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드리아노플 목공소
"안나를 처음 만난 건 제가 열여섯 살 때였어요. 아버지를 따라 성문에 쓰일 자재를 운반하는 일을 돕고 있었는데, 그 공사의 책임자였던 한 중년 귀족이 딸 안나와 함께 서 있었어요.
저는 멋쩍은 사춘기 소년의 표정으로 묵묵히 자재를 날랐어요. 아직 풋풋하고 왜소한 소년의 모습이었지만, 그녀에게 잘 보이고 싶었죠. 아버지나 아버지 친구들에게 뒤지지 않으려고 평소에 하나씩 나르던 목재 자재를 세 개씩 무리해서 날랐어요. 일부러 그녀 옆을 지나가면서요. 소매를 걷어 올려 어설픈 팔 근육을 일부러 드러냈고요(웃음). 저도 참... 아마 그때 그녀도 저를 쳐다보고 있었을 거예요.
공사가 끝나고, 저희 둘은 잠시 어른들의 눈을 피해 이야기할 기회가 생겼어요. 이름은 그때 알았죠. 자연을 좋아하고, 산책을 좋아하고, 노래 부르는 걸 좋아하는 비슷한 또래 아가씨였어요. 그리고 제가 일하는 목공소에서 멀지 않은 저택에 산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이후 저는 아버지 심부름을 나갈 때마다, 일부러 약간씩 돌아서 그녀 집 앞을 지나다녔어요. 열 번에 두 번 정도는 창가에 앉아 있는 안나의 모습을 볼 수 있었죠. 그런 일이 반복되자, 그녀도 손을 흔들어 주더군요. 그리고 언젠가부터 집 앞으로 나와 주기 시작했습니다. 아주 잠깐이지만 짧은 대화를 주고받는 게 일상이 되었죠.
우리는 마음이 잘 통했어요. 목공일로 단단히 굳은 제 손가락을 신기한 듯 보며 웃었고, 제가 불러주는 노래도 좋아해 주었어요. 시간이 지나자 자연스럽게, 근처 숲 속 풀밭에 누워 같은 하늘을 보며 이야기도 나누게 되었죠.
어느 날, 둘이 함께 있는 모습을 그녀의 아버지가 보게 되었어요. 숲에서 걸어 나오는데 하인들과 기다리고 계셨죠. 그때가... 당시 소녀였던 안나를 본 마지막 순간입니다. 마을 사람들에게 전해 듣기로는 아주 오랫동안 집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고 하더군요.
세월은 애석하게 흘러갔고, 현실은 마냥 아름답지만은 않았습니다. 나라 전체는 전운에 휩싸였고, 제가 살던 아드리아노플 인근에서는 종종 전투가 벌어지기도 했어요. 가끔 군인들이 와서 저희 아버지를 데려가기 시작했어요. 투석기나 방패를 만들 장인이 필요해서요. 저는 홀로 남은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더 열심히 목공 일을 했고, 곧 그녀의 아버지도 전쟁에 참전했다는 사실을 듣게 되었어요.
알고 지내던 많은 마을 사람들이 죽었고, 귀족들은 대부분 전쟁을 피해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갔어요. 요새로 둘러싸인 마을에는 수도 콘스탄티노플에서 파견을 나온 많은 군인들과 가족들이 살기 시작했죠. 그렇지만 사업은 오히려 확장되었어요. 저희 가게는 성의 방어용 자재를 납품하는 도시 최대의 목공소가 되었습니다.
음... 아주 오랫동안 그녀를 잊고 지냈어요. 아니, 잊진 않았죠. 다만 현실에 눌려 옛 추억을 떠올릴 여유가 없었을 뿐. 떠올린다 한들 제가 바꿀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으니까요.
물론 그녀의 안부를 확인하고자 여러 번 주위에 수소문해 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를 기억할 만큼 오래된 마을 주민들은 몇 남지 않았고, 다들 변화에 적응하느라 옛이야기는 별로 내켜하지 않았어요.
많은 것이 변했고, 저 스스로도 변해감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전 서른둘이 되었습니다.
어느 날, 그날따라 햇살이 유난히 따뜻했습니다. 주위 모든 것들이 비현실적일 만큼 아름다웠어요. 나뭇잎들은 유난히 더 선명한 초록색처럼 보였어요.
수녀원장님의 부탁으로 수녀원의 부서진 나무문을 고치러 출장을 갔어요. 화재로 문이 많이 그을렸다고 해서요. 저는 도착하자마자, 늘 해오던 대로 공구함에서 망치와 끌, 나무자를 꺼내 들고 작업을 시작했죠.
한참 작업에 몰두하고 있을 때, 복도 맞은편에서 원장님과 한 여성이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리더군요. 원장님은 그 수녀에게 저에게 혹시 필요한 게 있는지 물어봐달라고 하는 것 같았어요.
곧 그녀가 저에게 천천히 걸어왔습니다. 저는 허리를 잔뜩 구부리고 문지방에 망치질을 하고 있었구요. 단정하게 빛나는 구두가 제 눈앞에 들어오더군요.
내려다보는 시선을 느끼고 천천히 저는 고개를 들었습니다.
그녀, 안나가 환하게 미소를 지었어요. 그 순간 저는 16살 그때의 풀밭으로 돌아갔습니다.
비록 잠시동안이었지만...
괜챦아요.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1] 아드리아노플은 현재 튀르키예의 에디르네(Edirne)로, 발칸반도 동부의 마리차강 연안에 위치한 전략적 요충지였습니다.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로 향하는 길목을 지키는 유럽의 관문이자 핵심 군사 방어선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당시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는 이민족의 침입에 대비해 이곳의 성벽과 요새를 대대적으로 보수하며 국경 수비를 강화했습니다. 이 도시는 고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전쟁의 무대가 되었으며, 훗날 오스만 제국의 초기 수도가 되기도 한 역사적 장소입니다.
[2] 당시 성 안의 목공 장인은 도시 방어의 생존을 책임지는 군사 공학자이자 핵심 기술자였습니다. 이들은 평시에 요새 강화 사업에 참여해 성벽의 목조 방어각과 수로 시설을 구축했으며, 전시에는 투석기나 발리스타 같은 공성 병기를 제작·수리하고 파손된 성문을 보수하는 '응급 복구팀'의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마리차강 연안의 지리적 특성상 수운용 선박과 물자 수송용 수레 관리까지 전담했던 이들은 국가 직영 공방이나 군단에 소속되어 도시의 전략적 자산으로 대우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