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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릎 May 11. 2021

초록의 태풍경보

 남쪽 바다에서 태풍이 온다고 하면 우리는 집 안으로 들어가서 종일 있으면 됐었지. 문을 닫고, 불은 최대한으로 끄고. 그러고도 어쩐지 좀 무서우면 창문에 테이프를 엑스자 모양으로 붙여 놓았지. 무식할 정도로 크게 말이야. 천둥이나 번개가 치면 그냥 가만히 있으면 됐었지. 결국 가만을 못 버티는 건 대개 태풍쪽이었으니까.

풀은 그렇지 않다.
여름 냄새가 짙어질 즈음이면 날을 세운 다수의 태풍이 온 초록을 누빈다.
풀은 그때가 되면 집인 체를 해보고, 최대한으로 누워보고, 엎드려 절을 수십 번 해보는 것인데 태풍의 경로는 북동쪽이 아니라 풀의 숨이 붙은 쪽을 향한다. 풀의 시체가 대형 태풍의 형상을 하며 나가떨어지고, 그 아픈 냄새가 모터 소리와 함께 온 동네를 덮친다.

우리는 다시 문을 닫으면 될 일이다. 문을 닫고, 불은 그냥 두고. 창문에 아직 남아있는 작년의 테이프를 조금씩 떼어낸다. 들어갈 곳 없는 풀냄새는 지쳐서 자꾸만 넘어지고, 비 없는 날에도 이렇게 초록 짙어지는 날이라니.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경보나 특보보다 더 무서운 말을 찾으려고 더듬는다. 풀의 마지막 버둥을 자꾸 떠올렸다 지웠다 떠올렸다 하면서.

@정자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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