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레페준타 요새
"처음에는 당연히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여기 카스피해의 척박한 땅에 성곽을 짓고 있었죠. 페르시아와의 긴장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였어요. 지휘관님은 이 요새가 우리 보급선을 지키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확신하셨죠. 사령관님, 속주 장관님, 일선 병사들 할 것 없이 모두 한마음이었어요.
그런데 며칠 뒤 갑자기 황실에서 전령을 보냈어요. 즉시 요새 건설을 멈추라는 거예요. 군사들이 전염병에 걸린다는 둥, 사기가 저하된다는 둥, 온갖 있지도 않은 이유를 다 대면서 말이죠. 듣자하니 제국 사령부의 니케포루스라는 총독이 가장 강하게 반대했다고 하더군요.
솔직히 말해서, 우리는 상부의 지휘관들이 전쟁을 모른다고 생각해요. 그들이 내리는 결정은 언제나 여기 전장의 현실과 너무 달랐거든요. 매일 테이블에 앉아서 돈 굴릴 생각이나 하는 양반들한테 지평선 너머에서 새까맣게 몰려오는 페르시아 기병들을 한번 보여주고 싶어요. 그들의 비명소리도요. 아마 누구보다도 먼저 이 성곽 뒤로 숨고 바지에 오줌부터 지릴 인간들이에요.
그렇게 몇 년이 흘렀어요. 페르시아와의 전쟁은 교착 상태에 빠졌고, 우리의 요새 계획은 잊혀지는 듯했어요. 우리는 그저 매일매일 허무하게 하루를 보냈죠. 그런데 얼마 전 상부에서 갑자기 명령이 떨어졌어요. 요새를 다시 지으라는 거예요. 다들 어리둥절했죠. 몇 년 전에는 그렇게 반대하더니, 이제 와서? 그때, 니케포루스 총독의 예전 부하였다는 사람이 조용히 우리 병사들한테 다가와서 모든 것을 말해주더군요.
그의 말은 충격적이었어요. 니케포루스는 요새 건설을 반대한 게 아니었어요. 그는 그저 여기 현지 지휘관이셨던 트라야누스 장군을 무너뜨리고 싶었던 거예요. 트라야누스 장군이 요새를 성공적으로 지으면 그의 위상이 더 높아질 테니, 그걸 시기해서 막으려고 황실을 설득한 거죠. 그의 반대가 성공하면서 트라야누스 장군님은 결국 좌천되셨어요. 그리고 이제 경쟁자가 사라졌으니 자신이 다시 요새를 짓겠다고 나선 거죠. 아주 뭐 가관 아닙니까!
결국 우리는 지금 다시 요새를 짓고 있어요. 페르시아와의 국경이 훨씬 동쪽으로 이동한 지금, 여기는 더 이상 군사적 요충지가 아니에요. 사실 이제 요새는 필요 없어졌죠. 그저 누군가의 권력욕 때문에 버려졌다가 이제 와서 다시 지어지는 거예요. 이 요새가 완성되면 그들은 아마도 이런 말들을 하겠죠. '후방이 든든해야 안보가 지켜진다' 뭐 이런 말장난으로요.
보이시죠? 이 요새의 돌 하나하나는 누군가의 좌절과 누군가의 야심으로 쌓아 올려졌습니다. 그렇지만 높으신 분들은 이 돌덩어리의 무게를 전혀 모릅니다.
작가노트
[1] 이아손(Ἰάσων, Iásōn)이란 이름은 고대 그리스어 동사 'ἰάομαι (iáomai)'에서 유래하며, 이는 '치료하다(to heal)', '고치다', '회복시키다'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정작 그리스 신화에서 이아손은 비극적인 인물로 나오는데, 연인 메데이아와 함께 황금양모(신에게 바쳐진 날개 달린 숫양의 털)을 훔쳐서 달아났다가 고독한 최후를 맞이하는 비극적인 인물로 묘사됩니다. 비잔틴 시대에는 그리스 신화 속 영웅의 이름이 기독교 성인이나 신앙과 연결되어 새로운 의미를 얻기도 했는데, 이런 맥락에서 이아손은 회복이나 구원의 은유적인 의미를 내포하기도 했습니다.
[2] 트라페준트(Trapezus)는 오늘날 터키 북동부 트라브존(Trabzon)으로 불리는 흑해 남동 연안의 고대 도시로, 비잔틴 제국 시대에 전략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이 지역은 가파른 폰투스 산맥에 의해 내륙으로부터 자연적인 방어선을 갖추고 있으며, 흑해를 통한 해상 접근성이 뛰어나 군사적으로나 상업적으로 매우 유리한 위치였습니다. 6세기부터 비잔틴 제국은 이곳을 테마(Theme) 제도의 일부인 트레비존드/칼디아(Trebizond/Chaldia) 테마로 지정하여 관리했습니다.
특히 이곳은 카프카스 지역과 페르시아에서 오는 동방 무역로와 흑해를 통해 콘스탄티노플로 이어지는 서방 무역로를 연결하는 중요한 교역 중심지였습니다. 특히 비단, 향신료, 금속, 노예 등의 교역이 활발했으며, 흑해 무역의 핵심 항구 도시로서 비잔틴 제국의 경제적 번영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또한 카프카스와 아르메니아 지역에 대한 비잔틴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거점 역할도 했습니다.
1204년 제4차 십자군에 의해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고 라틴 제국이 수립되자, 콘스탄티노플의 황실 가문인 콤네노스(Komnenos) 가문의 알렉시오스와 다비드 형제가 트라페준트로 도피하여 독립국가를 세웠습니다. 이렇게 탄생한 트라페준트 제국은 니케아 제국, 에피루스 공국과 함께 비잔틴 제국의 주요 후계 국가 중 하나로 자리잡았습니다. 1261년 니케아 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재탈환하여 비잔틴 제국을 부활시켰음에도 불구하고, 트라페준트 제국은 독자적인 길을 걸으며 1461년 오스만 제국의 메흐메트 2세(정복자)에게 정복될 때까지 약 250년간 존속했습니다.
[3] 니케포루스 총독이 개인적인 야심과 시기심으로 요새 건설을 중단시키고 경쟁자 트라야누스 장군을 좌천시킨 행위는 비잔티움 제국 고위 관료들 사이에서 흔히 일어났던 정치적 숙청과 권력 다툼을 보여줍니다. 이 두 인물은 가상의 인물이지만, 유사한 실제 사례들이 존재합니다. 예를 들어, 12세기 마누엘 1세 황제 통치 시기, 영향력 있는 조언자 테오도로스 스티페이오테스(Theodôros Stypeiôtès)가 이오안네스 하기오테오도리테스(Ioannès Hagiotheodôritès)를 밀어내고 그를 헬라스(Hellas)와 펠로폰네소스의 총독으로 좌천시키도록 주선했습니다. 이는 "상당한 강등"으로 여겨졌습니다. 이 사례는 고위 관리들이 권력을 유지하거나 경쟁자를 제거하기 위해 공직 임명을 좌천의 수단으로 활용했음을 보여줍니다.
이야기에서 그려지는 부패하고 공익에 무관심한 행정가의 모습들을 반영하는 실제 사례도 있습니다. 12세기 후반 비잔티움의 역사가이자 고위관료였던 니케타스 초니아테스(Niketas Choniates)는 당대 정치 상황에 대해 비판적인 기록을 남겼습니다. 특히 그는 당시 강력한 권력을 가졌던 안겔로이(Aggeloi) 가문을 맹렬히 비판했는데, 그는 "안겔로이 가문은 공익에는 전혀 관심이 없으며, 오직 세금을 축적하고, 지방의 부를 고갈시키는 데만 관심이 있다"고 비난했습니다.
[4] 지방에 주둔 중인 군인들은 때로 불법적인 이득을 취하고, 주민들에게 곡식이나 금화를 요구하고, 가축을 약탈하며, 여성을 학대하는 등의 비행을 저지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군사 주둔지에서의 부패와 무법은 사료로는 정확히 확인되지 않으나, 어쩌면 중앙 정부의 결정이나 명령에 대해 느낄 수 있는 좌절감의 배경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당시 국경선은 끊임없이 변동했고, 한때 중요했던 요새가 몇 년 후에는 전선이 이동하면서 무용지물이 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는 당시 비잔틴 제국의 군사 행정 체계가 현장 상황을 신속하게 반영하지 못했음을 보여줍니다.
[5] 마지막으로,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에서 나온 풍차에 관한 대목을 인용합니다. 소설에서 풍차는 동물들이 힘겹게 건설하고 재건하는 대상이자, 돼지들이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약속하는 미래의 편안한 삶을 상징하는 건물입니다. 이번 에피소드의 '요새'는 바로 이 '풍차'에서 모티브를 얻었습니다.
“스노우볼이 추방된 뒤 세 번째 맞는 일요일, 나폴레옹이 어떻게 해서든 풍차를 건설할 것이라고 발표하자 동물들은 다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나폴레옹은 자기가 마음을 바꾼 데 대해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고, 동물들에게 단지 이 과외의 작업이 매우 힘든 작업일 것이며, 식량 배급량을 줄여야 할 필요가 생길지도 모른다고만 경고할 뿐이었다.”
- 조지 오웰, ‘동물농장’ (김지현 옮김, 문학마을 2017), 5장 中.
참고문헌
Jonathan Shepard (ed), The Cambridge History of the Byzantine Empire c. 500-1492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8).
John F Haldon, The Palgrave Atlas of Byzantine History (Palgrave Macmillan 2010).
Judith Herrin, Margins and Metropolis: Authority across the Byzantine Empire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13). (특히 정치적 숙청 사례들에 관해서)
Michael Maas, Readings in Late Antiquity: A Source Book (Second edition, Routledge 2010).
Wikimedia commons, 'Trabzon City walls and Aquaduct', By İhsan Deniz Kılıçoğlu, CC BY-SA 3.0
조지 오웰, 김지현 옮김, ‘동물농장’ (문학마을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