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에 계수나무 한 나무 토끼 한 마리~" 초등학교 때 어린 학생들이 즐겨 부르던 동요 '반달'이다. 요즘 아이들도 이 곡을 읇조릴지 궁금하다. 서울 야경이 지금보다 화려하지 않았던 70년대 후반 밤하늘에 별들이 꽤나 총총 빛났던 걸로 기억한다. 그러나 이제는 서울에서 은하수 찾기가 불가능하다. 1년에 한 두 차례 지리산 종주길에 연하천이나 벽소령에서나 어린 시절의 은하수를 맛볼 수 있다.
[몽고 서부의 밤하늘]
몽고 서부 트레킹 야경. 그야말로 은하수에 별들이 가득 흘러넘친다.
어릴 적 서울 밤하늘이더라도 지금 몽고의 은하수에 비할 수야 없겠지만 동네 형, 누나들이 북두칠성, 카시오페이아 자리를 기준으로 여러 별자리를 두루 가르쳐 줄 정도는 되었다. 별들이 밤하늘을 수놓았던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없는 추억이기에 마음 한 구석이 아련하다. 40여 년이란 세월은 우리들에게 무척 오랜 시간이다. 하지만 무구한 나이를 먹은 별들에게는 눈썹 한 번 감는 순간보다 훨씬 짧은 찰나에 불과하다. 인간과 우주를 동일한 시간의 잣대로 가늠할 수는 없다. 인간에 비해 무한한 수명을 가진 별들은 동경의 대상일 수 있어도 친근한 이웃 같은 존재가 될 수 없다. 지금 사는 집으로 이사 온 지 10년이 다 되어간다. 이사를 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친한 형이 작은 관상용 행복나무 한 그루를 선물해 주었다. 양지바른 베란다에 놓고 키웠다. 가끔 영양제를 주는 미미한 정성임에도 쑥쑥 커 나가 조금만 신경 안 쓰면 천장에 닿아 가지치기와 분갈이를 여러 번 하였다. 행복나무와 엇비슷한 시기에 같이 키웠던 소철이 몇 해 못 버텼던 것에 비해 이 나무는 밑동이 꽤나 굵어지고 잎사귀가 어른 손바닥만 할 정도로 잘 자라 주었다. 매일 쳐다볼 때는 언제나 전날 모습처럼 보였지만 한 켠 두 켠 흐르는 시간을 쌓아 무성하게 컸다. 어쩌면 행복나무 덕에 강산이 한 번 바뀔 동안 안팎으로 무탈하게 아내와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던 거 같다.
[행복나무 - 헤테로파낙스 프라그란스 : 두릅나무과]
너무 무성하여 끈으로 주위를 묶어 주었다.
[나무, 이야기로 피어]는 시골에서 낳고 자라 도회에 나갔다가 다시 귀향하여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저자가 담담하게 쓴 에세이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겪은 55개 나무에 얽힌 에피소드를 소재로 신변잡기를 풀어냈다. 저자가 얘기하는, 나무와 얽혀 있는 추억 어린 정담들이 몹시 운치 있다. 여기에 수채화처럼 소담스럽게 그려진 나무 삽화들이 한층 동심을 불러일으킨다. 복잡한 현대사회에서 한 번 즈음 위안거리를 찾으려는 어른들을 위한 동화라 부르기에 손색없다.
추억이 깃들어 있긴 매한가지겠지만 나무는 별자리보다 우리 인생과 삶에 더 가깝다. 나무들도 우리네처럼 매일매일 삶과 죽음이 공존하기 때문이다. 나무는 매일 살고 매일 죽는다. 매일 살고 죽다니 무슨 말일까? 나무가 나이 들수록 살아있는 변재만 커지는 게 아니라 죽은 심재도 같이 자란다. 삶과 죽음이 함께 하기에 나무에 얽힌 사연들이 가슴 시리게 다가오는지도 모르겠다. 금슬 좋던 장애인 부부 사연을 그린 '그 남자의 꽃 목련'을 계림 여행 중에 읽었다. 알뜰살뜰 부인을 지극 정성으로 보살피던 남편 얘기에 뭉클하던 차에 추운 겨울밤 아내를 두고 먼저 가게 된 사연에 이르게 되자 마음이 시리도록 아팠다. 결혼한 이후로 잘해 주기는 커녕 아내 속을 얼마나 썩였을까 생각하니 미안한 감정이 부풀어 오른다. 터키 여행 중인 아내가 돌아오면 어깨라도 주물러 주고 싶다.
'못 생긴 게 아니라 그윽한 겁니다. 모과' 편에서는 못생겼으나 향기 좋은 모과 얘기를 다룬다. 모과는 그냥 먹기가 힘이 들어 주로 모과주로 담가 마신다고 한다. 손님상에 내가는 모과 술에 담긴 모과 한 조각을 어머니한테 받아 내어 술맛 나는 단물을 빨아먹던 저자의 추억에서 비슷한 어릴 적 경험이 떠오른다. 선친의 고향은 황해도 개성이다. 호방한 성격이셔서 친구분들과 자주 어울리셨고 종종 집에서 술자리를 마련하셨다. 그럴 때면 어머니께서 술안주로 개성식 음식을 장만하시곤 했다. 선친은 때론 주전자에 소주와 환타를 타서 드시기도 했다. 어린 내 입맛에도 달달한 환타에 끌려 친구분들이 귀엽다고 주시는 환타섞은 술을 숟가락에 찔끔 받아 마셨다. 초등학교 2학년 때는 동네 아주머니들이 주시는 환타 술을 받아 마시다 그만 술에 취해 결석을 하는 불상사가 있었다. 어머니와 함께 선친에게 무척이나 엄하게 꾸지람을 들었던 게 지금도 생생하다. 그 덕분인지 대학 입학까지 술은 일절 삼가했다.
저자도 나무로부터 돌아가신 부모님들의 추억을 되새기곤 한다. 논일하시던 아버지와 느릅나무 밑에서 새참 먹던 기억을 회상하며 느릅나무 껍질이 위장과 항암에 좋다는 구절 바로 뒤이어 가족들 어느 누구도 아버지 병을 알지 못했다는 넋두리에서 저자가 가진 회한이 느껴진다. 수국을 몹시도 좋아한 저자 어머니에게 남은 생애를 기쁘게 해 주었을 수국의 아름다운 모습이 저절로 그려진다. 저자는 수국이 닿는 성분에 따라 꽃 색깔이 변한다고 일러 준다. 마찬가지로 사람들 역시 타고난 그릇에 자신이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 성품과 삶의 궤적이 달라질 것이다. 내가 어떤 색으로 다른 이들에게 비치울지 궁금하다. 무엇보다 남들이 안 보는 자리에서도 부끄럽지 않아야 보기 좋은 색깔에 은은한 향내가 나지 않겠나? 愼獨이 힘들지라도 가능한 한 마음 수양에 힘써야 할 일이다.
중국 계림(桂林) 여행을 다녀왔다. 강가에 펼쳐진 기이하게 생긴 산들의 형상에 마음이 끌려 어렸을 때부터 가보고 싶던 곳이다. 카르스트 지형의 해저가 융기한 이후 수 억년 동안 침식되어 온갖 기암괴석 형태로 봉우리가 형성되었다. 금강산이 일만 이천봉으로 유명하다. 계림은 삼만 육천 봉이란다. 자고로 계림 산수 갑천하라 하여 중국인들에게는 꼭 가야 하는 유명한 관광지이다. 계림이란 지명은 계수나무가 많아서 유래했다. 실제 계림에는 발 닿는 곳마다 계수나무와 용수 나무를 볼 정도로 흔하게 넘쳐난다. 용수 나무라는 이름이 생소했으나 반얀트리라고 하니 쉽게 알겠다. 계림의 9월, 계수나무에 아직 단풍이 들지 않았지만 잎에서 은은한 향기가 퍼져 나온다. 저자 말대로 겨우내 떨켜를 준비하나 보다. 저자 고향 면소재지로 가는 10길 중에 신작로 따라 줄지어선 버드나무를 5리 나무라고 불렀는데 면까지 절반 가량 되는 거리에 있어 이름 지었단다. 5리 버드나무는 면에 볼 일 보러 가는 마을 사람들이나 영화 관람하러 가는 저자와 학급 동무들에게 그늘을 제공하는 쉼터 역할을 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있다. 로마 전성 시기에 온갖 물자와 사람들이 로마로 향해 오거나 사방 식민지로 뻗어 나갔을 것이다. 로마인들은 먼 여정에 지친 이들을 위해 그늘을 제공할 수 있게끔 우산 소나무를 개량하여 식민지 주요 근거지까지 도로 양편으로 줄지어 심었다. 5리 나무와 우산 소나무는 생김새가 다를지언정 여독에 지친 나그네에게 반가운 가로수 그늘을 내려 주기는 마찬가지 일게다.
[ 사진 왼쪽부터 중국 구이린 계수나무, 1,500년 이상 된 용수 나무, 로마 우산 소나무]
고대 로마 시가지 유적 가는 길의 우산 소나무가 무척 인상적이다.
어느 시골마을 초입이나 공터에 느티나무가 있기 마련이다. 느티나무 아래 평상을 두고 마을 사람들이 모여 쉬면서 일상을 나누곤 한다. 요즘으로 치면 마을의 거실이자 사랑방인 셈이다. 내가 어릴 때 살던 금호동 동네엔 느티나무가 없었다. 하지만 우리 집에서 10여 걸음만 발 내딛으면 동네아아이들이 편을 가려 축구를 할 만큼 널찍한 공터가 있었다. 동네 어르신들이 그 공터 한쪽에 평상 두 개가 깔아 두셨다. 여름철 저녁식사를 하고 나면 여기 모여 밤늦게까지 시간을 보내었다. 평상에 누워 아주머니들이 해주는 귀신얘기에 오금을 저리거나 다 같이 수박을 쪼개 나눠 먹었다. 공장에서 일하는 아저씨들과 훌라후프 오래 하기 내기를 한 기억도 새록새록하다.
바쁜 일상에서 우리는 삶의 기준점을 잃고 표류하는 걸까? 행복하기 위해 일하고 공부를 하는데 정작 행복을 잊고 사는 건 아닌가 싶다. 저자는 한 그루 감나무가 주는 행복의 크기를 헤아려 보았다. 주전부리 변변찮던 소싯적, 온 가족 간식이자 꿀보다 더 꿀맛 같던 홍시를 찾는 대신 블루베리, 망고, 체리 같은 새로운 과일을 찾는 현실을 못내 아쉬워한다. 오늘날 단 맛은 흔하고 너무 강하다. 과자를 왜 '菓子'로 적을까? 과일 열매처럼 단 맛을 준다고 해서 만들어진 단어인지 모르겠다. 과일 단 맛의 표준은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어쩌면 꿀보다 더 꿀맛인 홍시를 잘 말린 곶감이야말로 단맛의 기준이라 하면 내가 너무 앞서 나간 것은 아닐까? 달디 단 과일은 흔하게 많다. 하지만 우리 조상들이 단 맛을 제 철 아닌 시기에도 곁에 두고 먹기 위해 갖은 정성으로 노력을 다한 지혜를 경하하고 싶다. 홍시를 꿰어 선선한 그늘에 꾸덕꾸덕 말려 홍시의 단 맛을 한 층 더 끌어 올린 기다림의 미학이야말로 단맛 어린 菓子를 향한 조상들의 소박한 바람이기에감히 곶감을 과자의 기원이라고 단언한다.
곶감이 과자의 기준점이라면 이 책은 우리에게 삶의 기준점을 제시해준다. 나무에 쌓여 있는 추억과 동심과 잊었던 시간들을 모두 불러 내어 행복했던 그 시절을 떠올려 줌으로써 우리 인생이 지향하는 행복이란 게 기실 닿기 어려운 저 높은 곳에 있지 않고 고개 돌려 옆을 보면 지척으로 가까운 곳에 널려 있다고 일깨운다. 책을 읽으면서 더욱 기뻤던 게 있다. 우리말의 아름다움이다. 저자가 풀어내는 문장에서 내가 평소에 잘 쓰지 않았거나 몰랐던 우리말 단어가 꽤나 넘쳐흐른다. 어릴 적 은하수처럼 말이다. 나이 들며 잊히는 귀여운 방언과 순 우리말들이 도시 불빛에 가려진 은하수 별들 같다. 가끔은 저자처럼 아름다운 우리말을 일러주는 문학 작품들 품에서 쉬어 가며 우리말, 단어를 배워 가는 트레킹을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