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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익준 Dec 01. 2018

너와. 제주에서.

해안선을 따라 어선들이 줄전구처럼 길게 반짝이고 있었다


활력소가 필요하다며 떠난 제주도였다. 그녀는 둘째날 점심부터 자꾸 표정이 어두워졌다. 식은땀이 난다고 했다. 이렇게 몸이 빨리 피곤할지 몰랐다고 했다. 체력관리의 중요성을 실감한다고 말하며 미안한 눈으로 날 쳐다보았다. 나는 먹는게 남는거라며, 이번 여행은 맛집정복이 컨셉이었다고 말했다. 그녀가 웃으며 매일 5끼를 먹겠다고 선언했다.


다음날부터의 일정은 바쁘지 않았다. 텅텅 비어있었다. 아침을 먹고 관광지라고 불리는 곳을 한 군데쯤 훓어보았다. 가까운 맛집에서 밥을 먹었고, 경치가 좋으면 대충 차를 세워 사진을 몇 장 찍었다. 그러다 그녀가 피곤함을 호소하면 해변이 보이는 카페에 앉아서 얘기를 나누었다. 빵과 커피를 잔뜩 시켜놓고는 이따금 일어나 경치를 사진에 담았다.


기술을 배워볼까. 우린 결혼하면 어떤 동네에서 살지. 싸우면 이렇게 싸울 것 같다고 시뮬레이션을 해보기도 했다. 만약 네가 맞을만한 짓을 한다면 기필코 두들겨 팰거라고 미리 엄포를 놓기도 했다. 나는 잘못한 것이 없지만 미안하다고 했다. 해변의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다음에 제주에 오면 저 해변에서 꼭 저렇게 팔자좋게 누워있자고 약속하며 말을 돌렸다. 갑자기 해변의 카페의 뛰어난 비즈니스 전략에 대해서 논하며 칭찬하다가 빵의 가격이 터무니 없다며 깎아내리기도 하였다.


우리는 그 좋은 카페에 앉아 줄창 이야기만 나누었다. 거의 다섯시간이 넘는 토크쇼는 노을과 함께 끝났다. 숙소로 돌아오는 도로 위로 절경이 펼쳐졌다. 나는 운전대를 잡느라 힐끔거리기만 했지만, 내가 미처 보지 못하는 부분은 그녀가 잘 설명해주었다. 그야말로 천장이 구름이었다고.


그녀의 문제가 저질체력이 아니라 병원에서 처방받아 먹고 있던 약의 부작용이라는 걸 알게 되었을 때는 이미 여행의 마지막 밤이었다. 그녀는 더 많은 걸 보지 못해서 아쉽다고 했고, 나는 더 많은걸 보아서 좋다고 말했다. 그녀가 작게 끄덕거렸다. 그녀가 놀리듯 미안한듯 물었다. 원래 완벽한 계획을 좋아하지 않냐고, 꽉찬 일정을 좋아하지 않냐고. 나는 이번처럼 꽉들어찬 여행은 처음이라고 대답했다. 실제로 그랬다. 우린 노을과 커피와 구름 사이에서 서로를 맨발로 거닐고,  빛나는 조각들을 찾아 주머니에 챙겨넣었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네가 말을 하다말고 바다를 좀 보란다. 그리고 잠시 생각에 잠겨있다 말한다. “예쁘다” 나도 네 눈길을 뒤따른다. 해안선을 따라 어선들이 줄전구처럼 길게 반짝이고 있었다. 나는 “그렇네” 대답했고. 우린 서로 말없이 잠시 같은 곳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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