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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quaviT Jun 23. 2021

London Calling

런던, 런던 드라이 진


  프랑스에서의 마지막 일정을 마치고 난 후, 마침내 이번 여행의 마지막 스테이지(?)라고 할 수 있는 영국으로 향할 시간이다. 익히 알려졌다시피, 프랑스 파리에서 런던으로 갈 때는 유로스타(Eurostar)라고 불리는 해저열차를 타고 가는 게 일반적이다. 프랑스의 파리 북역(Paris Gare du Nord)에서 탑승했는데, 입국서류를 상당히 상세하게 적어야 했던 게 기억난다. 이 당시가 브렉시트로 한창 떠들썩할 때여서 그랬는지, 아니면 원래 그런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심지어 통장잔고까지 적어야 해서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



숙소에서 마셨던 Lovely pint of Guinness와 인상적인 문구



  그렇게 건너오게 된 영국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파리에서 유로스타에 탑승할 때만 해도 화창한 날씨였기에, 역시 영국답다는 생각을 하면서 런던의 심하게 외곽 쪽에 있는(...) 숙소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다시 생각해봐도 고어텍스 재질의 상의와 신발을 가져간 건 이 여행의 베스트 초이스였다. 정말 물 한 방울 들어오지 않으면서도 쾌적하게 돌아다닐 수 있었기 때문. 유럽, 그 중에서도 영국을 방문할 계획이 있는 분이시라면 꼭 고어텍스 재질의 외투를 챙겨가는 걸 권하고 싶다. 다만 이 때, 비가 하도 내려서 사진 찍을 겨를이 없었기에 숙소까지 가면서 찍은 사진은 없다. 그런데 정작 도착하고 나니 해가 뜨는 기현상...

  숙소는 1층은 펍, 2층은 호스텔(?)을 겸하고 있는 곳이었기에, 나는 굉장히 좋았다. 일단 도착한 당일날이 리버풀FC와 세비야FC의 2015-2016 유로파리그 결승전이 열리는 날이었고, 영국 펍답게 스포츠 채널이 항상 나오고 있는 티비가 있었기 때문이다. 저녁에 내려와서 보기로 하고, 일단 성공적인 영국 입성을 기념하며 기네스 한 잔으로 이 날의 음주를 시작했다.



 

The Clash의 음반 London Calling




  더 클래쉬(The Clash)라는 영국의 밴드가 불렀던 '런던 콜링(London Calling)'이란 노래를 아시는지. 한 번 들으면 절대 잊혀지지 않는 기타 리프를 가지고 있는 곡으로, 1979년 당시의 혼란상을 담고 있는 가사가 인상적이다. 물론 그때와는 달리 2016년의 런던은 매우 평화롭긴 했지만 어쨌거나 이 때에도 브렉시트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가 지속적으로 나오고 있던 시기였던만큼 런던의 거리를 걷다보니 이 노래를 계속 흥얼거리곤 했다.




런던, 십스미스(Sipsmith) 진 증류소



  런던을 대표하는 술이 있다면, 아마 그것은 '진(Gin)'일 것이다. 네덜란드에서 시작된 진은 런던에서 매우 크게 성행하였는데, 덕분에 네덜란드의 진과는 또 다른 '런던 드라이 진'이라는 하나의 사조를 만들어내기에 이르렀다. 그런만큼 런던에는 비피터(Beefeater)와 같은 대기업뿐만 아니라 여러 크래프트 진 디스틸러리들이 산재해있으며, 내가 가장 먼저 발길을 옮긴 '십스미스(Sipsmith)'도 그 중 하나였다. 라벨에 그려진 백조(Swan)이 인상적인 십스미스 진은 크래프트 진인만큼 외국에서도 찾아보기 쉽지 않은데, 그 섬세한 맛과 풍미는 정평이 나 있어서 유수의 바에서는 베이스 진으로 쓰기도 한다고. 하지만 그러한 명성에 비해서 증류소의 규모는 크지는 않은 편이다. 아니, 오히려 작다. 들어가면 증류기가 딱 보이고, 그래서 딱히 견학할만한 거리도 없다. 하지만 사람들이 매우 친절했고,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자신들이 만든 진을 한 잔씩 시음시켜주었다. 조금 여행지 보정이 들어가긴 했겠지만서도, 정말 맛있는 진이긴 했다.




비피터(Beefeater) 증류소



  크래프트 진 증류소를 봤으니, 이번엔 좀 큰 곳을 보기로 했다. 사실 '런던 드라이 진'이라는 이름을 달고 출시되는 녀석들 중 런던에서 만들어지는 건 많지 않다. 탱커레이, 고든스 등 이름난 진들은 모두 스코틀랜드 어딘가에서 생산된다. 하지만 비피터는 런던에서 만나볼 수 있다.

  이름이 다소 특이하다. 비피터란 이름은 '비프(Beef)' + '이터(Eater)'의 합성어로, 한마디로 '소고기 먹는 사람'이란 뜻. 도대체 왜 이런 이름이 붙었는고 하니, 템즈강 인근에 있는 런던탑을 지키는 경비병들이 봉급을 받아 소고기를 먹어서 비피터란 이름이 됐다는 설이 있고, 거기서 따온 이름이라고 한다. 실제로, 그래서 비피터의 라벨을 보면 런던탑의 경비병이 그려져있다.



비피터(Beefeater)의 라벨




  이전의 십스미스 증류소가 소형 증류소의 미덕을 보여줬다면, 이 비피터는 대기업의 미덕을 보여주는 곳이었다고 평하고 싶다. 일단, 단순히 진의 제조과정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진 박물관을 마련해두어서, 진이 어떤 술인가를 확실히 알 수 있다. 





  진은 1688년, 제임스 2세가 자기 사위인 네덜란드의 오라녜의 빌렘 공과 그 마누라(그러니까 제임스 2세의 딸이다)에 의해 축출되었는데, 이 때부터 적대국이었던 프랑스로부터 브랜디 수입이 금지되었다. 그 빈자리를 차지한 것이 바로 진. 한 마디로, 런던 드라이 진의 역사는 1688년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진은 그 극한의 가성비로 런던을 넘어 영국 전체를 삽시간에 휩쓸었다. 와인을 증류한 뒤 오크통에서 숙성해 만드는 브랜디는 지금도 싼 술이 아닌만큼, 그 당시 영국에서도 상당히 고급 주류였다. 하지만 일반 곡물로 만들어지며 숙성도 필요없는 진은 가격도 싼 데다가 알코올 도수는 똑같이 40~50%였기 때문에, 술판이 아주 제대로 벌어지게 된 것이다. 이러한 세태를 비판한 것이 바로 위의 그림, 윌리엄 호가스가 그린 'Gin Lane'이다.

  그림을 자세히 보면 웃기기도 하고 위험해 보이기도 한다. 개랑 같이 뼈다귀를 뜯고 있는 남자, 아이에게 진을 먹이고 있는 사람(...), 술에 취해서 애가 떨어지든 말든 상관도 안 하는 엄마 등등 온통 아사리판인데, 바로 옆에는 같은 작가가 그린 'Beer Street'이 걸려있다. 여기서는 맥주를 마시고 행복하게 하하호호하는 사람들이 그려져 있다. 한 마디로, 진은 마셔봤자 백해무익한 악마의 음료이니, 맥주 마시고 아프지 말고 행복하자는 내용이다. 이런 프로파간다가 필요했을 정도로 당시 진의 확산세와 중독은 심각한 것이었다.



비피터 진에 들어가는 보태니컬(Botanical) 전시관



  하지만 나는 이미 비피터 증류소에서 이것을 보고 있고, 따라서 그러한 프로파간다는 결국 실패했다는 것이 증명이 되었다. 진은 정말 싸구려 저질 술이었지만, 그렇게만 남아있지는 않았다. 쥬니퍼 베리의 독특한 풍미를 필두로 하여 갖가지 보태니컬(Botanical), 그러니까 식물성 재료들을 적극적으로 동원하여 풍미를 올렸고, 어떠한 보태니컬을 어떻게 조합해서 얼마나 사용하느냐에 따라 증류소가 개성을 표출했다. 덕분에 진은 위스키 정도를 제외하면 가장 다양한 브랜드를 보유한 주종(酒種)으로 자리잡았다.






  비피터의 제조과정까지 설명을 듣고 나면, 비피터 진토닉을 한 잔 무료로 마실 수 있다(물론 이것까지 표값에 포함된 거겠지만 그냥 그러려니 하자). 진토닉은 뭐랄까, 술이긴 하지만 술과는 또 다른 느낌이다. 진토닉은 어디에도 속해있지 않다는 느낌이랄까. 이를테면, 소주나 맥주같은 건 차갑게 마시지만 기본적으로 쓰다. 그리고 마시면 뭔가 달아오른다는 느낌. 반대로 위스키나 브랜디같은 고도주는 언더락으로 마시기도 하지만 실온으로 마시곤 하고, 마시면 뭔가 몸이 축 늘어진다는 느낌. 진토닉은 여기서 몇몇가지 요소들만 가져와 새롭게 탄생한 어떤 술이다. 시원하고 새콤달콤하지만 마시면 뭔가 느긋-해진다. 그렇기에 진토닉은 하루를 마감하면서, 혹은 요즘같은 초여름의 더위를 쫓아낼 때 마시기에는 더할나위없이 좋은 칵테일이다.

  하루종일 귓가에 아른거리던 런던 콜링의 멜로디마저 잦아들게 만들 정도로, 비피터에서 마신 진토닉은 다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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