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법 대전의 숨은 설계자
트리보니안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의 위대한 업적은 흔히 황제 개인의 공으로 여겨지지만, 그 뒤에는 여러 뛰어난 인물들의 헌신적인 노력이 있었다. 황제는 비전을 제시했지만, 그 비전을 현실로 만든 것은 제국의 행정가들과 학자들이었다.
특히, 로마법을 집대성한 <로마법 대전(Corpus Iuris Civilis)>의 편찬은 유스티니아누스 시대의 가장 중요한 유산이다. 이 법전은 천 년에 걸친 로마 법학의 지혜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보존한 문명사적 성과였다. 후대 유럽의 법률 체계는 물론, 근대 민법의 토대가 된 이 작업의 중심에는 위대한 법률가이자 기획자였던 트리보니안(Tribonian)이 있었다.
소설 속 소년 트리보니안은 성화 화가로 등장하지만, 나중에 원래 역사대로 법무장관이 된다는 설정이다.
제국 법의 숨은 설계자
트리보니안은 팜필리아(Pamphylia)의 시데(Side) 출신 그리스인이다. 그의 유년 시절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지만, 어린 나이에 콘스탄티노플에서 법학을 공부하며 당대 최고의 법률가로 성장했다. 그는 라틴어와 그리스어에 모두 능통했으며, 박식하고 자신감 넘치는 인물이었다. 특히 그의 언어 능력은 매우 중요했다. 고대 로마법은 라틴어로 기록되어 있었지만, 6세기 동로마 제국의 공용어는 그리스어였기 때문이다. 트리보니안은 두 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고대 법전을 당대의 맥락으로 번역하고 해석할 수 있는 드문 인재였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이러한 트리보니안의 탁월한 능력을 일찍이 알아보았다. 황제의 신임을 얻은 트리보니안은 먼저 마기스테르 오피키오룸(Magister Officiorum), 즉 제국 관료 조직의 총책임자 직책을 거쳤다. 이 자리에서 그는 제국 행정의 전반적인 구조와 실무를 익혔고, 법률이 실제로 어떻게 적용되는지 현장에서 배울 수 있었다.
529년 9월, 트리보니안은 법무장관 격인 퀘스토르 사크리 팔라티(Quaestor Sacri Palatii)에 임명되었다. 이 직책은 황제의 법률 고문이자 입법 초안 작성자로서, 제국의 모든 법령을 작성하고 검토하는 핵심 역할이었다. 퀘스토르는 황제의 뜻을 법률 언어로 정교하게 표현하고, 기존 법체계와의 조화를 고려하며, 실행 가능성을 검토하는 중대한 직책이었다. 이 시기부터 그는 <로마법 대전> 편찬의 명실상부한 총괄 책임자가 되었다.
532년 1월, 콘스탄티노플에서 니카 폭동(Nika riots)이 발생했다. 이 대규모 민중 봉기는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통치를 위협할 정도로 격렬했으며, 히포드롬(경마장)에서 시작된 불만이 도시 전체를 휩쓸었다. 폭동의 원인 중 하나는 황제의 과도한 세금 징수와 부패한 관료들에 대한 분노였다. 폭도들은 트리보니안을 비롯한 여러 고위 관료의 해임을 요구했고, 황제는 민심을 달래기 위해 트리보니안을 일시적으로 해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트리보니안은 공직에서 물러났음에도 불구하고 법전 편찬 작업만큼은 계속 진행했다. 이는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그의 전문성을 얼마나 높이 평가했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황제는 정치적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를 해임했지만, 법전 편찬이라는 역사적 과업만큼은 트리보니안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니카 폭동이 진압되고 정국이 안정되자, 535년 트리보니안은 다시 퀘스토르 직책에 복귀했다. 그는 542년 사망할 때까지 약 7년간 더 황제의 입법 활동을 도왔다. 전후를 합치면, 그는 유스티니아누스 재위 기간 동안 약 12년간 법무 장관 역할을 수행한 셈이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당시 제정된 법령 전체의 약 3/4에 달하는 초안을 작성했다. 제국의 입법에 깊이 관여한 인물이었을 뿐만 아니라, 사실상 유스티니아누스 시대 법률의 실질적 설계자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우리가 <로마법 대전>(원어: Corpus Iuris Civilis)이라 부르는 체계는 사실, 하나가 아니라 네 가지 법전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칙법휘찬(Codex Justinianus): 이 법전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시대 이전의 모든 황제 법령들을 모아 체계적으로 정리한 법전이다. 트리보니안은 529년에 초판을 완성하였고, 이후 내용 보강을 거쳐 534년에 개정판을 발표하였다.
학설휘찬(Digesta) 또는 판덱타이(Pandectae): 이 법전은 고대 로마의 저명한 법학자들의 학설과 견해를 집대성한 것이다. 트리보니안은 방대한 양의 법학 문헌 중에서 중요한 내용을 선별하여 533년에 편찬을 완료하였다. 이는 로마법의 이론적 토대가 되는 중요한 문헌으로 평가된다.
법학제요(Institutiones): <로마법 대전>의 초학자를 위한 교과서 성격의 법전이다. 이는 당시의 법학도들이 로마법의 기본 원리를 쉽게 배울 수 있도록 트리보니안이 다른 학자들과 함께 편찬하였으며, 533년에 공포되었다.
신칙법(Novellae Constitutiones):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칙법휘찬 편찬 이후 새롭게 제정하거나 공포한 법령들을 모아놓은 모음집이다. 이는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사망 이후에 개인적으로 수집된 경우가 많으며, <로마법 대전>에 추가적으로 포함된 부분이다.
흥미롭게도 Corpus Iuris Civilis이라는 라틴어 명칭 자체도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시대에 붙여진 것이 아니다. 이 용어는 훨씬 후대의 16세기 프랑스 법학자 디오뉘시우스 고토프레두스(Dionysius Gothofredus)가 처음 사용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는 중세 카톨릭교회의 법전인 <교회법 대전>(Corpus Iuris Canonici)에 상응하여 유스티니아누스 법전 모음을 Corpus Iuris- 라는 당시의 접두어에 붙어 명명한 것이다.
6세기 비잔티움 사람들은 '로마법 대전'이라는 통합된 이름을 사용하기보다는 Codex, Digesta, Institutiones, Novellae와 같이 개별 법전의 라틴어 또는 그리스어 명칭을 사용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트리보니안은 방대한 고대 법률 텍스트를 당대 맥락에 맞게 재편하는 수정 작업을 수행했다. 이를 '트리보니안의 수정(emblemata Triboniani)'이라고 부른다. 그는 법문의 중복을 제거하고, 불필요한 부분을 삭제하며, 당시 법 현실에 맞지 않는 조항을 변경했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이러한 수정이 고대 로마법을 훼손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그의 작업이 고전 법률을 보존하고 후대에 전달하는 데 필수적이었다는 평가가 우세하다.
소설 속 등장인물이자 법률가인 에우게니우스는 로마 황제들이 공포한 칙령 문서를 찾아 도서관을 헤맨다.
재발견과 오늘날까지의 영향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476년 이후, 동로마 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1세 치세에 편찬된 <로마법 대전>은 서유럽에서 사실상 잊혔다. 서로마를 정복한 여러 게르만 부족들은 고대 로마의 문화적 유산을 오랫동안 활용하지 못했다.
비록 '카롤링거 르네상스'라 불리는 샤를마뉴(카롤루스) 대제 통치하의 인문학 부흥은 프랑크 왕국이 로마의 고전들에 관심을 두는 계기가 되었지만, 이러한 관심은 키케로와 베르길리우스 등의 문학 작품에 국한되었고, 복잡한 로마법을 도입할 만한 전문 인력은 부족하였다. 샤를마뉴 대제 역시 고전을 즐겨 들었으나 쓰기에는 서툴렀던 것으로 전해진다. 결과적으로 그의 제국은 게르만 관습법을 기반으로 통치되었으며, 비잔틴의 발전된 법제도는 게르만족이 다스리던 서유럽의 관심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러나 11세기 후반, 인류 역사상 가장 극적인 순간이 이탈리아 피사에서 펼쳐졌다. 서유럽에서는 완전히 잊혀졌던 트리보니안의 법전이 먼지 쌓인 서고 깊숙한 곳에서 재발견된 것이다! 이후 역사의 물줄기는 빠르게 바뀌기 시작했다.
정확히 누가 언제 이 오래된 문서를 재발견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1070년경 이르네리우스(Irnerius)라는 법학자가 필사본을 연구하며 자신의 주석을 달아 학생들을 볼로냐에서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는 곧 유럽 최초의 근대적 대학인 볼로냐 대학의 설립으로 이어졌다.
봉건적 관습과 교회법(Canon law)에만 의존하고 있던 11세기 유럽, 복잡하고 체계적인 로마법은 새로운 사회 질서를 모색하던 이들에게 거대한 지적 영감을 제공했다. 앞서 언급한 볼로냐 대학을 중심으로 학자들은 이를 더욱 연구하며 체계화하는 작업을 시작했고, 이러한 학자들의 무리는 점차 주석학파(Glossators)라고 불리는 집단으로 변모했다. 이후 주해학파(Commentators)와 우리가 잘아는 인문주의자(Humanists)들이 가세하면서 <로마법 대전>에 대한 해석 논쟁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불을 당겼고, 이들의 학문적 노력은 얼마 지나지 않아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가며 중세 법학과 근대 인문학의 부흥을 이끌었다.
<로마법 대전>은 중세와 근대 법률 체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로마법은 수 세기 후 유럽 대륙법 체계의 확립에 결정적인 토대가 되었다. 법학자들은 로마법의 원리와 논리를 연구하여 이를 교회법과 각국의 관습법에 접목시켰다. 이 과정에서 법률의 통일성과 합리성이 강조되었고, 이는 각국의 법전 편찬에 중요한 모델이 되었다. 프랑스의 나폴레옹 법전(Code Napoléon) 역시 <로마법 대전>의 영향을 받아 체계적이고 명확한 법률 구조를 갖추게 되었다.
이 고대 법전의 영향은 근대에 이르러 더욱 커졌다. 19세기 독일에서는 판덱텐(Pandekten) 법학이 발전했다. 이는 앞서 언급한 <학설휘찬 Digesta>에 담긴 법 이론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고 체계화하는 학문이었다. 판덱텐 법학은 독일 민법전(Bürgerliches Gesetzbuch, BGB)의 이론적 토대가 되었다. 이는 다시 일본과 대한민국 등 동아시아 국가들의 민법에 영향을 미쳤고, 세계적인 법률 체계의 기반이 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법치주의, 사유재산권 보호, 계약의 자유 등 법률의 기본 원리는 모두 여기서 유래했다. 불멸의 유산이 된 것이다.
오늘날 트리보니안의 업적은 미국 국회의사당 하원 회의장에 가면 볼 수 있다. 회의장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입법가들을 23개의 부조로 기념하고 있다. 이곳에서 만날 수 있는 트리보니안의 초상은 <로마법 대전>이 미국 역사를 포함하여 세계사에 미친 광범위한 영향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참고 자료
Tony Honoré, ‘Tribonianus’ in Tony Honoré, Oxford Research Encyclopedia of Classics (Oxford University Press 2016) http://classics.oxfordre.com/view/10.1093/acrefore/9780199381135.001.0001/acrefore-9780199381135-e-6550
Wikipedia, 'Tribonian' (English)
위키피디아, '로마법 대전' (한글)
Randall Lesaffer, European Legal History: A Cultural and Political Perspective (Jan Arriens tr,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9) 252-256
커버 이미지: 사진: Unsplash의 Nika Benedictova
By IusRomanum - Own work, CC BY-SA 4.0,
Di Sconosciuto - Hector Buissneg, Pubblico dominio,
By Sculpture by Brenda Putnam; photo by the Architect of the Capitol. Public Doma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