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문명의 십자로
이 부록은 연재 중인 소설 《소녀, 콘스탄티노플을 가다》의 역사적 배경을 소개합니다. 동로마(비잔티움) 제국의 고대 도시들, 주요 인물들, 화려한 건축물, 의상과 문화, 정치·종교적 논쟁, 무기와 전쟁 등의 역사적 사실들을 알기 쉽게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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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톨리아: 거대한 문명의 십자로
아나톨리아, 오늘날 튀르키예의 광활한 대지를 이루는 거대한 반도. 유럽과 아시아, 두 대륙이 숨을 맞대는 곳. 서로 다른 세계가 충돌하고 융합하는, 문명의 십자로.
고대로부터 중세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제국이 이 땅을 탐했다. 히타이트의 전차가 달렸고, 페르시아의 군단이 행진했으며, 알렉산더 대왕의 팔랑크스가 먼지를 일으켰다. 로마의 독수리 깃발이 펄럭였고, 비잔티움의 십자가가 빛났다. 흥망성쇠의 파도가 끝없이 밀려왔다 물러가기를 반복했다. 아나톨리아는 그 모든 역사를 품은 채, 묵묵히 서 있었다.
이 반도는 서쪽 에게해의 푸른 물결에서 동쪽 안티타우루스 산맥의 험준한 봉우리까지 뻗어 있다. 북으로는 흑해의 어두운 파도가 해안을 적시고, 남으로는 지중해의 따스한 햇살이 항구를 비춘다. 이 광대한 땅에서 역사는 쉼 없이 흘렀고, 문명은 꽃피고 시들기를 거듭했다. 이 순환을 이끈 것은 부와 인구가 집중된 지중해 연안의 항구도시들이었다.
'아나톨리아'라는 명칭은 고대 그리스어 '아나톨레' Ἀνατολή (Anatolḗ)에서 유래하였으며, 이는 '해가 뜨는 곳' 즉, 동방의 땅을 의미했다. 또한 고대 그리스어로 '소아시아' Μικρὰ Ἀσία (Mikrà Asía)라고도 불렸다. 고대 후기 그리스인들은 '소아시아'라는 명칭을 선호했지만, 로마 제국 행정부는 '아나톨레'를 공식적으로 사용하였다.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그의 유명한 저서 <역사>를 통해 이 지역을 상세히 묘사했다. 그는 문화, 언어, 종교적 관습의 다양성에 주목했다. 스스로가 아나톨리아 남서부 출신으로서, 고향 지역의 지리와 역사에 대한 깊은 지식을 보유하고 있었던 그는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을 배경으로 리디아인, 카리아인, 리키아인 등 다양한 민족의 문화와 풍습을 상세히 기록하였다. 특히 리디아 왕국의 흥망성쇠와 크로이소스 왕의 일화, 그리고 이오니아 반란에 대한 그의 서술은 아나톨리아 지역사를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한 사료로 평가된다.
리디아의 크로이소스 왕은 당대 최고의 부와 권력을 자랑하며 아테네의 현자 솔론에게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인지에 대해 질문하였다. 솔론은 인간의 행복은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알 수 없는 것이라는 경고와 함께 왕의 오만을 경계했다. 실제로 크로이소스 왕은 페르시아 키루스 2세와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포로로 잡혀 화형에 처해질 위기에 처하자 비로소 솔론의 말을 상기하였으며, 이로써 인간의 운명과 부(富)의 덧없음이 입증되었다.
이오니아 반란은(기원전 499-493년) 소아시아 서부 연안의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페르시아 제국의 억압적인 통치와 참주 정치에 저항하며 일으킨 분쟁이다. 아테네와 에레트리아 등 그리스 본토 도시들의 군사적 지원을 받았으나, 결국 반란의 중심지였던 밀레토스가 함락되고 라데 해전에서 결정적으로 패배하면서 페르시아에 의해 진압되었다. 이오니아 반란은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페르시아 제국 다리우스 1세의 분노를 사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의 직접적인 시발점이 되었으며, 이 긴 전쟁은 유명한 '마라톤 전투', '살라미스 해전'등의 전투를 통해 그리스 도시연합의 승리로 끝났다.
로마의 확장
이 거대한 반도의 역사는 한 편의 서사시와도 같다. 수많은 제국이 이 땅에서 번성했고, 흥망성쇠의 파도가 끝없이 밀려왔다 물러가기를 반복했다.
기원전 17세기, 아나톨리아 중부의 광활한 고원에 히타이트 제국이 자리를 잡았다. 그들은 철기 문명을 꽃피우며 고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찬란한 문명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히타이트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 뒤, 이 땅은 다시 한번 분열의 시대를 맞이했다. 여러 왕국이 흥망을 거듭하는 가운데, 서부 아나톨리아에 자리 잡은 리디아 왕국은 세계 최초로 금속 화폐를 주조하며 상업과 무역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이후 동방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페르시아 제국이었다. 아케메네스 왕조의 키루스 대제와 그의 후계자들은 아나톨리아 전역을 정복하며 이 땅을 거대한 제국의 일부로 편입시켰다.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의 포화 속에서,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한 그리스 도시국가 연합은 페르시아의 거대한 군세에 맞서 싸웠다. 전쟁이 끝난 뒤, 아나톨리아 서부 연안의 이오니아 도시들은 페르시아의 멍에에서 벗어나 자유를 되찾았다. 하지만 이것은 부분적인 해방에 불과했다. 아나톨리아 내륙 깊숙한 곳까지 그리스의 영향력이 미치지는 못했던 것이다.
진정한 변화는 오히려 서쪽에서 찾아왔다. 바로 로마였다. 이탈리아 반도의 작은 도시국가에서 시작하여 지중해를 아우르는 제국으로 성장한 거대한 힘이 동방으로 분출되기 시작했다.
아나톨리아가 로마의 품으로 들어오는 과정은 복잡했다. 그것은 군사적 승리와 외교적 협상, 때로는 예상치 못한 행운이 복합적으로 얽힌 장대한 서사였다. 초기 로마의 동방 진출은 알렉산드로스 대제의 후계자들이 세운 헬레니즘 왕국들과의 충돌로 시작되었다. 기원전 2세기, 로마 군단은 시리아를 근거지로 삼아 동방을 호령하던 셀레우코스 제국과 맞붙었다.
아나톨리아 서부 마그네시아 평원에서 운명적인 전투가 벌어졌다(기원전 190년). 로마의 정예 군단과 셀레우코스 제국의 대군이 격돌했고, 전투는 로마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났다. 이듬해 체결된 아파메아 조약은 동방의 판도를 완전히 뒤바꾸었다. 셀레우코스 제국은 아나톨리아 서부에서 완전히 축출되었고, 로마는 승리의 과실을 동맹국들과 나누며 이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확고히 했다.
그러나 로마가 아나톨리아를 직접 지배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전쟁이 아니라 한 왕의 유언에서 비롯되었다. 기원전 133년, 페르가몬 왕국의 마지막 군주 아탈로스 3세가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언장에는 놀라운 내용이 담겨 있었다—왕국 전체를 로마 공화정에 증여한다는 것이었다. 이로써 로마는 한 방울의 피도 흘리지 않고 아나톨리아 서부의 가장 부유하고 문화적으로 찬란한 지역을 손에 넣었다. 새롭게 설립된 아시아 속주는 곧 로마 제국에서 가장 중요한 영토 중 하나가 되었다.
하지만 아나톨리아 전역을 완전히 로마화하는 데에는 또 다른 세기가 필요했다. 기원전 1세기 초, 흑해 연안의 폰투스 왕국에서 한 야심찬 군주가 등장했다. 미트라다테스 6세—그는 로마에 대한 반감으로 불타올랐고, 소아시아 전역의 반(反)로마 정서를 결집시켜 제국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이것이 장장 수십 년에 걸친 미트라다테스 전쟁의 시작이었다.
로마는 이 위협을 진압하기 위해 당대 최고의 장군들을 차례로 파견했다. 독재관 술라가 먼저 출정했고, 이어서 폼페이우스 마그누스가 최종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폰투스 왕국은 멸망했고, 미트라다테스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 이 전쟁을 통해 로마의 독수리 깃발은 아나톨리아 동부 깊숙한 곳까지 펄럭이게 되었다. 갈라티아를 비롯한 마지막 남은 소왕국들도 차례로 로마의 속주로 편입되었다.
결국 아나톨리아는 거의 전역이 로마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되었다. 군사적 정복, 왕의 유산 상속, 그리고 정치적 합병—이 모든 수단을 통해 로마는 동방의 이 거대한 반도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이 땅은 앞으로 천 년 이상 로마 문명의 심장부로 남게 될 것이었다.
비잔티움 제국과 아나톨리아
로마 제국이 동서로 나뉘는 역사적 분기점을 지나면서, 아나톨리아는 동로마 제국 (후세에 비잔티움 제국으로 불리게 될)의 심장부로 자리 잡았다. 또한 제국의 생명선이자 문명의 보루가 되었다.
성서 속 사도 바울이 이 땅을 걸으며 복음을 전한 이래, 아나톨리아는 기독교 신앙이 가장 먼저 뿌리내린 땅이 되었다. 에페수스의 거리에서, 안티오키아의 광장에서, 니케아의 회당에서 새로운 신앙이 퍼져나갔다. 특히 성서의 요한계시록에 언급된 에페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피아, 라오디게아의 일곱 교회가 이 땅에 세워졌으며, 이 교회들은 초대 기독교의 희망과 고난을 상징하는 중심지가 되었다. 4세기에 이르러 서부와 중앙 아나톨리아는 이미 압도적으로 기독교화된 지역으로 변모하였고, 거리마다 그리스어가 울려 퍼지는 헬레니즘과 기독교가 융합된 독특한 문명권을 형성하였다.
비잔티움 시대 아나톨리아의 번영은 눈부셨다. 후기 로마 제국의 여러 속주 가운데서도 이곳은 단연 가장 부유하고 인구가 밀집된 지역이었다. 4세기와 5세기를 거치며, 성지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순례자들의 끝없는 행렬이 아나톨리아 반도를 가로질렀다. 순례의 길은 곧 번영의 길이었다. 아소스, 에페수스, 밀레투스, 니케아, 페르가뭄, 프리에네, 사르디스, 아프로디시아스. 이 찬란한 이름들은 당대 지중해 세계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도시들의 명단이었다.
소설 속 주인공 이레네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순례자들이 거치는 한 마을에 살고 있었다..
그러나 5세기 중반, 미묘한 변화의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도시의 화려함은 서서히 빛을 잃어가게 된다. 무엇이 이 역설적인 변화를 가져왔는가? 역사가들은 여전히 논쟁 중이다. 이후 아나톨리아 지역 도시들이 쇠퇴한 원인을 두고 다양한 가설이 제시되었다. 541년 제국 전역을 휩쓴 유스티니아누스 역병, 602년부터 628년까지 계속된 비잔티움-사산조 페르시아의 대전쟁, 그리고 634년부터 638년까지 이어진 레반트 지역의 아랍 침공 등, 이 모든 재앙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여기서 혼동하지 말아야 할 점이 있다. 사산조 페르시아는 성서에 등장하거나 영화 '300'에서 묘사된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와는 전혀 다른 제국이다. 두 제국 모두 페르시아인—오늘날의 이란인—이 통치했지만, 시대와 성격이 판이했다. 아케메네스 왕조가 기원전 6세기부터 4세기까지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들과 패권을 다투었다면, 사산조 페르시아는 224년부터 651년까지 존속하며 로마 제국, 그리고 그 후계자인 비잔티움 제국과 정면으로 맞섰다. 사산조는 또한 조로아스터교를 국교로 삼아 종교적 정체성이 훨씬 강한 제국이었다. 이들은 단순한 정치적 경쟁자가 아니라, 문명과 신앙의 차원에서 비잔티움과 대결한 영원한 숙적이었다.
4화에서 묘사된 비잔티움-사산조 페르시아 전투 장면은 이 오랜 전쟁의 일부이다.
이슬람의 침입
7세기 중반, 제국의 운명이 걸린 순간이 찾아왔다. 아라비아 반도에서 새롭게 등장한 이슬람 세력은 번개와 같은 속도로 비잔티움 제국의 동방 영토를 위협하였다. 수 세기에 걸쳐 모든 인적, 물적 자원을 쏟아붓고 전쟁을 치른 비잔티움과 사산조 페르시아 양국은 갑자기 등장한 신흥 강호를 막을 힘이 없었다. 이슬람 제국은 재빨리 어부지리를 취했다. 먼저 페르시아의 수도 크테시폰이 이슬람 군대에게 637년에 함락당했다. 비잔티움 황제와 원로원은 이제 자신들의 차례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나톨리아는 제국 최후의 보루가 되었다.
이러한 절박한 상황에서 비잔티움 제국은 과감한 행정 개혁을 단행하였다. 제국의 생명줄인 아나톨리아를 다수의 군관구, 즉 '테마(Thema)'로 점진적으로 재편한 것이다. 이는 군사적 방어와 민정 통치를 하나로 결합한 혁명적인 시스템이었다. 각 테마는 독자적인 군사력과 행정 체계를 갖춘 자치 지역으로 기능하였으며, 그중에서도 중앙 아나톨리아에 설치된 아나톨리콘 테마는 제국 방어의 핵심 거점이자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한 지역으로 자리 잡았다.
테마 제도의 독창성은 병사들의 충원 방식에 있었다. 과거 로마 제국처럼 금화로 용병을 고용하는 대신, 비잔티움 제국은 병사들에게 토지를 지급하였다. 이들은 평시에는 자신의 땅을 경작하며 생계를 유지하고, 전시에는 스스로 무장하여 제국을 방어하는 자영농 병사가 되었다. 이는 제국의 재정 부담을 획기적으로 줄이면서도, 동시에 병사들에게 자신이 지키는 땅에 대한 애착과 책임감을 심어주었다.
각 테마를 통치하는 총독 ‘스트라테고스’는 행정권과 군사 지휘권을 동시에 장악한 지역의 실질적 통치자였다. 적의 침입이 발생하면 중앙 정부의 승인을 기다릴 필요 없이 즉각 병력을 동원하고 방어 전략을 수립할 수 있었다. 이러한 신속한 대응 체계는 광활한 제국 영토를 효율적으로 방어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테마 제도는 비잔티움 제국이 서로마 제국의 몰락 이후에도 천 년 가까이 생존할 수 있었던 비결 중 하나였다. 재정적으로 파산 직전이었던 제국은 이 시스템을 통해 중앙 정부의 부담을 대폭 경감시키면서도 강력한 방어 체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결국 이 혁신적인 군사-행정 제도는 비잔티움 제국이 1453년 콘스탄티노플이 최종적으로 함락될 때까지 생명을 이어갈 수 있도록 만든 핵심 요인이 되었다.
11세기, 중앙아시아로부터 불어온 새로운 바람이 아나톨리아의 운명을 바꾸기 시작했다. 셀주크 투르크족이 동쪽 국경을 넘어 이 고대의 땅으로 진출하면서, 천 년 가까이 그리스-로마 문명권에 속해 있던 아나톨리아는 서서히 그 문화적 정체성에 균열을 맞이하게 된다. 이들의 도래는 단순한 군사적 침입이 아니라, 언어와 종교, 생활 방식이 근본적으로 다른 문명의 이주였다. 이어서 14세기 초, 작은 변방의 전사 집단에서 시작한 오스만 투르크는 뛰어난 군사 조직과 전략적 외교, 그리고 비잔티움 제국의 쇠락이라는 시대적 기회를 포착하며 아나톨리아 반도의 새로운 주인으로 떠올랐다.
이 격변의 세기들 동안 아나톨리아의 인구 구성은 극적으로 변화하였다. 한때 그리스어를 사용하고 정교회 신앙을 따르던 이 땅은, 점진적이면서도 돌이킬 수 없는 방식으로 투르크어를 말하고 이슬람을 믿는 무슬림 인구가 다수를 차지하는 지역으로 탈바꿈하였다. 이는 정복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이주, 개종, 혼인, 그리고 문화적 동화라는 복합적인 역사적 과정의 산물이었다.
참고문헌
Aleksandr P Každan (ed), The Oxford Dictionary of Byzantium (Oxford University Press 1991) 205-207.
John F Haldon, The Palgrave Atlas of Byzantine History (Palgrave Macmillan 2010) 6.
사진 출처
커버: Unsplash의 Süleyman Can Sezgi
By Didier Descouens, Public Doma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