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할과 성취를 지나 남은 감각
한동안 나는
무엇이 되기 위해 살아왔다.
잘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필요한 사람이 되기 위해,
어디에선가 이름이 불리는 사람이 되기 위해
끊임없이 나 자신을 설명하고 증명했다.
그 과정이
전부 거짓이었던 것은 아니다.
실제로 나는 성장했고,
실제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었으며,
그 성취들 덕분에
지금의 삶이 만들어졌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이런 질문이 따라오기 시작했다.
이 모든 것을 내려놓고도
나는 남아 있을까.
역할이 사라지고,
성과가 줄어들고,
아무도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 순간이 온다면
그때의 나는
어떤 상태로 존재하게 될까.
예전의 나는
그 질문이 두려웠다.
존재는 언제나
무언가를 해낼 때만
허락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쉬는 시간에도
쓸모를 찾았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를
스스로에게 잘 허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조금씩 다른 감각이 생겼다.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아도
여전히 숨 쉬고 있고,
아무 결과를 내지 않아도
시간은 흘러가며,
그 안에서 나는
그대로 존재하고 있다는 감각.
그 감각은
처음에는 낯설었고,
어쩌면 불안에 가까웠다.
하지만 점점
안도에 가까워졌다.
나는 여전히
무언가를 만들고,
사람을 만나고,
일을 하고 있다.
다만 예전처럼
존재의 이유를
그 결과들에만 걸어두지는 않는다.
이제의 나는
무엇이 되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게 아니라,
존재하기 때문에
무언가를 해볼 수 있는 쪽에
가깝다고 느낀다.
존재는
성과의 보상이 아니고,
쓸모의 결과도 아니다.
그저
여기 살아 있고,
생각하고,
흔들리고,
선택하고 있는 상태.
그걸로 충분하다는 감각을
나는 조금 늦게 배웠다.
그래서 요즘의 나는
더 이상
나 자신을 급히 정의하지 않는다.
작가인지,
디자이너인지,
컨설턴트인지,
어떤 이름으로 불릴지는
그다음 문제라고 생각한다.
지금 이 순간의 나는
그 모든 이름 이전에
그냥 한 사람으로 존재하고 있다.
그 사실 하나가
이상하게도
이전보다 나를
조금 더 편안하게 만든다.
무엇이 되지 않아도
사라지지 않는 상태.
그게 내가 요즘
조심스럽게 익숙해지고 있는
존재의 감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