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랭보, 미드나잇 인 파리, 클로저
동생이 와인잔을 깨뜨린 건, 사실 내 탓일지도 모른다. 전에 변명으로 언급했던, 경험하지 않은 것은 와닿지 않아 일정이 닥쳐야 슬금슬금 움직이는 나는, 파리 숙소에 있다가 문득 "랭보 어디 사람이지?"하고 묻는다. 찾아보니 역시 프랑스 사람. 그러다 파리에 랭보의 시 <취한 배>가 적힌 벽화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어디에 있지? 아 우리가 어제 간 뤽상부르 공원 근처에 있네.. 하하." 그런데 사진을 보니까 꼭 가고 싶어 져서 양심도 없이 가자고 조른다. 가고 싶은 곳을 미리미리 확인하지 않고, 심지어 근처를 다녀온 후에야 말하자 동생은 당연히 화가 났다. 근데 그 와중에 나도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답했지만(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는다), 사실 무조건 내 잘못이긴 했다. 그렇게 약간 감정이 격양된 상태에서 밥은 먹어야 하니 설거지를 하다가 그만, 와인잔이 깨졌다. 평소보다 잔을 좀 더 세게 털지 않았을까? 아무튼.
결국 동생은 탐탁지 않아 하며 랭보 취한 배 길로 향했는데, 이런 엄청 예쁘잖아. 무척 마음에 들어 안 왔으면 후회했을 정도다. 왜냐하면 사진이 정말 잘 나온다. 불만은 금세 사라지고 서로 열심히 사진을 찍어준다. 우리가 열심히 사진을 찍으니 지나가던 사람들도 "여기 뭐가 있나" 하며 벽을 쳐다보고 지나간다. 나는 이 와중에 동생한테 폰을 급하게 넘겨준 바람에 스트랩이 다 삐져나오게 찍어주고, 밤늦게서야 알아차리고 AI로 열심히 지워주기로 한다.
그리고 파리의 낭만적인 이미지를 만든 대표적인 영화 <비포 선셋>, <미드나잇 인 파리>. <비포 선셋>은 영국 가는 비행기에서 대충 쓱쓱 봤고, <미드나잇 인 파리>는 원래 좋아하는 영화라 이곳에 나온 장소들을 가고 싶었다. 우리가 2주 간의 여행 중 유일하게 예약을 한 식당도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 헤밍웨이가 간 식당 "polidor(폴리도르)"였다.
폴리도르에서 만족스러운 식사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남자 주인공이 과거의 파리로 떠나는 차를 탔던 길목, 생 에티엔 뒤 몽 성당 앞으로 향한다. 사진을 찍고 그곳을 바라보니 사실 아무것도 아닌 그냥 길거리였지만, 순식간에 영화 속 장면이 그려지고 벅찬 기분이 든다. 유명한 관광지가 아니더라도 내가 좋아하는 작품 속 사소한 장소가 훨씬 더 감동적으로 다가오는구나. 역시 좋아하는 것에서 그 경험이 확장될 때, 감정이 더 깊게 마음에 스며든다는 걸 새삼 느낀다.
돌이켜 보니 이 순간이 <마우스피스> 때보다 더 벅찼던 것 같다. 내게 더 인상 깊었던 작품은 <마우스피스> 임에도 왜 그런지 생각하니 연극은 장소가 언급될 뿐, 오로지 100% 전부 내 상상에만 의존해야 한다. 한편, 영화는 실제 장소에서 장면이 펼쳐지기 때문에 훨씬 수월하게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영화 촬영지가 유명한 관광지가 되는 건 꽤 낭만적인 이유였음을 깨닫는다.
아, 런던에서도 영화 촬영지를 갔었다. 연극이 원작인 <클로저> 촬영지 포스트맨스 공원. 물론 단순히 영화 촬영지라고 하기엔 다른 사람들의 생명을 구하다가 사망한 사람들을 기리는 의미 있는 장소다. 공원이라곤 하지만 잔디밭이 펼쳐진 그런 공원은 아니고, 잠시 머물며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원이었다. 오전에 가서 그런지, 날씨가 썩 좋지 않아서 그런지 사람은 거의 없었고, 오히려 조금 스산한 느낌이었다.
클로저는 한국에서 뒤늦게 본 후, 취향이라 급히 한 번 더 보고 바로 영화도 봤었다. 연극과 영화가 꽤 다르고, 결말도 달라 다른 작품 보는 느낌이었지만 각자의 매력이 분명했다. 이곳도 클로저의 시작이자 마지막인 장소라 처음 이곳에 와서 여자 주인공 앨리스가 어떤 생각을 하고, 감정을 느꼈을지 그리고 그 후에 겪었던 시간들을 잠시나마 짐작해 본다. 또, 극 중 앨리스가 되어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한 사람들을 잠시 기리기도 한다.
비슷한 맥락으로 우리는 미술관, 박물관을 많이 갔음에도 투어를 한 번도 하지 않았다. 물론 비용적인 부담도 있으니, 그만큼의 가치를 할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유명한 작품이더라도 나한테 안 와닿을 수 있다는 걸 아니까. 물론 그림에 대한 배경이나 설명을 들으면 감상이 훨씬 풍부해지지만, 그것도 결국 오로지 나만의 감상은 아닐 수도 있지 않나?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봐도 내 마음을 움직이는 작품들이 있지 않는가. 우선 처음은 그렇게 접하고, 그 후에 계속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작품이나 문득 생각나는 작품이 있다면 그때 작품 설명을 찾아봐도 늦지 않다고 생각한다(실제로 찾아보는 일은 거의 없을지라도).
글을 쓰다 보니 전시도 참 내가 연극과 뮤지컬을 보는 방식으로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피식하게 된다. 처음은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오로지 내 시선으로 느끼고, 그 후에 더 궁금한 점이 있으면 찾아보고 다시 보는 것처럼.
이전에도 전시랑 공연을 비교하면서 내 나름대로 느낀 건 전시가 더 어렵고 어느 정도 배경지식이 필요하다는 점이었다. 화풍이든 기법이든 작가의 생애든 이미 머릿속에 정보가 있어야 풍부한 감상을 할 수 있으니까 아는 만큼 보이겠구나 하며. 그런데 이것조차 어렸을 때 문학이나 예술을 배우는 접근 방식 아니었을까. 그냥 있는 그대로를 내 감정으로 느끼는 것. 그 이후에 궁금한 건 찾아보거나 아니, 굳이 그럴 필요도 없다는 거. 이런 식으로 나를 기준 삼아 문화예술에 접근하는 것도 괜찮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정답이 있겠냐마는 본인이 원하는 방식대로 문화를 즐기면 되는 거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