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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즈모넛cosmonaut Nov 08. 2020

#7 하면 된다?

속임수 피하기

고등학교 시절, 정문에서 나가 오른쪽 골목길을 오르면 분식집이 하나 있었다. 그 집에는 작은 홀과 함께 방이 하나 있었는데, 나와 친구들은 그 방에서 라면 먹는 것을 즐겨했다. 방의 벽면 위쪽에는 “하면된다”는 한글 붓글씨 액자기 떡하니 걸려 있었다. 우린 그걸 “라면된다”라고 낄낄거리며 읽곤 했다. 내가 고등학교에 들어간 것이 1976년이니 대체로 1977년경의 일이었을 것 같다.     


물론 가끔은 소주도 함께 시켰고, 담배를 꼬나물고는 욕을 섞어가며 학교나 세상을 비꼬아 말하는 것이 일종의 취미였다. 왠지 그 이유를 알지 못했지만 그런 짓이 괜히 멋있어 보였다. 그렇게 하고 난 날은 뭔가 속이 후련하기도 하고 금기의 선을 넘었다는 쾌감 같은 것이 있었다. 고등학생의 삐딱 선은 “나는 ‘범생이’가 아니다”라는 선언이었다. 그 선언은 나라, 학교, 부모의 말에 무조건 복종하지 않는, 독립적이고 뭔가 멋진 어른 흉내를 내는 자라는 표시이기도 했다.     


그렇게 삐딱 선을 타기는 했지만 난 공부는 꽤 잘하는 학생이었다. 그 당시의 고등학교에서는 공부도 잘하고 삐딱 선도 탈 줄 알아야 멋있는 사람 취급을 받았다. 지금 세태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짓일지 모르지만, 국민교육헌장을 외우고, 교련시간에 총검술을 배워야 했던 그 시절에는, 여하튼 이유를 막론하고 틱틱 거리며 고분고분하지 않은 태도를 보여야 친구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무의식적 저항의 기운이랄까 그런 것이 곳곳에 스며들어 있던 시절이었다.     




“하면된다”는 광화문에 세워진 이순신 동상과 함께 박정희의 대표적인 상징이었다. “뭐든 열심히 하면 잘 살 수 있다”는 그의 메시지는 라면집 벽에 걸릴 만큼 보편화되어있었다. 10대 중반에 시골에서 상경해서, 구로공단이나 인천공단에 있는 ‘벌집’(‘닭장집’)에 살았던 이들이 과연 하면 되었을까? 매일 10시간이 넘는 노동을 해도 ‘공순이’, ‘공돌이’를 면치 못했던 공단 노동자들에게 “하면된다”는 참 야속한 말이지 않을 수 없었다. 대학 1학년 2학기 때부터 구로 3 공단에서 야학 교사로 활동했던 내 경험에 비추어보자면, 상경 후 1년만 지나면 해도 되지 않는다는 걸 대부분의 공단 노동자들은 스스로 깨달았다.     



“하면된다”는 일종의 속임수는 꽤나 강력했다. 사람들은 매스컴에서, 길거리에서, 학교에서, 심지어는 라면집에서 매일같이 그 표어를 봐야 했으니, “하면된다”가 일종의 사회적 무의식으로 형성되어 갔던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사람들은 해도 되지 않은 현실을 살면서도 항상 ‘그래도 좀 더 하면 될 거야’라는 생각을 놓지 않았다. 밤새 잔업을 하기 위해 먹었던 엄마의 약 타이밍정(졸음방지약)은 아이러니 하게도 그 엄마의 자식들이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먹는 약으로 대물림되었다.      




“하면된다”를 “라면된다”로 읽었던 고등학교 시절의 삐딱 선은 되지 않음을 잊지 않으려는 몸부림이었을지 모른다. 덕분에 생존을 위해 불가피하게 사회 ‘적응자’로 살아가면서도 동시에 ’부적응자’의 ‘지위’를 놓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던 것 같다. 물론 사람들마다 선택지는 달랐다. 내 고등학교 동창들 중에는 아직도 “하면된다”고 믿고 처절하게 열심히 사는 이들이 꽤나 많다. 심지어는 “하면된다”야 말로 지금 그나마 가게라도 하나 차려 먹고살 수 있게 해 준 인생철학이라 생각하는 친구들도 있다. 물론 그 친구들을 나는 비난하지 않는다. 물론 긍정하지도 않는다.     


사회적 속임수는 다양하게 존재한다. 사상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달고 나타나기도 하고, 부지불식간에 각인되는 일상의 문구로 등장하기도 하며, 매일같이 중얼거리며 외워야 하는 주문의 형태로 우리 몸에 새겨지기도 한다. 그 속임수를 알아차리고 삐딱 선을 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다양한 길이 열려 있지 않는 한 “하면된다”는 주술에 따르는 것이 생존의 유일한 양식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암울한 이야기지만, 길은 닫혀 있는데 출발선이 다른 세상을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흙수저, 금수저 수준으로만 다른 것이 아니라 부모의 재력, 문화, 지식, 연결망의 수준에 따라 아주 다양하게 다른 출발선에서 우리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롤스의 윤리론에서 제기하는 사회적 공정성의 수준에서라도 문제제기를 해야 하는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기회 평등, 과정의 공정, 결과의 정의”라는 말도 아주 구체적이고 실효적인 일상의 변화를 동반하지 않는 한 “하면된다”의 진화된 속임수일 수 있다.     




출발이 다르면 과정과 목표를 달리하는 것이 하나의 길이지 않을까? 우주여행자의 관점을 이야기하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그것 때문이다. 출발이 다른데 같은 과정, 같은 목표를 갖고 “하면된다”고 주술을 외우며 달려가는 것은 억울하지만 결과의 차이를 받아들이겠다는 선언에 다름 아니지 않을까? 결국 우리에게 요구되고 있는 것은 뭔가 다른 방식, 다른 목표, 다른 삶의 양식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동안 당연히 되어 왔던 것을 하나하나 모두 의심해 가면서, 조금이라도 삐딱 선을 타보려고 용기를 내어보는 것이 우리에게 열려 있는 좁은 길 중 하나 아닐까…. 돈과 권력이 주인이 되어버린 세상에서 그 주인의 감언이설에 현혹되지 않고 나만의, 우리만의 길과 공간을 만들어 가는 삶. 참 어렵기는 하지만 그래도 한 번만 주어진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라면 한 번쯤 용기를 내어봐야 하지 않을까…. 우주여행자를 좋아하는 이들끼리 조금씩 보듬고 용기를 북돋아 주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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