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e Bye Blackbird

히스토리 보이즈 후기

by 일월



드디어 히스토리 보이즈의 날이 밝았다! 여행 떠나기 전부터 "기차 취소되면 어떡해?", "우리 여행의 핵심 일정인데 못 보게 되면 당연히 절망적이겠지?" "그래도 덕분에 떠나게 됐으니까...." 등 사서 했던 걱정이 무색하게 기차는 정시에 잘 출발한다.



전날에 비가 조금씩 내리고 흐린 날씨가 지속돼서 불안했지만 공연 당일엔 비가 말끔히 개고 화창한 날씨가 우릴 반긴다. 기차는 한산하고, 자연광이 눈부시게 쏟아지고, 창밖 풍경도 그림 같았다. 거기에 들뜬 마음까지. 여행 내내 찍은 15,000장의 사진 중 이때 찍은 사진이 가장 잘 나왔다. 물론 자연광도 한몫했지만 행복한 마음이 고스란히 사진에도 드러났기 때문 아닐까. 2시간 반 동안 사진도 열심히 찍고, 비행기에서 끝까지 보지 못한 영화 히스토리 보이즈를 마저 시청한다.



기차 타고 가던 중 만난 풍경과 옥스퍼드 표지판



우리가 처음 히스토리 보이즈를 만난 건 2022년 11월. 조금씩 찬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한 시기였다. 마니아층에겐 워낙 유명한 연극이라 궁금했고, 당연히 볼 생각이었지만 어쩐지 미뤄지고 있었다. 그리고 폐막 날, 2층에서 단돈 18,900으로 공연을 보게 된다(그날 이후 연강홀 2층은 가지 말아야 할 곳이라 깨달았다). 그리고 다양한 문학 작품을 인용한다길래 어려울 거 같아 공연 보기 전에 드라마터그 노트도 사서 읽으며 연극에 나오는 작품들을 살폈다.



공연이 끝난 후 무대 (공연 중 난간은 내려갑니다)



그럼에도 처음 우리의 감상은 ……?????????? 였다. 특히 나는 정말 취향이 아니었고, 내용이 왜 저래 뭐 어쩌라는 거야 등 부정적인 생각뿐이었다. 절대 다신 보고 싶지 않은 작품이었다. 동생 또한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 같은 감동을 생각하며 봤지만 기대와 달라 매우 당황스러워하며 기억에서 삭제했다고 한다. 그랬던 우리가 영국까지 가다니, 역시 사람 일은 모르는 법이다. 첫인상이 그대로 이어지지 않을 때가 꽤 많다는 점도 공연을 보며 느끼는 삶의 모습 중 하나다.



한국에서 공연한 지 10주년이라 1년 만에 다시 돌아온 히스토리 보이즈. 나는 당연히 볼 생각이 없었지만 동생이 좋아하게 된 배우 보겠다며 혼자 보고 오더니 "재밌는데???" "왜 재밌지?"를 연발한다. 그래도 꿋꿋이 관심 없던 내가, 다른 작품에서 눈에 들어온 배우를 보러 연강홀로 향한다(그 다른 작품은 막을 내려 다시 볼 수 없었다..). 그렇게 나도 히스토리 보이즈의 매력에 빠지게 된다.



얼핏 보면 내용이 역사와 별로 관련 없어 보이지만 결국 학생과 교사 각자의 서사를 통해 역사는 이런 것이다라는 메시지를 풀어내는 방식이 인상 깊다. 이때 각자의 서사가 마음에 들지 않거나 취향이 아닐 수 있다는 점은 여전히 공감한다. 특히 시놉시스만 보면 동생처럼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를 상상하고 가는 사람이 많기에 예상과는 달라 실망스러울 수 있다. 하지만 전체적인 내용을 알고 다시 보니, 곱씹으면 와닿는 대사들이 많아 매력을 느낀 듯하다.



그래도 아무리 히스토리 보이즈가 영국을 배경으로 한다지만 영어도 못 하는 주제에 한글로도 3시간 동안 텍스트가 휘몰아쳐 힘든 극을 보러 가려고 하다니.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용기가 대단하다. 물론 여러 번 봤고, 대본집, DVD도 있으니 대충 어떤 장면인지 어떤 대사가 오가고 있는지 짐작은 될 거라 생각했다. 극을 온전히 느끼기엔 당연히 부족하겠지만.



부족한 영어 실력을 뒷받침하려면 역시 또 철저한 예습만이 답이다! 투어 공연이 한국 공연보다는 영화와 더 비슷하다는 후기를 보고 영화를 먼저 보기로 한다. 생각보다 더 많이 한국 공과 느낌이 달랐다.



말번 극장과 프로그램북



주로 공연만 보다가 영화가 원작이거나 영화화도 된 작품을 보면 각자의 장단점이 뚜렷하게 느껴진다. 특히 스토리적인 면에서는 영화가 더 섬세해서 주인공의 감정을 따라가기 쉽다(마틸다, 헤드윅, 틱틱붐이 그랬다). 하지만 히스토리 보이즈는 학생들이 역할극을 하는 장면이 자주 나와서 그런지 확실히 그 장면들은 연극이 훨씬 잘 살린다는 느낌이 든다.



연극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개인적으로 한국의 히스토리 보이즈 무대를 좋아한다. 영국 특유의 감성이 느껴진달까. 한편 투어 무대는 지나치게 단조로웠고, 배우들이 직접 무대 장치를 옮기기도 해서 조금 아쉬웠다. 하지만 원래 연극치고 노래가 꽤 있는 편이라 좋아하는데 그 노래들이 아카펠라로 이루어져 더 귓가에 맴돌았다. 또, 나는 이 작품을 볼 때 데이킨의 역량이 정말 중요하다. 그래야 다른 배역들의 이해하기 힘든 행동들이 조금이라도 납득되기 때문이다. 투어 중 데이킨 역의 배우가 이 연극으로 데뷔했다는데 발성도 좋고 연기도 안정적이라 극에 빠져들게 도와주었고, 포스너 역의 배우도 내가 상상하던 이미지와 딱 맞아 포스너 그 자체로 더 잘 받아들였다.



10주년 한국 공연 무대
20주년 영국 투어 무대



한국 공연에서 좋아하는 핵심 대사나 장면들이 꽤 빠져서 아쉬웠다. 특히 "우리,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받은 걸까"라는 대사를 정말 좋아하는데 없었고, 한국 공연에서 흔히 말하는 1등급 신이나 방송 신이 없어서 어윈과 포스너의 관계성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고 느꼈다. 이 부분은 삼각구도를 좋아하는 우리나라의 정서가 반영된 게 아닐까 싶다(물론 원래 영국 공연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그리고 한국 공연이 다른 배역들의 세세한 면도 더 많이 드러나는 느낌이고, 영국 투어 공연은 데이킨이랑 포스너에 훨씬 초점이 맞춰진 느낌이었다. 또, 다인종이 주는 색다름이 있을지 궁금했는데 생각보다 그런 포인트들이 부각되지 않았고, 홀로코스트 신에서 학생들 간의 다양한 의견 충돌이 잘 드러나지 않아 아쉬웠다.



적었던 후기들을 살펴보고, 돌이켜 생각하며 기록하다 보니 아쉬운 점이 한가득처럼 느껴지지만 그냥 좋았다.. 우선 매일 정해진 영역 안, 익숙한 곳에서만 공연을 보다가 낯선 곳에서 관극을 하고 있는 자체가 설렘을 안겨주기에 충분했고, 위에 말한 정도의 아쉬움으로 실망할 거였으면 애초에 영국까지 가지 않았을 것이다. 극 자체가 주는 울림은 변하지 않기에 감동도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설렘과 긴장이 뒤섞인 낯선 환경은 독이 되어 과한 긴장으로 돌아오기도 했다. 영국에 온 지 불과 3일밖에 되지 않은 것도 한몫했을 거라 생각한다. 커튼콜 때 아무도 사진을 찍지 않으니까 괜히 민망해서 폰을 들 생각도 못 하고 머뭇거리다가 끝났다. 당연히 찍어도 되지만, 괜히 눈치 보며 무대에 배우들이 있을 때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 게 무척 아쉽다. 하지만 오히려 없으니까 더 꿈결 같고, 아련한 기억으로 남아 사라지는 공연의 찰나성을 더 오롯이 느낀 셈이라며 스스로를 다독인다.



공연장 로비와 객석



덧붙여, 공연장에 도착했을 때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관객의 연령층이었다. 도시 자체의 연령대가 높아 보이긴 했지만, 정말 머리가 희끗한 어르신들이 당연하다는 듯이 문화를 즐기러 오는 모습이 색달랐다. 이렇게 지역에도 문화가 발전하고, 연령불문 사람들에게 문화가 깊이 스며든 모습이 부러웠다. 역시 셰익스피어의 고장이라 다른가, 과연 문화의 나라답다는 생각도 하며. 우리나라도 언젠가 공연장이 누구에게나 익숙한 공간이 되고, 지역·연령 관계없이 더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문화를 즐기는 날이 오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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