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따, 너는 좋겄다잉. 손가락이 맘대로 돌아가니 얼마나 재밌겄냐.”
한참 피아노를 치다 인기척이 느껴져 뒤를 돌아보면 엄마였다. 부러우면서도 흐뭇한 표정이다. 어릴 적, 피아노는 내 장난감이었다. 심심할 때마다 피아노 앞에 앉았다. 누르면 누르는 대로 정직하게 소리를 내는 피아노가 좋았다.
생각해보면 내가 피아노를 시작하게 된 건 가족의 부재 때문이었다. 아빠는 교통사고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고, 결혼하면서 직장을 그만두었던 엄마는 혼자서 두 아이들을 먹여 살릴 길을 찾아야 했다. 남겨지는 건 언제나 막내인 나였다. 학원 간 오빠와 바쁜 엄마를 기다리며 혼자 집을 지켰다. 창 밖이 어둑해지면 비어있는 등 뒤에 뭐가 있을지 몰라 무서웠던 8살. 무서움에 잔뜩 긴장한 등허리로 거실 벽에 바짝 붙어 앉아 하염없이 리모컨만 돌렸다. 어린 내가 딱히 볼 것도 없던 저녁시간 텔레비전. 그러다 어떤 화면 하나에 손가락이 멈췄다.
우스꽝스러운 표정으로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작은 여자 아이.
바이올리니스트 장영주(사라 장)였다. 요동치는 눈썹, 찡그린 미간, 감은 눈, 집중한 입술. 화려하게 현을 짚어내는 손가락보다, 땀까지 흘려가며 역동적으로 움직이던 활보다, 그 표정이 내 눈을 사로잡았다. 그것은 생소한 것이기에 약간은 충격적이면서도 너무나 매력적이었다. 주변의 상황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이 꼭 감은 두 눈. 무언가에 완벽하게 몰입하고 있는 얼굴. 텅 빈 집에 압도되어 등도 떼지 못하던 어린 내 마음에 또래 아이의 그 모습이 강렬하게 박혔다.
나도 피아노 앞에 앉기 시작했다. 내 마음대로 진탕 피아노를 쳤다. 나의 온 마음을 건반 위에 쏟아붓고 나면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어릴 적 가족의 부재 덕에 이런 좋은 평생 친구를 만나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혼자 집을 지키지 않았다면 8살 어린이가 그런 다큐멘터리를 볼 일도 없었을 테니 말이다.
"우리 엄마 아부지는 지인짜 촌스러웠씨야.”
엄마가 본인의 어린 시절을 떠올릴 때마다 자주 하던 말이다. 부모가 자식이 하고싶어 하는 일을 좀 더 쳐다봐주지 않은 것. 그것이 엄마의 마음 안에 아직도 쓰게 남아있는 모양이다. 어릴 적 엄마는 발레에 적성과 소질을 보였었다. 발레복을 입은 흑백사진 속 엄마는 작고 예뻤고, 똑똑하고 야무져 보이는 소녀였다. 하지만 그 시절, 육 남매 중 두 남동생을 아래로 둔 셋째 딸인 탓에, 생계로 바쁜 부모님의 무관심 탓에 꿈에 대해 생각해 볼 수도 없었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엄마는, 당신 자식은 촌스럽게(엄마의 표현을 빌리자면) 키우지 않으려 애쓰셨다. 혼자 버는 팍팍한 살림에 자식의 꿈을 마음껏 밀어줄 수도 없는 상황이었을 텐데 말이다.
엄마는 피아노를 좋아하는 나를 데리고 음대 교수를 찾아갔다. 사실 피아노 전공은 ‘좋아하는 일이니 한 번 해봐' 하기에는 쉽지 않은 길이지 않나. 예술하는 자식은 돈 먹는 하마라는데, 딸의 재능을 확인받으러 가는 그 각오가 얼마나 비장했을까. 피아노를 전공할만한 손가락이 아니라는 교수의 대답에 엄마는 오히려 가슴을 쓸어내렸을지도 모르겠다.
전공에 대한 마음을 내려놓은 후에도, 엄마는 음악에 대한 나의 마음을 그냥 지나치지않았다. 엄마가 우리 남매를 데리고 목포 KBS홀에 교향악단 연주회를 보러 갔던 날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 날, 지휘자의 손길에 따라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소리를 따라다니느라 눈과 귀가 바빴다. 귓속말로 쏟아내는 딸의 질문에 대답하느라 엄마도 덩달아 바빴다. 뒤에서 아련하게 들려오는 소리는 호른, 나팔같이 생긴 악기는 트럼펫, 플루트 옆은 클라리넷과 오보에, 두구두구 소리를 고조시키는 커다란 북은 팀파니.
폭죽처럼 곳곳에서 터지는 오케스트라의 소리와 그것이 한데 모여 만들어내는 멋진 음악. 고작 8살이었지만 그것이 어찌나 강렬했던지, 아직도 그 날 공연 팸플릿에서 보았던 지휘자 이름이 생각난다. 손가락이 가리키는 대로 소리를 만들어내던 멋진 아저씨, 지휘자 '변욱'. 벼룩이랑 이름이 비슷하다며 오빠와 키득키득 웃으면서도, 엄마에게 건네받은 공연 팸플릿을 한동안 내 방 책장 앞에 올려두었다.
그렇게 나는 처음 클래식 음악을 만났다. 그 후로도 나는 엄마와 함께 뮤지컬을 보러, 오페라를 보러, 연주회를 보러 다녔다. 서울도 아닌 지방, 작은 도시의 두 모녀가 음악을 만나러 참 이리저리도 돌아다녔다. 그렇게 성장한 우리 남매는 대학생이 되었고, 각자 학교 오케스트라에 입단했다. 시골 작은 학교로 음악봉사를 나갔을 때는 정말 감회가 새로웠다. 엄마가 8살 나에게 해줬던 것처럼,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쳐다보는 아이들에게 오케스트라 악기 이름을 하나하나 가르쳐 주었다.
엄마가 남편을 잃은 나이는 지금 딱 내 나이, 서른넷. 남편이 두 딸을 남겨두고 내 곁을 떠난다고 생각하면 상상만으로도 아찔하다. 남편의 갑작스러운 죽음 앞에 두 아이를 책임져야 할 전업주부의 막막함이 눈 앞에 그려진다. 현실적인 것들을 계산하며 한 없이 움츠려 들어야 했을 까만 마음 말이다.
살아온 날들을 돌아보면 처한 상황에 비해 많은 것을 누리고 살았다. 주머니는 가난했을지언정, 자식들의 마음까지 가난하기를 원하지 않았던 엄마 덕분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속 허리띠를 단단히 동여매며 우리 남매 앞에 씩씩하게 섰을 엄마 덕분이다.
엄마는 나이 오십이 넘어서야 못다 한 꿈을 펼쳤다. 막내인 내가 대학에 가자마자, 한국무용을 진지하게 배우기 시작했다. 대회를 나가고, 자격증을 따시더니 학생들을 가르치고, 일본으로 공연도 다녀오셨다. 엄마는 정말 여전하다. 흑백 사진 속 소녀처럼 여전히 작고 예쁘고, 똑똑하고 야무지다. 엄마가 어릴 적, '촌스러운' 부모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엄마처럼 '가난해도 교양 있는' 엄마를 만났다면, 조금 더 일찍 더 많은 세상을 누리며 살아갔을지도 모르겠다. 당신의 딸처럼 말이다.
*커버 이미지 출처: classica. stingra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