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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운설 Jan 22. 2021

[서평, 리뷰] 논어를 논하다.

홍익출판사 슬기바다 시리즈 '논어' 오 세진 옮김

  논어. 論語, Analects of Confucius. 말 그대로 공자가 남긴 대화록이다. 2,400 년 이전에 쓰인 이 책을 아직도 대중들이 찾고 있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1999 년 홍익출판사 슬기바다 시리즈 1편 논어가 있음에도 리뷰를 신청하였다. 사실, 99 년판 슬기바다 논어는 3 년 전에 중고로 구입하였다. 언젠가는 읽겠지 하며 서재에 꽂아 두었다가 이 번 리뷰 이벤트를 보고 이 참에 읽자는 요량이었다.


  두 책의 역자가 다르다. 그렇지만 99 년과 21 년,  두 번 강산이 변한 세월 동안 논어 해석과 풀이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비교하고 싶었다. 한문 교육이 의무였던 학창 시절, 논어에 나오는 고사만 기억하며 번역본을 읽어도 공자가 말했던 사상과 가르침을 이해하는 데에 그다지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 여겼다. 어지러운 춘추시대에서 공자가 펼치고자 했던 인과 예의 진수를 원전에서 찾고자 했다. 사서삼경의 첫 번째인 경전인 논어를 너무 안일하게 여긴 듯하다.


  한 두 번 들어봤을 법한 구절은 번역문을 읽자마자 손쉽게 이해가 된다. 그러나 대화록이란 특성과 춘추시대의 시대적 배경을 알지 못한 한계 때문에 앞 뒤 배경이나 맥락이 거두절미된 상황에서 툭 튀어나오는 문장들을 읽는 게 모래알 씹는 느낌이다. 번역된 글을 읽어 가며 의미를 음미하고자 해도 선뜻 머리에 꽂히지 않는 구문들이 상당하다. 역자들조차 논어가 편찬된 이후에 나온 여러 주석, 해설서를 참고하는데 내가 너무 실상을 몰랐던 것이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내게 적용될 줄이야!


  그간 해왔던 방식으로 논어를 리뷰하기가 적당치 않다. 한문을 직역하기에 턱없이 부족한 실력으론 저자의 번역을 평론하는 게 어불성설이다. 마찬가지로 공자가 역설한 고래의 가르침에 대해 이론을 제시할 수 조차 없다. 오직 논어에서 설파된 교훈에 대해 느낀 감상을 풀어내는 것이 최선이다. 색다른 시도를 하자면 처음 리뷰하고자 했던 99 년 번역본과의 차이점을 조금이라도 밝히는 것이 최소한의 성의라고 여겨진다.


  성리학이 전파된 고려 이후에 주자와 송시열은 유학자들에게 모범 답안이자 절대 교리와 같은 존재다. 옛날에는 그들의 고전 해설과 가르침에 맞서는 것은 상당수 유생에게 공적이 되는 지름길이자 이단으로 치부되기 십상이었다. 현대 한국에서도 주자의 권위가 대단하다. 그럼에도 저자는 과감히 주자의 주자집주 해석과 해설에서 탈피하였다. 오히려 한나라 시대에 나온 논어주소 라는 오래된 해설집을 근간으로 번역하였다. 논어집주가 추앙받는 현실에서 용기를 냈다고 할만하다.


  주자와 송시열과 같은 완고하고 교조적인 성리학자에 선입견을 가진 탓인지 모르지만 전반적으로 주자의 해석 내지 해설이 마음에 와 닿지 않는다. 주관적이고 사변적으로 풀이를 하는 경향이 심하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고주는 비록 자구를 그대로 해석하는 듯이 풀이하지만 당시 시대상황과 대화의 정황을 감안하여 가급적 담백하게 풀이하고자 애쓴 걸로 이해된다. 물론 주자 해석이 더 적절하게 묘사된 구절도 꽤 있었다. 그러나 내게는 전반적으로 고주를 저본으로 삼은 저자가 탁월한 선택을 했다고 다가온다.


  이 지점에서 99 년 김 형찬의 논어 번역본과 대별되는 차이점이 두드러진다. 김 형찬의 논어는 주자 해설을 충실히 따랐다. 두 책을 번갈아 읽어가면 저자가 본문 주석에서 밝힌 주자 번역, 해설과 김 형찬의 책이 유사하게 번역되었음을 알 수 있다. 글에는 글 쓴 이만의 독특한 문향이 흘러나오기 마련이다. 어느 누가 쓴 글이던 여러 글들을 읽게 되면 특유의 표현, 어투, 전개 방식 등 다양한 측면에서 저마다의 색채가 베어 나온다. 더욱이 시대에 따라 문장을 짓는 작풍이 다르기 마련이다. 글에는 저자의 성격과 시대가 녹아져 있다. 이런 측면에서도 99 년 역본에 비해 21 년 저자의 역본이 읽기에 수월하고 감칠맛 난다. 99 년 역본이 다소 빛바랜 올드 팝이라면 21 년 역본은 그루브 넘치는 케이 팝 같다.


  오 세진 번역본은 구성에 있어서도 독자에게 편의성을 더 제공한다. 논어 한 구절에 대해 먼저 번역문을 적은 다음 원문과 음, 단어 풀이를 제시한다. 해설이 필요하거나 주석이 요구될 때는 해당 페이지 하단에 각주를 달았다. 짧은 한문에도 불구하고 원문과 음, 단어 풀이를 참고하여 나름대로 직역을 하면서 읽는 것이 꽤 재미있다. 내가 풀이하는 직역과 저자의 해석이 어떻게 차이 나는지를 비교하는 것이 소소하게 즐겁다. 다만 시간이 상당히 소요되어 진도가 잘 나가지 못하는 단점이 있긴 하다. 99 년 버전은 번역문을 먼저 기재하고 본문이 끝나는 책 후반부에서  원문과 각주를 기록하였다. 책을 읽다가 원문을 보려면 불편하게 구성되어있다.


  옹야편을 읽자니 요즘의 정치, 사회 이슈에 부합하는 구절이 상당히 많다. 네 번째 구절, 자화 어머니 공양은 코로나 19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보편적 복지와 선택적 복지 논쟁을 떠올리게 한다. 열세 번째 군자 같은 유자, 소인 같은 유자가 왠지 정쟁을 일삼고 반대를 위한 반대를 일삼는 천박한 국회의원같단 생각이 물씬 난다. 국회의원은 선출직이다. 당선되면 끝이다. 선거 때는 국민들에게 머리를 조아리나 선거만 지나면 4년 내내 국민 위에 군림한다. 국회의원들에게 논어를 읽게 한 후 자격시험을 보게 하면 어떨까 하는 즐거운 상상에 잠기기도 했다.


   논어에서 공자는 인을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설명한다. 어진 마음이라 하면서도 자비심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때로는 잘못됨을 미워하는 마음에 비유한다. 공자는 논어에서 인의예지를 곳곳에서 설파하지만 후대의 맹자처럼 4단으로 명확히 구분하지 않는 것으로 여겨진다. 내가 잘못 이해한 것일 수도 있겠으나 인, 이 하나의 단어로 올바르고 의로움, 예의, 현명한 지혜마저 포괄하여 설명하였다.


  며칠 전에 '스마트 시티, 유토피아의 시작(2019)' 리뷰를 21 년 상황에 적확하도록 다시 다듬어 쓴 적이 있다. 미래 사회가 유토피아의 강림일지, 아니면 디스토피아로 전락될 처지인 지 확언할 수 없으나 미래 사회의 리더는 인간 본성을 충분히 이해해야만 한다고 믿는 바이다. 글로벌을 석권하는 미국 플랫폼 기업과 혁신기업의 오너들이 2세 교육에서 최우선으로 삼는 분야가 철학, 인문, 역사라는 사실이 충분한 방증이 된다.


  2,400 년 전의 오래된 책. 논어. 이 경전이야말로 미래를 준비할 세대들이 읽고 마음을 수양해야 할 필수 서적이지 않을까? 삭막한 현대를 살아가는 이들이 지친 마음을 달래는 위안을 넘어서 이 시대가 지향해야 할 덕목을 밝히고 사회가 윤택해지기 위한 인류 본성의 등대.


  바로 이것이 21세기 논어가 갖는 진정한 가치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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