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으로는 괜찮아 보이지만
자신의 감정을 소중히 여기는 태도에 대하여
며칠 전, 호우주의보가 내렸던 밤, 대학로의 한 피자 레스토랑에서 오랜만에 전직장 동료 H님을 만났다. 동남아의 우기처럼 비가 쏟아지다 멈추다를 반복하는 날씨에 걱정이 앞섰지만, 다행히 환한 미소를 지으며 들어오는 그의 모습에 마음이 놓였다.
오랜만의 재회는 반가웠고, 그와의 대화는 여전히 마음에 위안을 주었다. 회사 생활이 힘들 때마다 그의 다정한 조언이 큰 힘이 되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날 저녁에도 자녀들을 잘 키우고, 아내와 행복한 가정을 지켜온 이야기를 들으며 나 또한 따뜻함을 느꼈다.
H님은 회사에서 팀원들의 상담사 역할을 하며, 부드러운 소통으로 부서 간의 갈등을 잘 조율했던 사람이다. 우리 둘은 같은 날 퇴사했지만, 그는 퇴사 직후 상장 대기업의 중역으로 부임했다. 더 높은 연봉과 멋진 전용 사무실, 승용차, 호텔 회원권까지, 그를 부러워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그의 내면은 달랐다.
그와의 대화 중에, 그의 이직 후 직장 생활이 순탄치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새로운 직장의 상사는 팀원들에게 모욕적인 비난을 일삼고, 성과가 저하되면 책임을 떠넘기며, 자신의 공로를 과장하는 전형적인 '오피스 빌런'이었다. H님은 이런 상사와의 갈등 속에서 점점 소진되고 있었다. 결국, 집에서도 자녀들에게 갑작스러운 분노를 터뜨리게 되었고, 막내딸과의 관계도 소원해졌다고 한다. 겉으로는 모든 것이 잘 돌아가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의 내면은 상처로 가득 차 있었다.
그가 힘없이 내뱉은 한 마디가 가슴에 깊이 남았다.
"요즘 제일 듣기 힘든 말이 '잘 지내고 있냐'는 인사입니다. 전혀 잘 지내지 못하고 있는데, '잘 지내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할 때마다 마음이 불편합니다."
H님이 겪고 있는 내면적 어려움은 그의 성격적 특성과 직장 환경이 맞물려 발생한 것으로 보였다. 그는 높은 성취욕구를 가지고 있으며, 자신에게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는 사람이다. 이런 성향은 우호적인 상황에서는 큰 도움이 되지만,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큰 심리적 부담으로 다가올 수 있다. 더불어 그는 타인의 문제에 지나치게 몰입하는 책임감이 강한 성격을 가지고 있어, 정서적 소진을 초래할 위험이 있다.
정서적으로 그는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서도 감정을 억누르는 성향을 보였고, 이는 집에서 자녀들에게 갑작스러운 분노로 표출되었다. 겉으로는 잘 지내는 것처럼 보이려는 이중적인 생활이 그를 더 큰 부담 속으로 몰아넣었다.
상황적 원인도 문제였다. 새로운 직장에서 상사의 비합리적인 태도와 행동은 그의 스트레스를 극도로 가중시켰다. 그가 임원으로서 느끼는 주변의 기대와 스스로의 부담은 심리적 압박을 더 심화시켰다. 결국, 인간관계에서의 불만족이 직무 만족도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말았다.
H님의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스트레스 관리와 자기 돌봄이 필요하다. 업무 중간에 짧은 휴식을 통해 정신적 피로를 줄이고, 산책이나 명상 등을 통해 업무에서 벗어나는 시간을 가지는 것이 좋다. 신뢰할 수 있는 멘토나 상담사와 정기적으로 대화하며 감정적 지원을 받는 것도 중요하다. 가족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유대관계를 강화하는 것도 정서적 안정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또한, 무리한 목표보다는 현실적인 목표를 설정하고, 주변의 기대를 현실적으로 관리하는 것이 필요하다. 업무를 부하 직원들에게 적절히 위임하고, 팀원들이 각자의 역할을 잘 해낼 수 있도록 격려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상사와의 대화에서도 자신의 의견을 명확하고 단호하게 표현하며, 부당한 요구에는 논리적이고 정중하게 대응하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마지막으로, 업무와 삶의 경계를 명확히 설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업무 시간 외에는 직무와 관련된 대화를 피하고, 업무 시간 내에 집중적으로 처리하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이를 통해 그의 삶이 업무로 인해 침해받지 않도록 해야 한다.
‘사실은 안녕하지 않다’는 그의 고백은 많은 이들의 마음을 대변한다. 우리의 삶 속에서 진정한 감정을 숨기고 겉으로만 괜찮은 척하는 일이 얼마나 외로운 일인가. 스스로의 감정을 인정하고, 필요할 때는 도움을 청하는 것이 중요하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고, 때로는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도 자연스럽다는 것을 잊지 말자. 우리 모두가 느끼는 감정들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어야 할 소중한 부분임을 기억하길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