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달달 외웠던 원고의 제목이 생각난다.
'똘똘 뭉친 우리 가족'
초등학교 교내 말하기 대회를 위해 엄마랑 몇 번이고 큰 소리로 읽으며 연습했던 원고다. 아빠 없이 엄마, 오빠, 나 세 식구 똘똘 뭉쳐 씩씩하게 잘 산다는 내용이었다. 그러고 보면 어렸을 때부터 아빠가 없다는 것에 별로 콤플렉스가 없었다. 어떤 사람들은 아빠 없는 것을 들키는 게 죽기보다 싫었다는데 난 그렇지는 않았다. 딸에게 콤플렉스를 갖지 않게 하려는 엄마의 정공법이었을까. 오히려 전교생 앞에서 우리 가족은 아빠가 없다고 큰 소리로 외쳤으니 말이다.
똘똘 뭉친 우리 가족이라지만 몸의 거리를 따지자면 우리 가족은 참 가까울 새가 없었다. 오빠가 고등학생이 되면서 매일 하던 야간 자율학습 탓에 얼굴 볼 일이 없었고, 내가 고등학생이 되자 오빠는 서울로 대학을 갔다. 그리고 엄마 옆에 하나 남은 나 역시 대학생이 되면서 우리 집을 떠났다.
모두가 알다시피 1인 가구라도 갖출 건 다 갖춰야 한다. 사소한 생활용품부터 소형가전까지. 어느 날은 머리를 말리다 헤어드라이기를 보는데 마음속에서 무엇인가 울컥했다. 엄마가 보고 싶어 져 당장 전화를 걸었다.
"엄마, 우리 집은 식구도 적은데 헤어 드라이기까지 3개 여야겠어? 나중에 우리 다시 모여 살게 되면 한 집에 드라이기만 3개야. 같이 살았으면 드라이기도 하나만 사고, 얼마나 좋아? 우리 빨리 다 같이 모여 살아야 돼."
엄마에겐 얼른 같이 모여 살자 해놓고 정작 나는 남들보다 이른 나이에 결혼했다. 그리고 남편 따라 넓디넓은 태평양을 건너왔다. 나는 벌써 7년째 캐나다에 살고 있다. 이제는 가족들의 인사도 '언제 와?'에서 '오긴 오는 거니?'로 바뀐 지 오래다. 멀리 있지만 여전히 서로의 생일 때 카톡으로 축하인사를 전하고, 할머니와 삼촌을 보고 싶다는 아이들과 함께 영상통화도 한다. 해외에 살면서 마음이 바닥까지 내려갔을 때에도 결국 잡아달라 손 내밀 수 있었던 건 가족뿐이었다. 오고 싶다고 쉽게 올 수도 없을 만큼 우리는 각자 멀리 떨어져 살지만, 세 사람의 마음만은 여전히 가까이 있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옛날부터 함께 모여 이야기하기를 좋아했다. 식사 후, 엄마가 과일접시를 들고 거실 소파에 앉으면 다 같이 거실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별 영양가도 없는 시시콜콜한 이야기. 때로는 서로를 놀리기 바쁘고, 그러다 놀림이 과해지면 마음 상하는 일도 생겼다. 그래도 좋다. 사과하면 또 금방 풀어지는 게 가족이니까. 가족이 함께 모일 수 있고,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웃을 수 있다는 것은 작지만 확실한 '찐' 행복이다.
며칠 전, 캐나다의 추수감사절이 되어 오래간만에 우리 집 식탁에 힘을 주었다. 캐나다에 가족이라곤 우리 네 식구뿐이라 커다란 칠면조 고기 대신 스테이크를 구웠다. 제철 호박으로 샐러드를 만들고 가을 사과를 짜서 만든 애플사이더도 식탁에 올렸다. 무엇보다 가족이 모두 모이는 명절에 빠질 수 없는 것은 디저트 타임이다. 우리 가족도 당근 케이크를 나누어 먹으며 각자 감사한 것이 무언인지 이야기하기로 했다.
"I'm thankful for the earth and my house!"
(지구랑 우리 집이 있어서 감사해!)
"I'm thankful for my family!"
(우리 가족이 있어서 감사해!)
"I'm thankful for my sister!"
(언니가 있어서 감사해!)
"I'm thankful for this cake!!"
(이 케이크가 있어서 감사해!!)
식사시간마다 말하기 바빠 엄마의 잔소리를 듣는 수다쟁이 딸들. 마음껏 말할 수 있는 디저트 타임이 오니 내내 싱글벙글하다. 물론 달콤한 케이크 덕도 있을 거다. 아이들은 한 번 웃음이 터지면 숨이 넘어가도록 웃는다. 그 웃음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부모는 행복해진다. 달달한 케이크도 너무 좋지만 아이들이 웃는 얼굴과 소리가 그 시간을 달콤하게 기억하게 한다.
"우리, 외할머니한테 전화해 보자!"
우리끼리 달달한 시간을 보내고 나니 친정엄마, 친정오빠가 생각났다. 식탁에 둘러앉은 남편과 두 딸의 모습이, 거실에 둘러앉아 하나마나 한 이야기로 낄낄대던 어릴 적 우리 세 식구를 떠올리게 했나 보다.
"할머니! 우리 오늘 땡스기빙 데이(Thanksgiving day)에요. 한국 추석처럼요!"
"할머니! 나 한국 가서 추석 되면 한복 입어도 돼요?"
"할머니! 나 할머니 집에서 송편 만들어도 돼요?"
"송편 만들 때 핑크색으로도 만들 수 있어요?"
"그 막대기 던지는 게임(윷놀이라고 몇 번이나 가르쳐주었거늘ㅎㅎ)도 해도 돼요?"
전화할 때마다 '한국 가면 할머니와 해야 할 일 리스트'가 쌓인다. 지금 우리가 한국에 있었다면 좋았을텐데. 그랬다면 한창 귀여운 4살, 6살 아이들의 예쁜 짓으로 우리 엄마가 얼마나 행복할까? 캐나다에 살면서 가장 죄스러운 것은 손녀들의 커 가는 모습을 양가 부모님들께 보여드리지 못한다는 점이다.
"아야, 시방 김서방 일이 얼마나 남았다했냐잉?"
할머니와 아이들의 폭풍 같은 수다타임이 끝나야만 드디어 내 차례가 온다. 친정엄마와의 전화는 늘 '그래서 언제 오는지'로 마무리된다. 내가 한국에 가면 엄마의 외로움이 조금 덜어지려나. 빨리 모여 살고 싶다 하던 대학생 딸은 어째 점점 더 멀어지기만 했다. 코로나 때문에 서울 사는 오빠도 추석에 못 내려갔다는데 엄마의 추석이 어떤 모습이었을지 마음이 쓰인다. 혼자 무엇을 먹고, 무엇을 했을지 하릴없이 미안한 마음뿐이다. 추석 연휴 삼일 내내 전화할 걸 그랬다. 벌써 일주일이나 지난 추석을 캐나다 추수감사절이 되어서야 후회하는 나다. 꼭 이렇게 내 딸들의 행복을 다 챙기고 나서야 엄마의 외로움이 보인다.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더니 나도 어쩔 수 없는 부모인가 보다.
멀리 이 땅에서 우리 가족의 행복이 커지면 커질수록 엄마의 외로움이 선명해진다. 손녀들이 더 많이 커 버리기 전에 하루빨리 우리 엄마 집 거실에 앉아있고 싶다. 내 어릴 적처럼 과일이든, 내 딸이 원하는 핑크색 송편이든, 거실 테이블에 올려 두어야지. 포크로 하나씩 콕콕 집어먹으며 영양가 없는 이야기들로 깔깔대며 웃고 싶다. 나와 내 남편, 내 두 딸, 그리고 우리 오빠가 깔깔 웃어대는 모습만 보아도 나처럼 행복해질 우리 엄마니까.
*커버 이미지 출처: firstchoicepow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