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울어진 운동장, 용이 나올 수 없는 개천
미국은 더 이상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건국정신이 통하지 않는 나라이다. 오늘날 미국 중산층이나 하류 계층은 상류사회로 진입하기가 매우 어려워졌다. 빈부 격차가 심화되었을 뿐 아니라 중상류층이 누리는 부와 사회적 지위가 실질적으로 세습되기 때문이다. 이제 미국에서 중산층 이하 계층이 유리천장에 가로막혀 사실상 신분상승을 꿈꾸기가 거의 불가능하게 되었다. 기울어진 운동장이다.
정운찬 전 국무총리. 서울대가 낳은 한국 최고의 엘리트 경제학자이다. 이런 정운찬 교수조차 서울대 입학이 불가능하다면? 십여 년 전 어느 정치인이 ’정운찬’ 전 총장이 요즘 태어났다면 아마 사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해 서울대에 들어가지 못했을 것'이라며 교육 양극화를 비판한 바 있다. 개천에서 용 나던 한국 사회가 어느새 용이 나지 않을 메마른 개천으로 전락하였다.
[20 VS 80의 사회]는 미국이 기울어진 운동장이 되고 한국 개천에서 용이 나지 않는 근본 원인을 진단하고 이를 풀기 위한 해법을 진지하게 다룬다. 이 책은 빈부 격차과 사회적 불평등이 심화되는 현대 사회를 비판하는 여타 서적들에 비해 다음 두 가지 측면에서 커다란 차별성을 갖는다.
첫째 대부분의 극심한 빈부 양극화 문제를 다룬 책들은 주로 상위 0.1% 내지 상위 1%의 상류계층이 부를 독점하는 현상에 주목한다. [부자들은 왜 우리를 힘들게 하는가?, 제이콥 해커·폴 피어슨 著]는 미국 상위 1% 상위층이 국민 전체 소득에서 차지하는 몫이 30%에 육박하고 있음을 대중들에게 처음으로 지적하였다. 이 수치는 2010년대 이전까지 부의 집중도가 가장 높았던 1929년 대공황 직전 수준을 이미 능가했으며 지금도 계속 늘어나고 있다. [21C 자본론, 토마스 피게티 著]는 빈부 양극화 심화 현상을 자본 성장률이 경제성장률을 상회하는 데서 기인한다고 규명하였다. 반면 [20 VS 80의 사회]는 상위 1% 만이 아닌 상위 1~20% 계층 역시 소득 성장률이 다른 계층보다 훨씬 크다는 점*에서 결국 상위 20% 계층에 양극화 책임이 있다고 일갈한다. 저자는 1979년~2013년 기간 동안 상위 1% 계층의 소득이 1.3조 달러 증가한 반면 상위 1~20% 계층은 2.7조 달러가 증가하여 상위 1%에 비해 두 배 가까이 소득이 늘어났음을 보여준다.
* [부자들은~]은 상위 20%에 해당하는 가구의 소득 증가율이 1% 가구가 기록한 증가율에 1/4에 불과하고 그 마저도 실질 임금 상승이 아닌 대부분 노동시간 증가에 의한 것으로 분석하였다. 이 책의 저자가 제시한 79~13년 사례에서 비록 상위 1~20% 계층의 소득 증가액이 1%의 두배라고 하지만 인당 소득 증가액으로 나누면 상위 1%는 동기간 인당 38만 달러 소득이 늘어난 반면 1~20% 계층은 4만 달러, 하위 80%는 1만 달러 증가에 그쳤다. 저자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부자들은~]의 주장대로 실질 소득 증가는 상위 1%에서 두드러졌다.
둘째 상위 20%의 중상류층은 자신들이 이룩한 사회적 지위와 부를 사실상 자녀에게 세습하고 있음을 다양한 사례로써 증명한다. 중산층 이하가 흉내내기 어려운 양육환경과 입시교육, 심지어는 불공정한 방법까지 동원하여 자녀들이 하위 계층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유리 바닥'을 깔아 준다는 것이다. 저자는 중상류층이 사회 패러다임을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설정함으로써 계층 간 상, 하향 이동 가능성을 사실상 차단시키는 폐단을 비판한다. 대개의 책들이 양극화 현상을 지적하고 이를 타파하기 위한 대안 제시에 머무른다는 점에서 이 책이 갖는 가장 큰 의의이자 차별성이라 할 만하다.
다음은 상위 20% 중상류층이 자신들의 지위를 이용하여 기득권을 유지하고 계층 이동성을 무산시킨 구체적 사례들이다. 1) 중상류층은 그들의 집합적으로 가지는 사회적 힘으로 도시와 주거형태, 교육제도를 바꾸고 노동시장을 변화시킬 수 있을뿐더러 여론과 공공 담론을 바꿀 수 있게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렇게 여론과 담론을 주도하는 기자, 싱크탱크 연구자, 방송국 PD, 교수, 논객들이 대개 중상류층이다. 2) 당연하게도 중상류층 아이들은 특권을 지니고 태어 난다. 그들의 부모들이 자기 자녀가 고임금 노동시장에서 요구하는 기술, 재능, 자질, 학위 등 유리한 스펙을 쌓게끔 무한대로 지원한다. 3) 오늘날 미국 사회는 60~70년대에 비해 확실히 절대적인 부가 증가했다. 중하류층도 절대 기준으로는 소득과 자산이 늘었다. 그러나 상대적 계층 이동성은 과거에 비해 현저하게 낮아졌다. 계층의 대물림이 견고하게 이루어지고 빈곤의 덫보다 부의 덫이 훨씬 강화된 탓이다. 시장에서 인정받는 능력이 계층에 따라 불평등하게 육성되고 부유한 사람들이 불공정하게 기회를 독점한 결과이다. 명문 대학을 졸업한 대졸 출신의 고소득자들은 자신과 엇비슷한 배경의 배우자와 결혼하여 소득을 배가하고 계층을 세습할 준비를 한다. 4) 부모 잘 만난 운과 2세의 능력 육성이 불평등하게 이루어지는 사회에서 능력을 중시하는 경쟁구도 역시 기울어진 일자리 시장을 만들어 낸다. 미국 국민의 30%가량이 대학 졸업을 하여 학사 학위 희소성이 떨어지자 중상류층은 자녀들을 대학원에 보내 석사와 박사학위로 고임금 자리를 독과점한다. 봉건사회가 신분과 지위로서 계급을 세습한다면 현대 미국 사회는 교육으로 세습한다. 5) 더 큰 문제는 불공정한 기회 사재기이다. 중상류 계층은 자신들이 몰려 사는 거주지에 하위 계층이 진입하지 못하도록 주거지를 분리시키는 토지 규제 정책을 풀 생각이 없다. 동문 우대 대학 입학 제도를 활용하여 능력이 처지는 자녀들을 부당하게 입학시켜 하위 계층 자녀들이 진학할 기회마저 박탈한다. 취업 시 가장 중요한 입사전형 요인인 인턴쉽을 자신들만의 이너써클 네트워크로 독점한다. 6) 상기한 현상을 해소하기 위해서 중상류층이 각성하고 솔선수범하는 해법을 제시한다. 개인 간 능력 차이를 부인할 수 없다 하여도 최소한 출발선이 평등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저소득층 자녀에게도 인적 자본을 평등하게 개발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불공정한 세 가지 기회 사재기를 시정하는 것이 시급하다.
브런치 회원들이 아메리칸드림이 없어진 미국 사회와 20% 중상류층이 벌이는 기회 사재기와 계층 이동성의 경직화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릴지 몹시 궁금하다. 또 오늘날 미국 사회에서 벌어지는 실상이 기실 우리 사회 민낯을 비추는 거울이라 한다면 이에 선뜻 동의할 수 있을까? OECD 통계에 따르면 미국은 상위 1%가 국민 전체 소득에서 19%를, 상위 10%가 전체 소득의 49%가량 점유한다. 소득 집중도에서 독보적인 세계 1위이다. 한국도 만만치 않다. 상위 1%의 소득 비중이 전체의 13%, 상위 10%가 전체의 45% 정도를 소유 중이다. 상위 1% 소득 집중도가 미국, 영국에 이어 3위, 상위 10% 소득 집중도는 미국에 이은 2위이다. 반면 소득분포상 중간소득의 2/3 미만인 저소득 빈곤계층 비중은 미국이 26%, 한국이 25%로 역시 빈곤층 비중도 세계에서 가장 높다. 미국과 한국은 세계적으로 빈부 양극화가 가장 극심한 나라들이다. 한국이 6.25 전쟁 이후 빠르게 미국식 자본주의를 도입했다는 점에서 어찌 보면 당연한 귀결이겠다.
그러나 다음의 몇 가지 측면에서 우리 사회가 미국보다 훨씬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첫째 소득 중간층과 중산층의 몰락이다. OECD는 중산층을 소득 중간층의 50%~150% 사이 집단으로 정의한다. 즉 소득 상위 26%~하위 75% 구간의 소득계층이 중산층이다. 미국의 1인당 GDP는 64,770$이다. 소득 상위 21%~하위 60%의 평균소득도 6만 불을 상회한다. 1인당 GDP 정도의 소득을 중간계층이 벌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 한국은 중간층의 소득이 훨씬 낮다. 한국의 1인당 GDP는 31, 940$ 수준. 원화로 치면 대략 3,830만 원이다. 이 금액은 상위 30% 전후 계층에서나 가능한 소득이다. 한국의 소득 중간층이 얻는 소득은 연간 2,500만 원에 불과하다. 중간소득자의 소득이 최저 임금을 살짝 상회하는 현실이다. 전체 소득자의 70%가 한 나라 경제에서 벌어 들이는 1인당 부가가치 합계액(GDP)에도 못 미치는 소득을 벌어 들인다는 사실은 그만큼 누군가가 부가가치를 더 가져가는 것을 뜻한다. 그들은 누구일까?
둘째 동일 계층 내에서도 근로자 가구와 비근로자 가구의 소득격차가 크다. 상위 10% 가구의 경우 근로자 가구 소득은 연간 1.4억 인 반면 비근로자 가구 소득은 1.1억으로 근로자 가구의 80% 수준이다. 문제는 이 비율이 소득분위가 하락할수록 더 커진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상위 21~30% 근로자 가구가 연간 7,600만 원을 벌 때 동일 계층의 비근로자 가구는 연간 5,400만 원을 벌어 상대비중이 70%에 낮아진다. 하위 50% 이하 계층은 이 비율이 50%대 이하로 급격히 떨어진다. 이러한 현상은 평균을 상회하는 임금을 받는 정규직에서 탈락하면 곧바로 월 200만 원의 비정규직이나 소득 대체율이 훨씬 낮은 자영업자로 전락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미국 사회보다 더 기를 쓰고 정규직, 좋은 직장을 선호할 수밖에 없는 배경이다.
셋째 실질 가처분 소득이 낮아지고 있다. 앙등하는 집값에 전세, 월세가 치솟아 주거비가 과거에 비해 큰 폭으로 올랐다. 냉정하게 말하면 그동안 우리 사회는 선진국에 비해 주거비용이 턱없이 낮았다. 낮은 주거비용이 현실화되었을 뿐이다. 17년 이후 집값이 오르기 전 모든 언론이 인구감소와 아파트 과다 공급을 근거로 앞으로 집값이 하락할 거라 청년세대에게 주술을 걸었다. 그 결과 청년세대가 비교적 싸게 집을 장만할 수 있는 기회를 빼앗아 장년층들의 부를 키워준 꼴이다. 젊은 세대들은 취업난까지 겹쳐 세대 간 부의 양극화마저 겪어야 한다. 한편 선진국과 달리 사교육비 부담도 매우 높다. 여의도 금융권 임원은 대표적 고소득자이다. 금융회사에 임원으로 근무하는 지인이 자녀 2명의 사교육비가 부담스럽다고 넋두리를 할 정도니 얼마나 심각한 일인가? 한국의 대다수 부모들은 자신들이 벌어들이는 소득에서 가용할 수 있는 최대치를 사교육비로 부담한다고 해도 무방하리라 본다. 헬조선이 따로 없다.
넷째 대학입시제도의 왜곡이다. 학생부 종합전형(학종)은 현대판 음서제도에 다름 아니다. 자기소개서를 풍부하고 윤택하게 작성하기 위한 스펙 쌓기를 하려면 부모의 적극적 관심과 상당한 경제적 지원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복잡한 수시전형도 매 한 가지다. 숙명여고 쌍둥이 사건이 시사하는 바가 무척 크다. 학부모들이 두 눈 부릅뜨고 있는 사교육 시장의 끝판왕 대치동에서 시험지가 유출될 정도라면 학부모 관심이 훨씬 덜한 지방도시와 시골에서 내신 관련 부정이 어떻게 벌어질지 가늠하기 어렵다. 지역 토호와 유지에게 기울어진 운동장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할 만하다. 대학입시에서 수시 비중은 76%에 달한다. 정시전형은 1/4에 불과하다. 19년도 서울 소재 4년제 대학 정원은 7.3만 명이다. 같은 해 고등학교 졸업자 58만 명의 13% 수준이다. 여기에 서울 인근 수도권 소재 주요 4년제 대학과 지방 국립대 정원을 합쳐도 대략 20%에 불과하다. 미국으로 치면 중상류 계층이 지원할 대학의 범주이다. 상위 20% 대학 정원의 3/4 이상이 부모의 지원을 받은 학생들로 수시와 학종에서 미리 선발된다고 가정하면 재수생을 포함한 나머지 수험생 55만 명들이 20% 상위 대학 3만 명 정시 정원을 놓고 박 터지게 경쟁해야 한다. 단순 경쟁률이 18.3: 1이다. 서울 소재 대학 경쟁률로 치면 무려 30: 1이다. 요즘 서울 소재 대학을 서울대라 부르는 게 충분히 이해된다.
우리 사회가 여가와 문화생활마저 최소한도로 하고 입시교육에 무한경쟁을 하는 이유는 이 책에서 지적하는 바대로 자녀들이 하위 계층으로 전락하지 않고 지금보다 나은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상위 계층으로 상승하기를 바라는 마음일 것이다. 부모 마음은 인지상정일 테니 말이다. 주거비와 사교육비에 졸라매야 하니 자녀를 많이 갖기도 매우 부담스럽다. 가임여성 1인당 출산율이 1명이 채 되지 않는 고질적인 저출산, 좀 더 심하게 표현하여 출산 태업은 사교육 부담과 맞벌이 여성의 마음 편히 양육할 수 없는 근로여건 때문이겠다.
2012년 부동산 가격 하락과 과잉 가계부채 문제로 온 나라가 떠들썩할 무렵 부동산과 가계부채 이슈에 대해 담론적 접근을 했던 적이 있다. 당시 언론이 떠들었던 가계부채 문제가 기실 큰 우려가 없고* 그간 우리 사회가 쌓아놓은 금융자산을 감안하면 부동산 가격이 과대평가되었다는 근거가 부족하다고 결론이었다. 오히려 장기 디플레이션을 촉발시킬 잠재 위험요인으로 소득 감소와 불평등 심화를 꼽았다. 소득감소로 삶의 질이 떨어져 양육부담이 커지자 가계는 출산 태업을 하기 시작하여 한국 경제 장기 성장동력을 훼손시키게 되는데 이를 막기 위해서 사회적 임금을 증가시키는 사회안전망 강화가 유일한 방법이라 진단하였다. 이 것이 가능하려면 사회적 대타협을 통해 계층 갈등을 해소하여 분배와 성장의 기틀을 마련해야 한다는 원론적 대안을 제시하였다. 재벌은 그간 저지른 잘못된 관행에 대해 진정 어린 사과를 하는 대신 현 지배구조를 인정받아 성장을 위한 투자를 주도하며 성실하게 납세한다. 정부는 세제개혁을 통해 전문직과 고소득층에 대해 직접세를 강화하여 몰락한 중산층과 하위 계층이 성장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는 요지이다. 이상적이나 현실적으로 매우 어려운 대안이다. 갈등을 치유하고 강력하게 추진할 수 있는 정치세력이 나오지 않는 한 불가능할 일이다. 가뜩이나 보수, 진보 간 대립이 극심하고 극우세력과 경직된 노동조합이 요지부동이기 때문이다.
* 2018년 국내 가계금융자산은 3,730조 원, 가계부채는 1,790조 원이다. 가계가 보유한 금융순자산이 1,940조 원이다. 기업으로 치면 부채비율이 낮은 견실한 재무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한국 가계부채 문제는 부채를 상환할 수 없는 상환능력 부족이 아니라 세계적 금융위기가 발생할 때 일시적인 유동성 부족에서 오는 자산 부채 만기 미스매칭 문제이다. 이를 해결할 유일한 방법은 가계 현금흐름을 의미하는 소득을 증가시키는 일이다. 무엇보다 소득을 지불해줘야 할 기업의 체력을 강화시키는 것도 중요하다.
[꽃들에게 희망을] 애니메이션
https://www.youtube.com/watch?v=UWt2LXbLoiE
[꽃들에게 희망을] 이화여고 합창단 노래
https://www.youtube.com/watch?v=kAKlCRd469A
리뷰어 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