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quaviT Jul 20. 2016

하울의 지저분한 성 - 1

프랑스 - 콜마르

  그런 때가 있다. 정말 재미있는 시간을 보낸 후에는, 그다음 마주치는 시간은 그다지 재미있게 느껴지지 않는 그런 때. 하지만 본 로마네라는, 내가 밟았던 곳 중 가장 아름다운 장소를 밟은 후 가는 곳은 그렇지 않을 것이었다. 다음 목표 역시 내가 이번 여행에서 꼭 보고 싶었던 장소 중 하나였기 때문. 해리포터 시리즈, 포켓몬스터와 함께 90년대생에게 주옥같은 추억을 안긴 수많은 걸작을 만들어낸 미야자키 하야오, 그의 은퇴작이 될 뻔 했던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배경인 도시, 콜마르. 순례자처럼 디종의 포도밭을 하루 종일 거닐고 저녁에서야 콜마르에 도착했음에도 피곤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사실 늦은 시간이라 아무도 없는 주택가를 헤매며 카우치서핑 호스트를 만나러 가는 길인지라, 긴장감 때문에 그랬겠지만.



  약 30분 정도를 걸은 끝에 도착한 호스트의 집은 - 더러웠다. 정말 많이... 호스트는 콜마르에서 유학 중인 내 나이 또래의 인도인이었는데, 솔직히 어떻게 카우치 서퍼를 받을 생각을 한 건지도 좀 신기할 정도였다. 굴러다니는 잡동사니에 바닥에 나뒹구는 먼지와 머리카락들, 맥주캔 등등에 스파게티 한 접시는 나올 것처럼 엉켜있는 전선들. 지금 생각해보니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 처음 들어가 본 소피의 심정이 이랬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내 반응도 소피와 비슷했다. 청소를 해줬다. 여기서 어쨌든 이틀을 자야 했기 때문이다.



  다음날 아침, 학교에 가야 한다는 호스트를 따라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콜마르 역시 관광지인 구시가지와 주거 지역 위주인 신시가지로 나뉘어 있었다. 구시가지로 가기 위해서는 버스를 타야 했는데, 버스 정류장 이름이 모두 유럽의 도시 이름이었던 게 이채로웠다. 그렇게 나는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 어쨌든 유럽의 어느 도시 이름이었을 정류장에서 내렸다. 조금 걸어나가니, 그 풍경이 보인다. 낯설면서도 낯익은, 그런 집들이 있었다. 




  아침을 여는 쨍쨍한 햇살이 유난히 반가웠다. 개인적으로 여행할 때는 마냥 밝은 날씨보다는 좀 흐릿한 날씨를 선호하는 편이지만, 이 곳에서도 그런 날씨를 바라고 싶지는 않았다. 이렇게 알록달록한 공간에 흐린 날씨는 절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으니 말이다. 집들이 황금빛 햇살을 받아 자기 색깔을 뽐내는 광경은, 이번 여행에서 가장 인상적인 하루의 시작이었다. 





콜마르 역시 프랑스의 다른 마을들처럼 중앙에 시장이 서있었다. 올리브 절임과 치즈에서 흘러나오는 퀴퀴한 냄새가 이젠 꽤나 익숙했다. 물론 익숙하다고 해서 그 냄새에 식욕이 당기는 건 아니었다. 사실 이때 이미 여행의 중반부를 넘기고 있었고, 그러다 보니 빵, 파스타, 입에 별로 안 맞는 음식에 지친 내 뱃속은 식욕까지 소화시킨 것처럼 별다른 요구를 하지 않았다. 이번 여행에서 식비가 그렇게 많이 들지 않은 이유가 바로 저거다. 하지만 어쨌든 카우치서핑 호스트가 돌아올 때까지는 열 시간 가까이 남아있는 상황이었고, 그동안 돌아다니려면 뭐라도 먹어야 했기에 일단 시장 안으로 들어가 보기로 했다. 뭐라도 식욕 당기는 게 있기를 바라면서.





  콜마르의 시장 역시 굉장히 깔끔하고 넓었다.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가게도 물건들을 진열하고 진열대를 닦으면서 손님들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다지 특이한 것은 없는 시장을 한 바퀴 돌고 나니, 뭔가 낯익은 냄새가 코로 들어왔다. 




  베트남 쌀국수다. 세상에! 여기까지 와서 굳이 베트남 쌀국수를 먹는 게 누가 보기엔 정말 이해 안 되는 행동일지도 모르겠지만, 이 때는 워낙 반가웠기에 '일단 저걸 당장 내 뱃속에 넣어야겠어'라는 생각밖에 안 났던 것 같다. 유럽을 여행하면서 거의 모든 한국 음식이 그리웠지만, 그중에 제일 먹고 싶었던 게 국물 요리였다. 밥 같은 경우는 마트에서 안남미(찰기 없이 흩어지는 쌀)을 사서 적당히 냄비밥을 해먹을 수라도 있지만, 국물요리는 영 찾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런 와중에 한국에서도 좋아했던 베트남 쌀국수가 뙇! 하고 있었으니 안 먹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고, 그렇게 했다. 낮술도 아니고 아침술까지 곁들여서 일단 배를 빵빵하게 채워줬다.




  배를 채우고 나오니, 세상이 좀 더 아름답게 보이기 시작했고 덕분에 더 느긋해졌다. 이미 한 번 이야기했던 것 같지만, 가끔 왠지 모르게 피곤하고 안절부절못하겠다면 일단 배부터 채워보도록. 부른 배는 언제나 우리를 여유롭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시장의 앞에는 수로가 있었고, 그 옆으로는 무지개를 방불케 하는 알록달록한 집들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여기가 그 유명한 쁘띠 베니스인가? 싶었지만, 이 길을 따라서 좀 더 가야 한단다. 사람들이 배를 타고 내려오는 걸 보니, 확실히 이 길로 가면 있을 듯했다. 





  사실 콜마르로 찾아오는 여행객들이 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만 보고 찾아오지는 않을 것이다. 사실 카우치서핑 호스트인 인도인 친구도 그런 애니메이션이 있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고 말이지. 아마 한국 - 일본 - 아마도 중국까지는 '하울의 움직이는 성'을 보고 이 예쁘고 아담한 마을에 발을 들일런지는 모르겠지만, 그 외의 나라에서 온 여행객이라면 아마 이 곳을 정말 아름답게 찍은 사진 한 장에 이끌리지 않았을까. 쁘띠 베니스. 말 그대로 작은 베니스라는 곳이다. 내가 봤던 쁘띠 베니스는 사방에 꽃이 만개하고 약간 파스텔톤으로 물든 집이 있는 곳이었는데, 사실 직접 마주한 이 쁘띠 베니스는 그 사진보다는 좀 아쉬운 기분이었다. 시기가 시기이니만큼 꽃도 피지 않았고, 내 눈에는 필터가 달려있지 않았기 때문에 이 광경을 파스텔톤으로 감상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를테면, 이 광경은 이 쁘띠 베니스의 민낯인 셈이었다. 물론 여전히 예쁜 곳이었지만, 기대치에서 수수료를 떼인 느낌이라고나 할까. 




  조금은 김이 샌 마음을 다잡고, 또 발걸음을 옮겼다. 콜마르의 매력은 이 쁘띠 베니스뿐만이 아닐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사실 희망이라고 부르는 편이 더 맞지만, 그 희망을 확신으로 바꾸고 싶었다. 그래도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아직 시간은 많았으니까. 콜마르는 아직도 보여줄 게 많다며 손짓하고 있었다. 



  그럴 땐 일단 분위기를 좀 띄워줘야 한다. 그러려면 일단.. 좀 마셔줘야 한다. 지나가다 보니 꽤 잘 꾸며놓은 보틀 샵이 있기에 들어가 보았다. 가격은 대부분 평범했고, 그중에 가장 눈에 띄는 두 병을 집어 들었다. 하나는 콜마르에서 만드는 듯한 맥주, 그리고 정체는 알 수 없지만 좀 싼마이틱한 라벨의 IPA 한 병. 일단 햇볕 잘 드는 벤치에 앉아서 콜마르 맥주부터. 굉장히 침전물이 많았던 게 기억난다. 그만큼 좀 걸쭉한 편이었고, 맛도 진했다. 이어서 '하이웨이 투 에일'이라는, 재치 있는 네이밍의 IPA는 라벨만큼이나 개성 넘치는 맛이었다. 락앤롤스런 맛이랄까, 다만 대성한 락밴드 같지는 않은, 그런 느낌.




  걷다 보니, 또 새로운 - 그리고 기억에 남을 한 장면이 펼쳐졌다. 흰 얼굴에 검은색과 빨간색으로 곱게 단장한 두 채의 건물이었다. 백설공주를 연상시키는 건물의 사이를 지나가면, 또다시 상점가. 그러고 보면, 콜마르의 구시가지는 정말 대부분이 식당 아니면 상점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실 당연한 일이겠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이 구시가지는 우리나라 민속촌 비스무리한 공간이니 말이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모티브가 되었다는 건물과 마주쳤다. 애니메이션이 아니라, 그 안에 등장하는 하울의 성 말이다. 언뜻 보면 그 그로테스크의 결정체인 하울의 성과 어떻게 연결이 되었나, 싶을 정도로 운치 있고 예술적인 건물인지라 이해가 잘 가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 난간이 하울의 성에 정말 없었을 것 같냐고 물어본다면 또 아니라고 대답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집으로 돌아가면 하울의 움직이는 성을 돌려 보면서 콜마르에서 만났던 건물들을 찾아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의 이전글 시간이 맺힐 곳-3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