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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운설 Dec 29. 2019

[영화 리뷰] 백두산

한국 사회의 취약점을 드러내는 영화

  연말 휴가기간에 모처럼 평일 영화를 관람했다. 별 고민 없이 멀티플렉스가 기대하는 블록버스터급 방화, [백두산]으로 정했다. 킬링 타임과 액션 씬을 기대한 터라 대화면이 낫겠다 여겼다. 그렇다면 답은 용산 CGV IMAX관이다. IMAX용으로 편집이 되지 않은 2D를 IMAX관에서 틀뿐이라서 관람료가 12,000 원이다. full screen은 아니지만 좌우 폭은 IMAX 스크린을 꽉 채웠다. 대략 2.35 : 1~2.39:1의 시네마스코프 비율이라 추정된다. 최소한 일반 2D관에서 관람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고 판단된다.


  관람 전 단톡 방에 올라왔던 메시지 하나가 마음에 걸렸다. 며칠 전 후배가 관람하기 전에 게시판에서 본 관람평이었다. '엄복동, 염력은 피했는데 백두산 못 피했네...'. [엄봉동]이 어떤 영화던가?  최종 스코어 172,213 명을 자랑하는 역대 박스 오피스 흑역사를 잇는 화제작이다. 아쉽게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의 14만 명 기록을 깨지는 못했지만 네티즌들에게 1 UBD라는 흥행 기준점을 제시해 주었다. 172,213 명이 1 UBD다. 예를 들자면 [어벤져스 : 엔드게임]이 개봉 첫날 반나절 만에 10 UBD를 넘었다고 하면 172만 명을 넘겼다는 의미다. [백두산]을 [엄복동]에 비유할 정도여서 내심 살짝 걱정이 되기도 했다.


  [백두산]의 줄거리는 단순하다. 재미교포 강봉래 교수(로버트, 마동석 분)가 3년 전부터 백두산 화산 폭발을 경고했지만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다. 마침내 백두산에서 1차 폭발이 일어나고 남북한 일대에 강진이 발생하여 쑥대밭이 된다. 청와대 민정수석 전유경(전혜진 분)에게 이끌려 NSC 회의에 참석한 강봉래 교수는 4번째 폭발을 막지 못하면 한반도는 끝장이라고 말한다. 이를 막으려면 백두산 인근 광산 지하 갱도에 핵무기를 터트려 마그마방의 압력을 낮추는 방법이 유일하다. 제대를 하루 앞둔 특전사 조인창 대위(하정우 분)가 이끄는 폭발물 처리반 EDO 팀은 북한 수용소에 억류된 이중 스파이 이준평(이병헌 분)을 구출한 후 그에게서 북한이 보유한 ICBM 위치를 파악하고  ICBM의 핵탄두를 해체한 후 기폭장치에 연결하는 임무를 받는다. 지하갱도에 이를 설치, 폭파하는 임무는 함께 투입된 특전사 공격조가 담당하기로 하고 북으로 파견된다. 하지만 북파 도중에 공격조가 탑승한 수송기가 추락하는 비상사태가 발생한다. 어쩔 수 없이 조인창 대위와 EDO팀이 이준평을 구출하고 ICBM을 해체한 후 기폭장치에 연결하고 백두산으로 향한다.  


  영화가 진행되는 와중에 복선이 몇 가지 깔려 있다. 우선 조인창 대위의 아내 최지영(배수지 분)은 출산이 코 앞인 만삭의 임산부이다. 무사귀환을 장담할 수 없는 임무를 맡은 조 대위는 태아의 성별을 무척 궁금해 하지만 아내는 돌아오면 알려주겠다고 애를 태운다. 아내와 이별하는 과정에서 조 대위가 백두산 폭발을 막기 위해 장렬한 최후를 맞이하는 게 아닐까 추측하게끔 유도한다. 조 대위가 백두산 인근 보천 시에서 이준평을 구한 다음 민중사 일행을 돌려보내고 이준평과 단 둘이서 백두산으로 향하는 장면에서도 둘의 최후를 예상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에 복선이 하나 더 깔린다. 바로 이준평이 중국 요원에게 총을 맞는 설정이다. 복부에 총상을 입은 이준평이 살아나기 힘들다면 다른 결말을 그려볼 수 있다.


  [백두산]의 CG는 덱스터 스튜디오가 담당했다. 덱스터는 [고릴라], [신과 함께 1,2]의 CG를 연출한 역량 있는 특수효과 전문 스튜디오이다. 도심의 건물이 무너지고 한강이 범람하거나 백두산이 화산 폭발하는 장면들을 무난히 처리하였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재난 현장을 담은 화면이 너무 깔끔하다는 점이다. 얼굴과 목, 손등에 오물이 묻었다고 치자. 진짜로 오물이 묻어 땀과 범벅이 된 지저분한 모습과 깨끗한 얼굴에 얼룩칠을 한 분장은 확연히 다르다. 붕괴 직전 유리창이 깨진 빌딩과 무너진 건물 잔해, 여기저기 화재로 인해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처참하게 파괴된 도심 장면이 마치 깨끗한 얼굴에 얼룩 칠한 느낌이다. 특히 한강이 범람하거나 핵탄두가 터지는 장면은 어색함마저 엿보인다. 방화로는 블록버스터 급이라지만 헐리우드 대작에 비할 바가 못 되는 260억의 한정된 예산에서 가성비가 좋은 CG이나 깔끔하지 못한 뒷 맛이라 하겠다.  


  가성비 양호한 CG였다고 평가한다면 [백두산]이 부족한 점은 무엇일까? 나는 연출과 시나리오라고 평가한다. 스토리 전개 과정에서 개연성이 부족하거나 앞 뒤 흐름이 자연스럽게 연결되지 않는 장면들이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첫째, 관람객들이 모두 의아해할 만한 설정이 있다.  남북의 도시 아비규환으로 내몰 정도로 초토화시킬 만큼 백두산 폭발이 강력했다. 그러나 정작 진앙지 바로 옆에 있는 북한의 지하갱도는 너무나 멀쩡하다. 극 중에 7호 갱도가 철광석 광산이라 단단한 구조로 이루어졌다고 설명이 이어지지만 납득하기 어렵다. 내진 설계된 고층빌딩이 무너지는 판에 침목과 간단한 철구조물이 전부인 수직갱도가 아무런 피해가 없다는 설정이 너무 작위적이다.


  둘째, 보통 재난영화는 초반부에 재난을 막기 위해 재난이 임박했음을 경고하는 과학자의 고군분투를 그리거나 재난 징후가 곳곳에서 나타나는 불길한 장면을 그린다. 그리하여 인간의 부주의함을 대자연이 징벌하거나 자연의 거대한 힘, 그 불가항력(force majeure)에 주인공이 의연하게 대처하는 불굴의 의지를 강조하는 게 다반사이다. 그러나 [백두산]에서는 백두산 대폭발을 예견한 시점과 조치에 대한 설명이 대사 한마디로 정리된다. 그것도 지진으로 서울이 융단폭격 맞은 후 NSC가 대책 회의하는 과정에서 혼잣말로 투정하듯 내뱉는다. 강남대로가 쑥대밭이 되는 영화 도입부가 압권이긴 하지만 강봉래 교수의 고금 분투가 사전에 그려졌으면 하는 아쉬움이 크다.  


  셋째, 지진으로 북한 지도부가 전멸한 무정부 상태에서 핵탄두를 얻기 위해 대통령이 특전사 팀을 비밀리에 북파 결정을 내린다. ICBM이 보관된 비밀기지의 정체를 아는 유일한 단서가 이준평이다. 핵탄두를 해체하고 기폭장치에 무사히 옮긴 EDO 팀을 정체불명의 무장군인들이 공격한다. 핵탄두를 확보하기 위해 급파된 미국 특수부대원들이다. 미국은 어떻게 ICBM 위치를  파악했을까? 그리고 교전이 일어나자 마자 미군 NSC를 접수, 통제한다. 한마디로 한국의 작전을 꿰뚫고 있지 않았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사전에 핵탄두 처리를 놓고 한미 양국이 갈등한 끝에 비밀리에 북파를 단행하는 방향으로 전개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지 않았을까 한다.


  넷째, 조인창과 이준평의 배우자에 대한 묘사가 부족하다. 팔당댐이 붕괴하여 급류가 한강을 따라 내려오며 범람한다. 만삭인 최지영이 차에 갇혀 있는 상태에서 급물살에 휩쓸리지만 무사히 헤엄쳐 나온다. 이 장면 역시 수긍하기 쉽지 않다. 차라리 수영에 능한 설정을 묘사하는 사진 등의 장치가 있었다면 어떠했을까? 또한 이준평의 아내 선화로 등장한 전도연과 이준평에게 어떤 과거사가 있었는지 밝히지 않았다. 연출자는 관객들이 유추하기를 바랐는지 모르지만 뭔가 매끄럽지 않은 건 사실이다.


  우리 사회는 대부분의 영역에서 기초가 부족하다. 각종 응용학문에 비해 역사학, 철학, 물리학과 같은 기초학문의 저변이 약할뿐더러 산업분야도 기초소재, 정밀기계, 정밀화학과 같은 뿌리산업이 선진국에 비해 취약하다. 소품종 대량생산의 대기업 체제에는 나름의 경쟁력을 확보했지만 다품종 소량생산의 고부가 강소기업이 부족하다. 영화산업도 마찬가지이다. 헐리우드 시스템이 장착된 투자, 배급 시스템은 세계 어디를 가도 남부럽지 않다. 헐리우드 영화에 맞서는 자국 방화의 제작, 유통 체계를 구축한 글로벌 영화시장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나라이기도하다. 웹툰을 원작으로 한 시나리오도 상당할 정도로 소재 또한 다양해졌다. 그러나 영화산업의 관점에서 평가하자면 아직도 연출력이 부족하거나 허술한 시나리오로 제작된 영화가 아직도 상당하다. 특정 장르와 주제가 대박을 치면 유사작품이 쏟아진다. [밀정]과 [명량]이 공전의 히트를 치자 일제시대와 역사물, 나아가 국뽕에 기댄 영화가 얼마나 많이 쏟아졌나. 예상치 못한 박스 오피스를 기록한 영화가 나오게 되면 그만큼 영화산업의 기반이 튼튼하다고 오해할지 모른다. 그러나 한국 영화산업을 총체적으로 보면 수익성이 쉽사리 확보되지 않는 실정이다. 투자자가 몰리는 영화들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영화는 제작비를 확보하기가 만만치 않다. 기발하고 독창적인 시나리오와 현실적인 디테일한 CG, 여기에 완벽한 연출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오픈 마인드의 인재가 꽤 필요할 것이다. 영화산업의 하드웨어가 어느 정도 갖춰졌다면 이제는 부족한 소프트웨어를 어떻게 채울지 영화인들의 관심과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역량 있는 자원들을 넘쳐나게 해 줄 창의성을 북돋울 공교육의 개혁은 대전제가 될 것이다.


   [엄복동]과 [염력]은 피했는데 [백두산]은 피하지 못했다는 어느 관객의 후일 평은 너무 박한 평가이다. 킬링타임, 볼거리 많은 액션씬, 김용화 감독의 페르소나 하정우 특유의 몰입도와 세계적인 배우로 거듭난 이병헌의 카리스마가 이 영화를 빛나게 해 준다. 다만 보다 탄탄한 시나리오와 완벽에 가까운 연출이 토대가 되었으면 하는 안타까움을 지울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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