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으로 걷기여행을 다니는 나는 원정 걷기를 갔을 때 늘 잠자는 시간은 짧고 깨어있는 시간은 길게 보낸다는 것을 느낀다. 깨어 있는 시간에 걸으며 새로운 곳에 가고 보는 것이 많다 보니 하루도 며칠처럼 느끼곤 한다. 물론 잠자는 시간도 오롯이 충전하는 시간일 뿐 죽어 있는 시간은 아니지만.
이것은 우리의 삶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누가 인생의 시간을 길게 쓰느냐의 아주 중요한 문제이다. 나이 들 수록 시간의 소중함을 느끼지만 동시에 시간이 더 덧없이 흘러가는 것도 느낀다면 그 이유에 대해 반드시 생각해야 할 대목이다.
인간에겐 모두에게 동일한 시간이 주어져 있다. 그런데 어떤 땐 수많은 이야깃거리가 생기는 알차고 긴 시간이 되기도 하고, 어떤 땐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 허무하고도 짧은 시간이 되기도 한다.
우리가 흔히 경험하는 대로, 일상을 벗어나 먼 데 여행을 단 하루만 다녀와도 며칠 동안 시간이 오래 지난 것 같이 느낀다. 하루를 며칠처럼, 생명의 시간을 길게 쓴 것이다. 새로운 것을 보고 느끼는 경험을 많이 할수록 시간을 길게 쓰고 그만큼 인생을 길게 사는 것이다.
정보의 '차이'에 반응하는 뇌의 특성
같은 시간을 길게 또는 짧게 느끼는 것은 뇌의 작용 때문이다. 인간의 감정과 기억, 의식과 행동은 모두 뇌가 일으키고 느끼는 영역이다. 더 정확히는 뇌신경세포의 작용이다.
새로운 것을 볼 때 뇌는 자극을 받아 새로운 시냅스를 생성한다. 기억을 하고 연관된 옛 기억과 경험 세포까지 활성화한다. 뇌 연결성이 활발해지고 뇌가 성장한다. 경험은 수천수억 개의 신경세포로 이루어진다.(뇌과학계에서 경험을 뇌에 이식하려는 시도인 '브레인 라이팅'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는 이유)
이런 복잡한 연동성을 갖는 인간의 뇌는 효율성이 중요하기 때문에 똑같은 게 반복되면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여긴다. 즉 뇌신경세포가 반응하지 않고 기억하지도 않는다. 따라서 반복되는 일상은 기억하지 않으므로 훅 빨리 지나간 것 같이 느낀다.
이것은 뇌가 정보 자체보다 정보의 차이에 반응하기 때문이다. 뇌로서는 모든 정보를 받아들이는 것보다는 정보의 차이만 인식하는 게 효율적인 뇌 사용이다. 매일 유사한 일상이 반복되면 기억에 남는 것도 별로 없는 것은 차이 없이 똑같은 게 반복되기 때문이다.
뇌의 퇴화와 성장
따라서 보고 느끼는 것이 없으면 뇌 성장도 일어나지 않는다. 뇌가 한창 발달할 어릴 때의 경험이 중요한 이유이다. 몸의 모든 신경과 감각은 뇌로 연결돼 있다. 요즘 아이들이 방 안에 틀어박혀 공부만 하는 것은 종합적인 뇌로 발달하지 못하고 오히려 뇌 발달을 저해하는 요인이 될 수 있다.
'인간은 비합리적 동물'이라는 역설적인 시각과 흥미로운 방법으로 우리가 미처 몰랐던 뇌의 특성에 대해 알기 쉽게 얘기해 주는 <당신의 뇌, 미래의 뇌>(2019, 해나무) 책에서 저자 김대식 교수는 뇌의 퇴화와 성장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제시한다.
김 교수에 의하면 인간의 뇌 안에는 10의 15 승개의 연결성을 갖는데, 다양한 경험을 통해 연결성을 많이 확보하는 것이 다양한 생각을 펼칠 수 있게 되고 창의력의 기반이 된다. 그러나 뇌신경세포의 연결성은 자주 쓰면 살아남고 한 번도 쓰지 않으면 사라진다. 그래서 뇌를 쓰는 사람에 따라 뇌가 퇴화되기도 하고 계속 성장 발달하기도 한다.
뇌를 잘 쓴다면 인간의 뇌는 80세가 넘어도 성장 발달할 수 있다는 것이 과학적인 결론이다.
"뇌는 세포배양기"
<뇌과학의 모든 것>(휴머니스트, 2013)의 저자 박문호 박사는 ‘뇌는 세포배양기’라고 말한다. 뇌는 신경세포가 분열하고 증식하고 이동하는 배양기이며 감정과 기억, 의식과 행동은 모두 이 신경세포의 몸부림이라는 관점이다. 이 관점에서 인간의 뇌를 바라본다면 단순하게 뇌의 어떤 부위가 어떤 기능을 한다는 식의 고착적, 단편적인 설명이 아닌, 신경시스템의 발생과 진화를 통해 인간 뇌의 기능과 작용을 파악하는 새로운 해석이 가능해진다.
결국 우리의 뇌는 쓰기 나름으로 천차만별로 달라진다. 뇌에 좋은 자극을 많이 주므로 훌륭한 세포배양기로서 제대로 역할하도록 하고, 이로써 뇌 세포를 활발하게 춤추게 하는 것이 풍요로운 삶을 만드는 관건이다.
내 몸과 뇌 안에 우주를 담는다
뇌에 끊임없이 자극을 주는 가장 좋은 방법이 걷기이다. 우리는 걸으며 새로운 것을 볼 뿐 아니라 오감으로 주변 환경을 느낀다. 걷기는 내 몸을 움직여서 내 발을 땅에 대고 내 몸과 기억 안에 땅과 우주의 삼라만상을 흡수하는 행위이다. 대부분의 숨겨진 비경이나 경치 좋은 곳도 차로 갈 수 없는 곳에 있다. 걷기를 통해 극강의 여행을 체험하는 것이 걷기여행이다.
특히 사람이 주인이 되어 걸을 수 있는 사람길은 도로를 걸을 때의 긴장감, 소외감을 탈피한 행복감과 만족감이 큰 걷기여행 효과를 배가시킨다. 그런 경험은 좋은 기억과 추억으로 이어지며 우리 몸과 뇌에 총체적 긍정 효과로서 선순환 고리를 확장시킨다.
"추억할게 많은 사람은 행복하다"고 말하는 엔돌핀 박사 이상구 박사는 그 이유로 "긍정적인 아름다웠던 장면들은 평생 동안 잊혀지지 않는 생명의 에너지로 살아난다"고 말한다. 실제로 최근 미국 케임브리지 대학교 하멜렌 박사 연구팀은 ‘네이처지(Nature Journal)’에 "좋은 추억을 떠올리는 것이 정신건강에 도움이 된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행복했던 때를 회상하는 과정이 뇌의‘탄력성’을 높여 치매 예방, 우울증 예방 등에 도움을 준다."는 것이다. 탄력성이란, 힘든 상황을 극복하는 능력을 말한다. 즉, 좋은 기억을 떠올리는 과정은 스트레스 수치를 떨어뜨리고 본인 스스로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형성하는데 도움을 줘 탄력성을 향상시키는 효과를 일으키는 것으로 분석된다.
본 것보다 많은 것을 기억하는 비결
위대한 여행가들이 그렇듯이 나는 내가 기억하는 것보다 많은 것을 보았고, 또한 본 것보다 많은 것을 기억한다.
-영국 정치인/작가, 벤자민 디즈렐리
일상생활은 기억이 안되지만 새로운 곳으로의 여행은 모두 기억된다. 특히 걷기여행은 새 환경에 노출하는 양과 빈도에서 뇌자극 양이 절대적으로 많다. 걷기여행을 통해 많은 것을 보고 기억하고 추억하고, 그것들과 연관된 다른 기억과 합해져 더 많고 새로운 창조를 만들어 내므로(뇌연결성) 밴자민 디즈랠리의 말처럼 본 것보다 많은 것을 기억할 수 있게 되는 이유이다.
나이 들어도 새로운 곳을 보고 느끼는 걷기 활동을 계속한다면 항상 생명의 시간을 만들 수 있다. 이럴 때 결코 시간이 덧없이 흘러가지 않는다. 일에 매달려 있는 젊을 때보다 시간을 더 길게 더 값지게 보낼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에게 집에 있지 말고 걸으라고 말한다. 매일 보던 거리와 직장만 왔다 갔다 하지 말고 새로운 곳을 걷고 새로운 곳으로 여행을 떠나라고 말한다. 과거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많은 창의적 발견과 사고는 모두 걷기여행을 통해 창출되었다.
시간은 지나가 버리고 지워지지만 걷기여행은 영원히 내 성장과 삶의 자양분이 된다. 누가 더 생명의 시간을 길게 쓰고 젊고 풍성한 삶을 사느냐는 순전히 나 자신의 선택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