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에서 만난 술들 이야기.01
말라가에서 머무는 이틀째의 밤, 사람들 다 나가고 혼자 남은 호스텔에서 시간을 때울 궁리를 하다가 생각난 게 바로 이 짓이다. 유럽 여행기 <스. 삼. 여>를 연재하고는 있지만(예. 제가 줄인 겁니다.) 사실 거기에 등장하지 못한 술들도 그간 좀 있었다. 어쨌거나, 벌써 3주째 여행하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여행기를 쓰다 보면 본의 아니게 생략되는 술들을 그냥 흘려보내기엔 좀 아깝기도 하고 해서, 따로 자리를 만들어서 소개를 해보기로 했다. 여행기에 등장 못한 사진들도 좀 올려보고 말이지. 그런 만큼 평소보다는 훨씬 더 가벼운 투로 쓸 예정이니, 적응 안 되시는 분들은 살포시 뒤로 가기를...
여행기엔 쓰지 않았지만, 사실 포르투갈에서 리스본과 포르투만 간 게 아니다. 코임브라도 갔었다. 이름이 생소하신 분도 있으실 텐데, 사실 그렇게 유명한 도시는 아니다. 포르투갈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교이자 명문 대학교인 코임브라 대학교가 있다는 것을 빼면, 사실 그 외엔 유명한 게 따로 없기 때문이다. 그런 곳에 왜 갔느냐. 대학 동기 하나가 코임브라에서 유학 생활을 하고 있어서였다. 오랜만에 돌도 씹어먹을 나이의 남자 둘이 만났으니 할 일이라곤 술 푸는 일밖에 더 있겠는가. 그간 쌓인 얘기를 하려면 목구멍에 기름칠 좀 해줘야 하니, 일단 술 몇 병 사서 친구 자취방으로 들어갔다.
친구가 준비해둔 술은 스미르노프 보드카였고, 그 한 병으론 부족할 것 같아서 시내 바틀 샵에서 산 술이 바로 위의 저것이다. 콥케 파인 토니 포르토. 어렴풋이 눈치채셨겠지만 포트 와인인데, 우리나라에도 슬슬 들어오고 있는 듯하다. 여행을 떠나기 전 들렀던 가로수길의 매그넘 더 바틀 샵에서도 찾을 수 있었으니까. 투박한 디자인의 병이 나름 매력이라면 매력이어서 기억하고 있었는데, 여기서 만나니(라기엔 얘는 여기가 홈이지만) 반가워서 덥석 한 병 구입.
셰리 와인도 피노와 올로로소로 나뉘는 것처럼, 포트 와인 역시 다양한 종류가 있다. 따지자면 많지만, 크게 나누자면 루비(Ruby)와 토니(Tawny)다. 브랜디나 다른 주정을 첨가해 발효를 멈춘 포도주를 숙성시키기 위해서 몇 천 리터에 달하는 커다란 오크통에 부어 넣는데, 이 상태로 통상 3년을 넘기지 않고 병입해 출하하는 게 루비. 그 루비를 좀 더 5~6백 리터 정도 되는 작은 오크통에 집어넣어서 추가적으로 숙성시키는 게 토니(Tawny).
당연히 루비가 숙성이 덜된 만큼 더 싸며, 큰 오크통에 있어서 산화가 적은 만큼 오크통의 풍미는 '핥은 듯'만 하고, 포도주 자체의 과실 향이나 꽃 향기 등의 가벼운 향기가 살아있게 된다.
그렇다면 토니는? 작은 오크통에 담긴만큼 공기와의 접촉 면적이 넓어 활발히 산화하며 오크통에서 숙성된다. 포도 자체의 특징은 조금씩 엷어지고, 오크통의 특징이 배어들면서 세월의 무게가 묻어나오게 되는 것.
즉 저 콥케 토니의 토니는 그런 뜻이다. 먹고 마시느라 바빠서, 그리고 언젠가 이런 글을 쓰게 될 줄은 몰라서 잔에 따른 사진과 시간 들여서 시음을 한 기록은 없다. 다만, 뒤에 만난 샌드맨이나 테일러의 포트 와인에 비교한다면 좀 떨어지는 수준이었단 건 확언할 수 있다. 하지만 그래도 근 1년 만에 만난 우리는 술들을 다 거덜 냈고, 맛있고 없고는 따로 상관이 없었다는 게 중요하다. 술은 그 자체로 즐기는 것이기도 하지만, 반가운 친구와 함께라면 더 맛있는 법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