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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quaviT Jun 20. 2016

시간이 맺힐 곳-2

프랑스 - 디종



걷는다. 그냥 그때는 걷고 싶었던 것 같다. 다른 방법이 마땅치 않았던 것도 있지만, 앞으로 내가 살면서 이 곳을 언제 다시 걸어볼까, 하는 데서 오는 다짐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많지도 않았고, 갈 길은 멀었으므로 오늘 안에 루트 드 그랑 크뤼를 다 걷는 건 무리였다. 오늘은 일단 쥬브레 샹베르탱까지만 걷는 걸로 했다. 코트 드 뉘의 끝자락인 뉘 샹 조흐주까지의 거리를 10으로 본다면, 쥬브레 샹베르탱은 4 정도에 위치하고 있는 마을이다. 






  포도밭 사이로 가르마처럼 뻗어있는 길을 하염없이 걸어온 끝에, 마침내 보인 표지판. 부르고뉴의 쥬브레 샹베르탱 마을이다. 마르사네 마을의 포도나무들은 아직 순을 틔운 나무들이 거의 없었는데, 그보다 좀 더 남쪽에 위치한 이 마을의 포도나무들은 벌써 푸른색 잎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한 달 정도 있으면, 지금은 황량하게만 보이는 이 밭을 초록색 포도잎이 메울 것이다. 마을 어귀에 있는 밭에는 꽤나 '짬'을 드신 듯한 굵직한 포도나무도 있었다. 사실 내가 생각했던 포도나무의 이미지는 이것이었기에 반가웠다.





  다른 마을과 마찬가지로, 쥬브레 샹베르탱 마을 역시 텅텅 비어있었다. 솔직히 꽤나 고생을 해서 여기까지 온 만큼, 만화나 드라마에서처럼 인심 좋은 주민들이 따뜻하게 맞아주는 광경을 기대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여기도 사람 냄새 탈취제를 뿌린 것처럼 나밖에 없으니 좀 김이 샜다. 마을로 들어가 보니 쥬브리 샹베르탱 성이라는 게 서있었는데, 그럴싸한 외관과는 달리 거의 방치되어 있다시피 한 입구가 공포스러웠던 기억이 난다. 영화나 만화 같은 데서 보면 이런 데로 들어갔다가 어디에 빠지면 이상한 데로 이동하고 그러던데, 나는 돌아가야 할 집이 있는 몸이라 얌전히 와인이나 찾아다니기로 했다.





  마을 사람들은 쥬브레 샹베르탱 마을 읍내에 모여있었다. 술집에서 맥주나 와인 한 잔씩 걸치면서 저무는 해를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관광안내소가 있었다. 이런 조그마한 동네에도 관광 안내소가 있다는 건 꽤 의외였는데, 와인 때문에 방문하는 사람이 많은 곳이니 그럴 법도 했다. 왠지 노을이 슬슬 지고 있는 시간에 한적한 동네의 관광안내소를 들어가려니 쌍팔년도 미국 슬래셔 영화의 사망 공식이 생각났지만, 여행자보험을 들어놨기에 안심하고 들어갔다. 시음을 할만한 곳을 물어보니, 바로 코앞에 있다기에 찾아갔다. 위 사진의 표지판 왼쪽에 보이는 Phillippe Leclere라는 곳이었다. 들으면 알법한 곳은 아니었지만 들으면 알법한 곳은 시음을 제공하지 않았으니 아쉬운 대로 이 곳이라도 들어가 보기로 했다.





  굉장히 허름한 건물이었는데, 안에는 바이어 일행인 듯한 일본인들이 와인을 시음하고 있었다. 시음이 가능하냐고 물으니, 당연히 가능하며 박물관도 있다고 했다. 와인 박물관이라도 운영하는 건가, 싶었는데 어디서 모아 왔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농기구며 동물 박제들이 한가득 놓여있었다. 오래된 건물이라 보수 중인지 여기저기 구멍이 뚫려있는 풍경이 이색적이었다. 별 거 없는 박물관을 뒤로하고 올라오니, 시음이 준비되어 있었다. 시음 준비하는 동안 좀 뻘쭘할까 봐 일부러 박물관 갔다 오라고 한 게 아닐까.





  시음한 와인은 총 여섯 병. 그랑 크뤼는 없었지만, 프리미에 크뤼 와인이 네 병이나 있었다. 시음 순서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내공이 부족한 것인지, 와인에 그렇게 목마르지 않았던 것인지 모 만화처럼 엄청난 것들이 보이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고단한 하루 일정에 지친 몸 여기저기서 빨대를 들이밀었다. 독하지도 않은 와인인데도 술기운이 금세 몸으로 스며든다. 그 덕에 대부분 다 맛있게 느껴졌지만, 개인적으로 제일 좋았던 와인은 왼쪽에서 두 번째, 1급 밭 La Combeaux Moines의 포도로 만들어진 와인이었다. 다른 와인들이 대부분 약간 날이 선 듯한 신맛이 시큼함과 상큼함의 중간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는 듯한 느낌이었다면, 이 와인은 분명히 상큼한 쪽이었다. 그러면서도 흙냄새와 오크통의 풍미가 적당히 무게를 잡아주는 게 아주 멋졌다. 


  이 때는 '사면 집까지 갖고 가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마음에 드는 와인이 있어도 살 생각은 못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냥 산 날 다 마시는 한이 있어도 한 병 사서 원 없이 마셔볼 걸 그랬나, 하는 후회도 조금 든다.





  시음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석양이 무르익어 있었다. 다행히 디종까지 돌아가는 버스가 있지만 좀 기다려야 한다. 약간 올라있는 술기운 덕분에 그렇게 길게는 느껴지지 않았다. 한 번 갈아엎은 밭에서 피어오르는 흙냄새, 그리고 아직 이른 계절을 채우고 있는 아직 이른 새순들의 여린 향기들이 채워진 공간에 서있는 버스정류장은, 그래서 멋졌다. 오늘은 여기까지, 내일은 코트 드 뉘의 끝에서부터 나머지 절반 정도를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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