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이 습관이 되어버렸을 때
어른이 되면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척’을 배우게 된다.
괜찮은 척,
아는 척,
이해하는 척,
문제없는 척.
사실,
이건 위선이라기보다
사회생활에 필요한 기술에 가깝다.
모든 상황에서
느끼는 대로 말할 수 없고,
생각나는 대로 반응할 수도 없다.
적당한 ‘척’은
관계를 지키는 장치이기도 하다.
문제는
그 ‘척’이 누구를 향하느냐에 있다.
‘척’의 시작은 보통
타인을 향한다.
상황을 부드럽게 넘기기 위해,
불필요한 마찰을 피하기 위해
조금 참거나 맞추는 정도다.
하지만 그것이 반복되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
그 ‘척’이
나 자신을 향하기 시작한다.
괜찮지 않은데
괜찮은 것처럼 넘기고,
이해되지 않는데
이해한 것처럼 정리하고,
마음이 불편한데
별일 아닌 것처럼 취급했다.
그렇게 ‘척’이 반복되다 보면
어느 순간에는
내가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
지금 내 마음이 어떤지가
정확하게 인지되지 않기 시작한다.
이건 싫은 건지,
그냥 귀찮은 건지.
이건 참아야 할 일인지,
선을 넘은 건지.
분명 예전에는
금방 알 수 있었던 것들이
점점 헷갈리기 시작했다.
타인에게 정직하지 못한 건
그나마 회복할 수 있다.
언젠가는 말할 수 있고,
다시 설명할 기회도 온다.
하지만
스스로에게 정직하지 못해 지는 순간,
문제는 깊어진다.
내가 느끼는 감정을
내가 믿지 않게 되고,
내 판단을
내가 의심하게 된다.
그러다 보면
삶의 여러 가지 상황에서
휘청 휘청 거리게 된다.
이 정도는 참아야 하는 건지,
아니면 이미 충분히 참은 건지.
지금 이 불편함이
과한 건지, 정당한 건지.
기준이 흐려진다.
그제야 어렴풋이 깨닫는다.
내가 잃어버린 건
나 스스로에게만큼은
‘척’ 하지 않았던,
어린 시절의 그 정직함이었다는 것을.
정직함은
모든 걸 드러내는 태도가 아니다.
사회에서의 ‘척’을
모두 내려놓으라는 말도 아니다.
다만
적어도 자기 자신에게만큼은
지금 느끼고 있는 감정에 솔직하고,
불편한 걸 불편하다고 말하며,
괜찮지 않은 나를
괜찮은 척 덮지 않아야 한다.
요즘의 나는
타인에게 정직하려 애쓰기보다
먼저
나에게 솔직해지려고 한다.
그래야 나다움에서
멀어지지 않을 수 있다.
어른이 된다는 건
스스로를 속이지 않은 채
현실을 살아가는 법을
조금씩 회복해 가는 일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