길을 헤매는 동안 축축하고 무겁게 젖은 몸과 마음이 앞으로 몇십 년을 지배할 거라는 생각은 하지도 못한 채.


그나마 미련한 행동이 나이가 들면서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10대 때보다 20대에 줄었고, 30대가 되면서는 거의 하지 않으려고 하고 있다. 비효율적인, 수익성의 보장 대비 투자 비용이 높은 일에는 함부로 발을 들여놓지 않는 것이 지혜이자, 연륜인 것으로 지금의 몸과 마음이 결정한 것이다. 그러다가 한 번씩 미련한 행동을 찾아서 할 때가 있는데, 그럴 때면 의외로 삶을 제대로 살아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온몸에서 느껴진다.


예를 들면, 여행이다. 검증된 맛집과 핫플레이스로 잘 짜여진 계획에 맞춰 여행을 다녀오면, 어쩐지 허탈한 기분이 들곤 한다. 그럴 때면 엉성하게 대충의 루트를 짜는 여행을 하는 거다. 그날의 기분에 맞춰 얼마든지 바뀌기도 하는 유연한 여행. 모르는 길을 정처 없이 걷다가 다리도 아프고 땀도 나고 그만 앉아 쉬고 싶을 때, 우연히 들어간 한 카페가 그날 여행의 인상이 되기도 하는 여행. 그런 미련한 여행을 하고 나면 계획대로 잘 다녀온 여행보다 몸에 감각으로 기억이 남곤 한다.


글쓰기도 비슷하다. 아무런 물질적 보상이 주어지지 않는, 밑도 끝도 없이 정처 없는 글쓰기를 계속하는 이유 역시 마찬가지. 굳이 비싼 호텔 방을 빌린 늦은 밤에 노트에 글을 쓰는 지금의 미련함도 오늘의 인상으로 몸에 기억될 것이다. 글을 쓰다 보면, 지금의 이 미련한 행동이 실은 내 인생에서 가장 값진 행동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까지 들게 된다. 아마도 미련은, 정말 순도 100%에 가까운 욕망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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