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실지 모르겠지만 우리 모두에게는 이야기꾼의 재능이 있습니다. 평생 단편소설 하나 써본적 없다고 말하셔도 소용 없습니다. 어릴 적 학원과 야자를 쨀 때 어떤 변명을 구상하셨는지 떠올려 보십시오. 그냥 거절하고 싶은 술자리 부름에 어떤 핑계를 둘러댔는지 기억해 보세요. 전후 상황과 절묘하게 맞물리면서도 지난 번 내가 던졌던 말들을 복선으로 쓸어담아 개연성 있는 이야기 하나쯤 뚝딱할 수 있는 게 우리네 인생 아닙니까. 우리에게는 성능과는 별개로 일단 이야기를 만드는 기능을 탑재하고 있습니다.
이야기를 만드는 기능, 요컨대 인과를 짜맞추려는 본능입니다. 인과, 원인과 결과. 나 오늘은 술 마시러 못 나간다. 왜? 가족들과 선약이 있어. 왕비는 독사과를 준비했습니다. 왜? 백설공주를 죽이려고. 왜 죽이려고? 백설공주가 일곱 드워프와 결탁하여 반역을 모의했으니까. 보십시오. 아주 오래 전부터, 이야기의 기본은 인과적 연결입니다. 그리고 우린 그것에 아주 익숙하죠. 아 백설공주 이야기가 뭔가 이상하다고요? 뭐 어떻습니까. 뮬란이 기공을 쓰고 루크 스카이워커가 조카뻘 아이 목에 라이트세이버를 들이미는 것이 현대 콘텐츠의 트렌드입니다. 따라 오십시오 휴먼.
'행오버'의 한 장면
행오버(2009)는 이러한 우리의 '인과의 본능'을 정확히 찌릅니다. 원인을 날려버리고 결과를 먼저 보여주는 식이죠. 아침에 호텔방에서 눈을 떴더니 앞니가 날아가 있고, 옆에는 닭이 돌아다니고, 화장실에는 호랑이가 있고, 부엌 찬장에는 못 보던 아기가 있으며, 같이 온 친구들 중 한 명은 실종되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간밤에 뭔 일이 있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소설 마션의 첫 구절이 떠오르는 순간이죠.
"아무래도 좆됐다. 그것이 내가 심사숙고 끝에 내린 결론이다. 나는 좆됐다."
그리고 그들은 서둘러 호텔 밖으로 나섭니다. 원인을 찾기 위해서. 그렇게 그들이 대체 왜 호텔 주차장에 세워져 있는지 알 수 없는 경찰차를 타고 길에 오르는 순간, 우리도 함께 뒷좌석에 탄 셈이 됩니다. 동행해야죠. 저 어처구니없는 결과들이 대체 어떤 원인에 의한 것인지 호기심이 돋으니까요. 이 영화는 시작부터 끝까지 호기심을 연장 삼아 관객들의 멱살을 잡아 끌고 갑니다. 부러진 앞니가 주머니에서 나왔다. 왜? 웬 성당에서 내가 결혼식을 올린 것으로 되어 있다. 왜? 갑자기 갱단이 우리한테 총을 쏜다. 왜? 트렁크를 열었더니 웬 나체의 동양인이 튀어나와 우리에게 빠루를 휘두른다. 왜? 왜? 왜? 영화는 끊임없이 호기심의 조각을 흩뿌리고 착실하게 그것들을 회수합니다. 그리고 그 조각들의 코미디적 퀄리티가 워낙 탁월해서 끊임없이 우리를 실실 쪼개개 만듭니다. 다만 19금인 관계로 부모님과 함께 관람하는 것은 추천하지 않습니다.
토드 필립스 감독
이 영화를 보게 된 계기는 '조커(2019)' 때문입니다. 조커 감독(트드 필립스)이 이 영화 감독이기도 하거든요. 와! 조커! 이 감독 전작은 어떨까! 하고 연어처럼 필모를 거슬러 오르다가 마주친 당황스러운 수작이었죠. 반지의 제왕 보고 감독 전작 검색하다가 '고무인간의 최후(1987)'를 마주했을 때와 비슷한 상황이랄까. 하지만 이런 기분 좋은 당황스러움은 언제나, 당연하지만, 환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