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제국이 남긴 마지막 예술
모자이크, 로마제국이 남긴 마지막 예술
"오늘날 우리에게 남은 비잔틴인의 천재성을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유일한 것은 그들 예술의 찬란함뿐이다. 그리스도교의 역사, 아니 감히 덧붙여 말하건대 세계의 어떤 다른 종교의 역사에서도 이토록 깊은 영성을 작품 속에 불어넣으려 애쓴 예술가들은 없었다."
- 존 줄리어스 노리치, Byzantium: The Early Centuries (Penguin 1990).
비잔틴 제국 시대에 발전한 종교 미술의 형태는 주로 성화와 모자이크였다. 성화는 주로 나무 패널에 그려진 성스러운 이미지를 의미하며, 모자이크는 돌이나 유리 등 다채로운 조각인 테세라(tessera)를 맞추어 만든 그림을 의미한다. 이들은 신학적 메시지와 제국의 위엄을 시각적으로 전달하는 핵심적인 예술 형식이었으며, 당시 사람들에게 신성한 영역으로 향하는 '창'으로서 받아들여졌다. 회화와 공예를 포함한 비잔틴 시대 모든 성상(聖像) 예술을 흔히 이콘(icon)이라고 부른다.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발전한 초기 비잔틴 예술은 로마 제국의 고전 예술 유산을 계승하면서도 기독교적 가치와 영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독자적인 양식을 확립했다.
초기 비잔틴 예술의 태동과 특징 (330-565년)
초기 기독교 미술은 이미 로마 제국 전역에서 번성하고 있었다. 시리아의 두라 유로포스 세례당 벽화(232년)와 로마 카타콤의 벽화(2-4세기)는 고전적인 예술 형식을 차용하여 성경의 내용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이후 313년 밀라노 칙령, 그리고 380년 테살로니카 칙령으로 로마 제국에 기독교가 공인되면서, 청동 및 대리석 조각상 생산이 줄어들고, 건축 장식이나 성소 가림막 조각에 전문성이 집중되기 시작했다. 특히 모자이크, 스테아타이트(활석), 상아 공예와 같은 분야가 발전했으며, 당시 에나멜 작업은 숙련된 기술의 상징이었다.
330년,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그리스 고대 도시 비잔티움(현 이스탄불)을 새로운 수도로 정하고 자신의 이름을 딴 콘스탄티노플로 개명했다. 이 도시는 처음부터 기독교 색채가 짙었다. 5세기 중반, 비잔틴 예술은 수도를 넘어 지방 소도시로 확산되었다. 초기 비잔틴 예술은 고전 그리스-로마 예술의 영향을 받았으나, 기독교 사상이 깊어지면서 이교적 요소를 거부하고 독자적인 길을 걸었다. 비잔틴 예술가들은 그리스-로마 조각상을 변형하여 기독교적 가치를 표현하는 데 집중했다.
소설 속 트리보니안은 성화가로 등장한다.
유스티니아누스 시대와 그 이후: 성상 예술 확산과 반대
527년에 즉위한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통치 시기는 초기 비잔틴 예술의 정점이었다. 그의 가장 위대한 업적은 성 소피아 대성당의 재건(532-537년)이다. 이 건축물은 본래 이전 황제 시대에 목조로 건축된 성당이었으나, 그는 수많은 전문가와 막대한 자재를 동원해 거대한 돔과 대리석을 갖춘 지금의 형태로 완전히 재건했다. 당시 아야 소피아는 인물 중심의 모자이크 대신 십자가 이미지로 내부를 장식했다. 이는 아직 성상에 대한 비잔틴인들의 관습이 확립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초대교회 신앙을 이어받은 콘스탄티노플의 많은 기독교인들은 성상에 거부감을 가졌다. 그러나 농촌과 변경 지역 주민들의 일상에서는 달랐다. 성상은 점차 기도와 숭배의 도구로 받아들여졌고, 원형이 성상 안에 영원히 존재한다는 믿음이 서서히 퍼져나갔다.
이후 그리스도의 본질을 둘러싼 신학적 논쟁이 활발해지면서 예술에도 변화가 나타났다. 692년 퀴니섹스트 공의회 법령 82조는 비잔틴 미술사의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이 법령은 그리스도를 상징이 아닌 인간의 형상으로 표현하도록 규정했다. 구체적으로 이전까지 그리스도를 '어린양'으로 묘사하던 관행을 금지하고, 대신 인간 형상(human form)을 그리도록 명시했다. 그리스도가 실제 육체를 가진 인간으로 이 땅에 왔음을 강조하고, 신앙의 구체성을 시각적으로 표현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나온 결정이었다. 이로써 비잔틴 미술은 상징적 표현에서 벗어나 인간 형상 중심의 성화가 주류가 되었다.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모두 강조하는 신학적 맥락이 종교 예술의 형태로 구현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제국 곳곳에서 이를 우상 숭배로 보는 비판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신학적 논쟁은 8세기 초 본격화되어 성상금지(Iconoclasm) 운동으로 이어졌다. 비판적인 성직자들은 성상 숭배가 구약성서 십계명의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구절에 위배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또한 많은 민간 풍습에서 성화나 조각들이 단순히 신이나 성자를 설명하는 도구를 넘어 '보이는 신' 그 자체로 숭배받는 현실을 지적했다.
황실에는 황실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이들은 성상 숭배 금지가 정치적으로 가져올 여러 정치적 이득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첫째, 성상을 옹호하며 세력을 키워가던 수도원과 성직자 계층을 견제할 수 있었다. 둘째, 비잔티움 제국에서 전통적으로 강력했던 황제의 통제권을 다시 한번 강화할 수 있었다. 셋째, 당시 동쪽 국경지대에서 강대한 세력으로 부상하던 이슬람의 우상숭배 비판에 대응할 수 있었다.
결국 730년 레오 3세 황제가 시작한 1차 성상 금지 운동(730~787년)은 성상 숭배를 우상 숭배로 규정하고 공식적으로 금지했다. 이는 비잔틴 제국 내에서 '성상 금지주의자'와 '성상 옹호주의자’ 간의 극심한 갈등을 초래했다. 이 기간 동안 수많은 성상, 모자이크, 프레스코화가 파괴되었으며, 예술가와 성직자들은 박해를 받았다.
787년 제2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성상 숭배가 일시적으로 복원되었으나, 814년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의 주도로 2차 성상 금지 운동(814~843년)이 발생했다. 이 두 번째 운동은 첫 번째보다 덜 격렬했지만, 여전히 제국 전역에 걸쳐 성상 숭배에 대한 무분별한 흐름에 제동을 걸었다.
성상 금지 운동 기간 동안 종교적 인물이나 상징 묘사가 금지되면서, 자연 풍경, 동물, 식물, 기하학적 무늬, 세속적 장면을 그린 작품들이 일시적으로 증가했다. 비잔틴 미술의 주제가 세속적 영역으로 확장되는 계기였다. 그러나 843년 성상 논쟁이 최종적으로 '성상숭배' 쪽으로 결론나자, 역설적으로 비잔틴 미술은 인간 형상과 성인 묘사에 이전보다 더욱 집중하게 되었다. 이콘은 더 엄격한 신학적 규칙과 도상학적 양식에 따라 제작되었고, 이는 동방 정교회 예술의 표준으로 확립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흔히 사용되는 <성상 '파괴 -clasm’ 운동>이라는 용어 자체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최근 레슬리 브루베이커(Leslie Brubaker, 영국 버밍엄대) 같은 학자들은 이 용어의 부정적 뉘앙스를 비판하며 오히려 금지, 정화, 재창조와 같은 의미로 이를 해석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따라서 한글 번역시 <성상금지운동>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한 것으로 보인다.
이레네와 아르마투스는 성상반대론자로 그려진다.
비잔틴 모자이크: 영광과 기술의 결합
모자이크는 돌, 유리, 타일 등 다채로운 조각인 테세라(Tessera)를 맞추어 만든 그림이다. 비잔틴 시대에 모자이크는 신학적 메시지와 제국의 위엄을 시각적으로 전달하는 핵심 예술 형식이었다. 6세기 초에 확립된 비잔틴 모자이크 기법은 메소포타미아에서 시작된 오랜 역사를 지니며, 헬레니즘, 로마, 동방의 요소가 융합되는 문화적 배경 속에서 웅장하고 숭고한 예술로 발전했다.
초기 비잔틴 모자이크는 작은 각추 형태로 정교하게 자른 색대리석을 주 재료로 사용했다. 그러나 재료의 다양성이야말로 비잔틴 모자이크의 큰 특징이었다. 뒷면을 도금한 유리, 다양한 색상의 유리, 도자기 등 다채로운 소재를 활용해 화려한 시각적 효과를 창출했다. 특히 금박을 입힌 유리 테세라는 작품의 귀중함과 후원자의 헌신을 드러내고, 천상의 빛을 전달하며, 인물들을 현실 세계에서 천상의 세계로 격상시키는 역할을 했다. 얼굴 표현에는 다양한 색상의 천연석 테세라와 투명 유리를 사용했으며, 얼굴과 옷의 큐브 크기를 다르게 하여 세밀함을 더했다. 살을 표현할 때는 테세라의 선으로 모델링하는 대신 대비되는 색상 패치를 사용해 입체감을 부여했다. 고전기 작품이 주로 바닥 장식에 쓰인 것과 달리, 비잔틴 모자이크는 궁정과 사원의 벽면과 천장을 장식하여 예배 공간에 장엄함을 부여했다.
이 과정은 고도의 기술과 대규모 인력을 필요로 했다. 소설 속 성화가 트리보니안과 같은 예술가 집단은 수천 개의 테세라를 젖은 석회벽(lime plaster) 위에 줄 맞춰 하나하나 심어 넣었다. 이는 비계(scaffolding) 설치, 회반죽 혼합 및 적용, 유리와 돌 테세라 공급 등 복잡하고 조직적인 대규모 작업 팀을 필요로 했다. 대규모 프로젝트의 경우, 테세라를 현장에서 직접 제작하기도 했다. 하지만 제작비가 많이 들었기 때문에 지방에서는 모자이크와 유사하게 동방적이고 도식화된 표현 방식을 따르는 프레스코 벽화가 보급되었다.
비잔틴 모자이크의 뛰어난 사례는 이탈리아 라벤나에서 찾아볼 수 있다. 6~7세기에 건축된 아리우스파 세례당, 산 비탈레 성당, 성 아폴리나레 인 누오보 성당, 성 아폴리나레 인 클라세 성당이 대표적이다. 이 작품들은 재료의 제약 속에서도 색의 선과 면 대비, 금색 배경, 뛰어난 조형미를 조화롭게 이루어냈다. 특히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모자이크 장인들을 라벤나로 파견해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와 수행원들>과 <테오도라 황후와 수행원들> 같은 걸작을 탄생시켰다. 이 작품들은 6세기 모자이크 예술의 최고봉으로 평가된다.
비잔틴 예술은 고도로 숙련된 기술과 엄격한 종교적 규범에 따라 제작되었다. 이 과정은 단순한 예술 창작을 넘어 신성한 헌신 행위로 여겨졌으며, 예술가들은 기도와 금식으로 작업을 시작하곤 했다. 성화 제작은 도제 시스템을 통해 이루어졌고, 기술과 도구는 아버지에서 아들로 이어지는 가족 사업 형태로 전수되었다. 예술가들은 익명으로 활동하며 개인적 표현보다는 신학적 정확성과 전통적 규범을 따르는 데 중점을 두었다.
비잔틴 예술이 후대에 미친 영향
비잔티움 제국은 멸망했지만 그 예술은 사라지지 않았다. 르네상스 시대를 연 선구자 단테 알리기에리(1265–1321)는 일찍이 라벤나의 모자이크를 "지상낙원", "색채의 교향악"이라 극찬했다. 동방 정교회 문화권, 특히 러시아, 그리스, 발칸반도의 예술가들은 비잔틴 예술의 직접적 후계자로서 이후 수백 년간 그 양식을 이어갔다.
서방에서도 그 맥이 완전히 끊기지 않았다. 14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 초기 화가들은 황금 배경, 엄숙한 정면성, 도식화된 인물 표현 같은 비잔틴 도상학적 요소를 작품에 반영했다. 이들은 고대 양식과의 단절을 수 세기 동안 지연시켰다. 근현대를 거치며 비잔틴 양식은 주류 서양 미술사에서 한동안 잠복했다. 하지만 19세기 말, 구스타프 클림트를 비롯한 상징주의와 아르누보 화가들이 평면성, 강렬한 장식성, 금박의 영적 광채를 현대적 미학으로 재해석하면서 비잔틴 모자이크의 여러 요소가 다시 세상 밖으로 나왔다. 20세기 초, 비잔틴 양식은 아방가르드 미술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영감의 원천으로 다시금 각광받았다.
참고 자료
커버 이미지: 갈라 플라치디아 황후 영묘의 천장 모자이크, 이탈리아 라벤나, AD 425-450년 제작 By Petar Milošević - Own work, CC BY-SA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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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t'Apollinare Nuovo - 54032137080.jpg', Author: bradhostetler, License: CC BY-SA 2.0.
'Deesis mosaic Hagia Sophia 2.jpg', Author: Till Niermann, License: CC BY-SA 3.0 unpor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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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ustav Klimt - 'The Kiss', Google Art Project, Public Domain.
By Gustav Klimt - 'Portrait of Adele Bloch-Bauer I' Public Doma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