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친동생이 부모님과 함께 자동차 배기 가스로 동반자살이라도 한 걸까요? 남자친구가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점점 차가워지기라도 한 걸까요? 사망 적령기라는 이유로 72살 먹은 노인들을 절벽에서 던진 뒤 나무망치로 머리를 부숴버리는 광경을 목격이라도 한 걸까요? 마약을 먹고 푸른 벌판 위에서 지쳐 쓰러질 때까지 춤이라도 춘 걸까요? 눈앞에서 남자친구가 직화로 구워지기라도 한 걸까요? 그래요, 이 정도라면 울먹일만 합니다. 누구라도 울고 싶겠죠. 하지만 이 모든 일을 겪고난 그녀, 대니는, 오히려 웃습니다. 묘한 뿌듯함과 해방감이 깃든 미소를 지으며 영화의 마지막을 장식하죠. 이 청명한 지옥 속에서 대니는 뭐가 좋아 그렇게 환하게 웃고 있던 걸까요.
영화의 마지막에, 웃고 있는 대니.
이렇게 요약해 놓은 것만 보면 무슨 미친 영화인가 싶지만 미친 영화 맞습니다. 전작 <유전>에서 보여줬던 아리 애스터 감독의 짬밥은 죽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보는 사람이 기분 나빠하는 영역이 어딘지 기가 막히게 캐치해 냅니다. 다만 전작 <유전>에 비해 그 불쾌함의 음습함이 조금 줄고, 약간 더 뽀송해졌을 뿐. 여전히 관객은 러닝타임 내내 신체 어딘가를 타고 오르는 불쾌감과 싸워야 합니다. 호러 영화 마니아에게라면 이만한 호사가 따로 없죠.
이 영화는 전형적인 포크 호러의 문법을 따라갑니다. 자신들만의 (사이비)종교 체계를 지닌 폐쇄적 공동체에 외부인인 주인공들이 휘말려들어가며 벌어지는 참사를 쭉 쫓아가죠. 여주인공 대니는 대학 친구들과 함께 스웨덴으로 조사 겸 여행을 가게 됩니다. 스웨덴 헬싱글란드 지방 호르가 마을의 '하지제(미드소마)'라는 축제를 보러 가기로 한 거죠. 사실 이건 의사 전달 타이밍이 꼬인 남친 크리스티안의 탓이었습니다. 크리스티안은 대니와 헤어지고 싶었지만 얼마 전에 부모와 친동생이 죽어버린 대니를 매몰차게 떨쳐낼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이 상황에서 논문 조사라는 핑계로 한 달 동안 스웨덴으로 쨀 생각이었는데, 대니가 사전에 이를 알아버린 거죠. 뭐 어떡합니까. 비자금 들켰으면 '이건 사실 당신 가방 사주려고 한 거였어 스킬'을 쓸 수밖에 없죠. 크리스티안은 어쩔 수 없이 대니를 껴서 여행에 오릅니다. 시작부터 이별과 비극이 내재되어 있는 여행길이었던 거죠.
이후 하지제는 마약을 좀 한 것 제외하고는 평이하게 진행됩니다. '절벽'이라는 의식 전까진 말이죠. '절벽'은 인생의 마지막 주기인 72세에 도달한 노인들이 높다란 절벽 위에서 투신자살을 하는 의식이었습니다. 심지어 한 번에 안 죽으면 친절하게도 절구만한 나무망치로 손수 머리를 박살내 줍니다. 이 때 대니 일행은 깨닫죠. 이곳이 제대로 미친 곳이구나, 라는 걸. 하지만 이제 돌이킬 수 없습니다. 마을의 영물을 모욕한 마크는 얼굴가죽이 벗겨지고, 마을의 숨겨진 비의를 조사하려 한 조쉬는 살해당하고, 도망치려 한 사이먼은 가슴이 갈라지고 갈비뼈가 모조리 부러진 채 닭장 천장에 대롱대롱 매달린 신세가 되죠. 이렇게 한 명 한 명 죽어나가는 동안, 대니와 크리스티안에게는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요?
'절벽'의식을 바라보는 마을 사람들. 저 망치가 그 망치다.
대니는 댄스 배틀에서 승리를 거머쥐고 5월의 여왕 자리에 오릅니다. 그 이후, 크리스티안은 약에 취한 채 어느 건물로 들어가 마을의 한 여자와 관계를 가집니다. 벌거벗은 마을의 늙은 여인들이 빙 둘러싸고 참관하는 와중에요. 대니는 그 광경을 목도해버리고 맙니다. 결국 하지제의 막바지 행사인 '움집 태우기' 의식 때, 제물 선택의 권리를 쥔 대니는 크리스티안을 산제물로 선택합니다. 그렇게 제물로 선정된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산채로 크리스티안을 태워버립니다. 그리고 대니는, 웃습니다. 전에 없던 환한 미소로.
대니는 왜 웃은 걸까요. 이곳이 정신 나간 사이비 종교 집단이란 건 이미 더 설명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확실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대니는 웃습니다. 왜? 바깥 세상에선 그 누구도 주지 않던 걸 이곳에서는 줬거든요. 바로 공감과 존중 말입니다. 이곳에선 한 명이 울면 모두가 울고, 한 명이 절규하면 모두가 절규합니다. 껍대기 뿐인 공감일지라도 대니에게 그것은 넘치게 충분했습니다. 바깥 세상이 더 시궁창이었거든요.
우리는 종종 사이비 종교에 빠진 사람들에 대한 보도를 봅니다. 대니 같은 사람들이죠. 뭐 저렇게 말도 안 되는 교리와 시스템에 홀딱 넘어갈까, 이렇게 의아한 마음을 가집니다. 평범한 우리들은 그들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대체로, 그들이 누리지 못했던 걸 우리는 자연스럽게 누리거든요. 사랑, 존중, 공감말입니다. 이것들은 뭐 거창한 게 아닙니다. 아침에 출근할 때 눈 비비며 인사하는 가족의 미소, 간혹 푸념 섞인 넋두리를 익살스럽게 받아쳐주는 친구 한둘만 있어도 당신은 그것을 다 누리고 있는 것이거든요. 인간이 물고기라고 할 때 사랑, 존중, 공감은 물 같은 겁니다. 이 중 하나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은 웅덩이에 고인 것이 독액인 걸 알면서도 헤엄쳐 들어갈 수밖에 없는 거죠. 영화의 마지막에, 우리는 독웅덩이 속에서 안식처를 찾은 대니를 안타까워하면서도 이해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녀의 아가미는 웃고 있으니까요.
이 모든 일은 환한 대낮에 벌어집니다. 보통 호러 영화는 안 이러죠. 어둠과 클로즈업으로 시야를 제한함으로써 공포를 극대화 하는 게 일반적인 호러 장르의 문법입니다. 하지만 미드소마는 그냥 백일하에 광각으로 다 보여줍니다. 한 층 더 선명하고, 한 층 더 불쾌하게. 이것만으로도 상당히 독특한 체험이 될 겁니다. 기분 좋을 정도로 기분 나쁜 영화. 호러 영화의 팬 분들이라면 제 말을 이해하실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