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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운설 Jun 28. 2022

[서평, 리뷰] 아주 친절한 포르투갈 순례길 안내서

잘 비벼진 전주 성미당 육회 비빔밥


  내가 산티아고 순례길을 알게 된 건 아마 2005년  전후로 기억한다. 우습게도 산티아고라고 하니 칠레 산티아고를 먼저 떠올렸다. 당연히 칠레에 있는 트레킹 코스일 거라고 착각했다. 야고보 유해가 안장된 산티아고 콤포 스텔라 대성당이 스페인에 서북부에 위치하고 여러 개의 순례 루트가 있음을 뒤늦게 알았다. 나는 종교를 믿지 않고 신앙을 가지지 않은 비신자이다. 하지만 학부 시절 가톨릭 학생회에서 동아리 활동을 한 탓에 가톨릭 분위기에 낯설지 않다. 개신교에 비해 엄숙, 진중한 가톨릭 예식에 익숙하고 거부감이 없다. 그래서일까? 순례길이 있음을 알게 된 그 당시부터 비록 신자가 아니어도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고 싶은 동경이 마음 한 구석에 새겨졌다.


  코로나로 2년 동안 국내외를 불문하고 여행이나 트레킹 하기가 사실상 힘들었다. 2년 이상 지속된 코로나 금족령이 올 들어 조금씩 해금되는 중이다. 나도 내년 봄에는 프랑스 길을 걸을 결심을 굳혔다. 그러던 차에 구독 중인 네이버 밴드 '아주 친절한 산티아고 순례길 안내서'에서 "아주 친절한 포르투갈 순례길 안내서(이하 아주 친절한 ~)' 출간 이벤트를 보게 되었다. 책을 리뷰할 서평단을 모집하는 행사에 옳다구나 바로 신청했다. 흔하디 흔한 스페인 루트에 비해 포르투갈 루트 기행 서적이 거의 없다는 점과 언제인가 한 권의 책이라도 써 보리라는 작가 지망생의 의무감에서였다. 서평단 발표일이 지나도록 연락이 없었다. '떨어졌구나'하는 아쉬움이 무척 컸다. 자비로 구입하여 읽어도 되지만 작가 지망생이라는 허울에 못내 아쉬워 용기를 내어 브런치에 등록된 이메일로 기회를 주십사 하는 메일을 보냈다. 기쁘게도 흔쾌히 그러자는 답신이 왔다. 급작스럽고 다소 무례할 수 있는 내 제안을 무시할 수 있었음에도 출판사 담당자와 작가가 기꺼이 보여준 성의 덕분에 리뷰를 할 수 있었다.


  이 책을 한 마디로 말하자면 전주비빔밥 맛집 중 '성미당의 육회 비빔밥'이라 비유하고 싶다. 전주비빔밥의 양대 명가로 성미당과 한국집이 꼽힌다. 비빔밥은 보통 고추장과 다양한 나물을 밥과 함께 슥슥 비빈다. 한국집 비빔밥도 이런 스타일이다. 성미당은 좀 특별하다. 양념한 고추장에 미리 비벼진 밥 위에 나물이 고명으로 얹혀 있다. 나물만 잘 섞어주면 된다. 미리 비벼져 있으니 식성에 따라 고추장을 넣는 양이 달라져 비빔밥 맛이 달라지지 않는다. 주인장의 입맛과 레시피가 그대로 살아 있다. 물론 한국집도 고추장이 얹혀 나온다. 그러나 밥을 비비기 전이어서 식성에 따라 고추장을 더하거나 덜어내는 경우가 꽤 있을 것이다. 다년간 여행잡지 기자, 여행 칼럼니스트로 활약한 작가의 경험과 스페인 프랑스 길을 걸었던 순례 노하우가 꼭 필요한 정보들과 잘 비벼져 있다. 묘사된 데일리 코스대로 트레킹 하는 동선이 머릿속에 그려져 눈을 감으면 작가 뒤를 따라 걷는 듯한 증강현실이 눈앞에 다가온다. 거기에 육회의 탱글탱글한 식감처럼 장면마다 통통 튀는 작가의 발랄하고 여운 어린 대화와 심정이 한가득 펼쳐져 있다.  


  내 글 쓰는 재능이 특출하지 않다. 그렇다고 손 맛이 가득하게 이야기를 풀어내지도 못한다. 그럼에도 언제인가 책을 출판하겠다는 용기와 의욕만 충만하다. 이런 나에게 '아주 친절한 ~'은 커다란 의문을 던진다. 2 년 전에 기행 했던 순례길을 일정별로 특정 장소에서 보고 듣고 느꼈던 일들을 어떻게 생생히 적어낼 수 있을까?  이 책을 읽다 보면 작가의 탁월한 기억력만이 아니라는 추론에 이른다. 걷는 틈틈이 녹음과 동영상, 사진을 남겼을 것이고 매일 숙소에 도착한 다음에는 기회가 날 때마다 인상적인 에피소드를 정리하는 부지런함을 보였을 일이다. 글을 쓰기 위해 소재를 찾고 마련하는 바지런함이야말로 꼭 작가가 갖춰야 할 요건이라면 내겐 작가적 소양이 턱없이 부족한 듯 하니 그리 유쾌하지 않다. 


   '아주 친절한 ~'까지 내가 읽은 순례 기행 서적이 4 권이다.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을 분량이다.  순례 기행 서적은 몇 가지 전형이 있다. 초행자가 알아야 할 사항 위주에 간단한 기행 감상(산띠아고 路, 네 개의 길), 사진집 스타일의 에세이 화보(산티아고 가는 길), 순례길에서 일어난 신변잡기와 삽화(어찌 됐든 산티아고만 가자) 등으로 나뉜다. 대개의 순례 서적들도 순례길에서 얻은 감상에 사진, 그림, 삽화 등이 적절하게 삽입되어 있다. '아주 친절한' 역시 비슷한 전형을 따른다. 작가가 서술한 순례기행이 알짜 정보와 코스 묘사, 트레킹 와중에 겪은 일상 등이 맛깔스럽게 버무려져 있다. 


  하지만 '아주 친절한 ~'은 성미당의 육회 비빔밥처럼 몇 가지 돋보이는 요소들을 지녔다. 첫째는 희소성이다. 포르투갈 루트를 다룬 순례기행 서적이 거의 드물다. 손에 꼽을 정도다. 까미노를 걷는 순례객 중 포르투갈 루트를 걷는 이들이 20%에 불과한 걸 감안해도 그렇다. 이 책은 리스보아에서 산티아고에 이르는 세트럴 루트 642km 여정을 주로 다룬다. 여기에 양념 삼아 포르투 바닷길과 스피리추얼길을 간략히 소개한다. 리스보아부터 포르투에 이르는 389km 길은 산티아고 방향을 가리키는 노란 화살표가 드물고 중간중간 고속도로와 국도를 무단 횡단하거나 갓길을 꽤나 걸어야 한다. 센트럴 루트 절반 이상 길이 제목처럼 친절하지 않다. 작가의 고생담이 더욱 생생하게 다가오는 이유이다. 리스보아부터 걸을 순례객들이 참조할 사항이 상당히 많다. 


  둘째, 사진이 거의 없다. 처음 책을 받아 펼쳤을 때 중고등학교 교과서처럼 가로 세로 2cm 여백을 제외하고 빼곡히 정성스레 적혀 있는 문장들에 눈이 저절로 갔다. 그래서 본문에 사진과 그림이 하나도 없다고 착각했다. 오죽하면 책을 잘 받았다는 답신을 보내며 사진 없는 기행 서적이 처음이라 무척 인상적이라고 썼을까! 찬찬히 읽으면서 사진이 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세보지 않았지만 삽입된 사진이 아마 36 장 일 것이다. 목차 배경 사진 1 장, 29개 챕터 첫 페이지 배경마다 하나씩 모두 29 장에  삼 부로 구성된 말미마다 한 장씩 3장. 여기에 본문 중 유일하게 삽입된 이탈리아 순례객 '신시아'를 찍은 사진 3장. 더하니 총 36 장이다. 삼 부 말미와 신시아 사진을 제외한 30 장의 사진이 목차와 챕터 첫 페이지 배경으로 쓰여 사진이 존재한다는 걸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사진이 없다고 오해할 만했다. 따라서 책을 읽을 때 사진이 주는 시각 효과를 동시에 연상하긴 쉽지 않다. 반대급부로 문장이 묘사한 장면과 작가의 감정선으로 이미지가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눈앞에 실재하지 않는 장면이 보이는 착각이 드니 과장하면 증강현실을 체험하는 것과 같다. 증강현실을 맛보기 위해 텍스트에 집중하는 부수적 효과가 따라온다. 


  셋째, 생소한 포르투갈 센트럴길에 꼭 필요한 정보들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다. 챕터 첫 페이지에 당일 경로 요약, 거리, 걸음수, 지출 내역, 숙소 등을 도표화하여 깔끔하게 기재했다.  본문에도 틈나는 대로 경로를 진행하는 와중에 주의해야 할 사항들이나 이정표 등을 꼼꼼하게 적어 놓았다. 마치 풀 텍스트로 까미노 경로를 설명한 Cicerone 출판사의 '포르투갈 까미노 가이드북'(이하 본문 구절을 직간접적으로 발췌, 인용한 부분은 빨간 글씨에 밑줄로 구분한다)처럼 말이다. 이 책을 읽고 센트럴길을 걷는다면 난처할 상황들을 제법 많이 피할 수 있을 것이다. 


 넷째, 디지털 이스터에그가 도처에 무궁무진하다. 본문에 과감히 사진, 그림, 삽화 등을 생략한 대신 꼭 필요한 지도와 각종 디지털 이스터에그가 심심치 않게 깔려 있다. 이스터에그는 게임이나 영화에서 개발자나 감독이 재미로 숨겨놓은 메시지나 기능을 뜻한다. '아주 친절한~'에도 디지털 이스터에그가 상당히 많다. 우선 챕터 분위기를 잘 설명하는 노래를 QR코드로 한 곡씩 소개한다. 이상은의 '언젠가는' 유튜브 음원을 보며 이 노래 가사가 이렇게 좋았나 싶었다. 지인에게 얘기했더니 이 노래 가사가 와닿으면 비로소 어른이 된 증거라던데 내가 이제야 철인 든 것인지. 사진이 거의 없지만 당일 코스를 걸으며 찍은 동영상과 사진이 편집된 QR 코드를 본문 중간중간에 심어 놓았다. 본문을 읽다 잠시 QR 코드를 핸드폰 카메라로 찍으면 유튜브에서 하루 여정이 정리된 영상을 볼 수 있다. 책 말미에는 순례길 준비에 필요한 각종 내용들이 주제별로 QR 코드로 분류되어 있다. 필요한 사항을 찾아 핸드폰을 들이대면 해당 정보를 접하게 됨은 물론이다.  


  하루 일정을 찍고 녹음하고 기억한 것을 까미노 걷는 틈틈이 기록하고 요약한 작가의 부지런함이 순간적인 감정, 사건, 장면들을 독자에게 생생히 전달해준다. 하루 일과를 시간대별로 현장감 있고 날 선 감정을 제대로 맛볼 수 있도록 써 내려간 것이 다른 기행 서적과 비슷하면서도 가장 큰 차별점이 아닐까 싶다. 


  한강 곳곳에 산재한 공원과 산책길, 지자체마다 경쟁하듯 개설한 수많은 둘레길, 한반도 남단을 순환하는 코리아 둘레길(서해랑길 - 남파랑길 - 해파랑길 - DMZ 평화의 길, 총연장 4,544KM)까지. 경제력이 커지자 불과 일이십 년 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관광, 여행 인프라가 마련되었다. 포르투갈길도 마찬가지다. 스페인 국민 소득의 3/4에 불과해서 그런지 포르투갈길 인프라 수준이 우리네 일이십 년 전과 같은 느낌이다. 까미노를 걷기에 제법 부족한 점들이 많다. 대신에 반대급부로 얻는 것도 상당하다. 요즘 우리 시골 인심이 어떤지 모르겠다. 많이 변했다고 하지만 도회지에서 꽤 벗어나 군락을 이룬 마을이라면 아직도 순박하고 후한 인심이 남아있다고 믿는다. 책에서 맛본 포르투갈의 인심이 이에 다르지 않다. 외지인을 경계하고 배척하지 않는다. 곤궁에 쳐한 순례객에 진심으로 친절을 베푼다. 베트남 사람들에게서 한민족의 끈질긴 근성과 노력을 떠올릴 수 있다면 포르투갈 사람들에게선 이제는 우리에게 점점 희미해지는 정이 앞선 사람 사는 맛을 엿보게 된다. 돈과 여권에 까미노 소지품을 한가득 담은 배낭을 순례길 첫날 파티마 순례하는 벤피카 성당 신자들에게 주저 없이 맡긴 작가가 놀라웠다. 하지만 잠시 한 눈 판 사이에 예정에 없던 일행을 잃고 오후 반나절을 헤맨 작가를 만나는 포르투갈 사람들마다 걱정스럽고 안타깝다는 시선으로 "그래 밥은 먹었니"라는 물음에 미소가 짓어졌다. 밤새 안녕하고 아침은 먹었냐던 어려웠던 시절의 우리식 인사를 듣는 착각이 일어서다.   


  첫날부터 작가가 마주친 포르투갈 사람들의 정감 어린 모습은 포르투갈 국경 도시 발렌싸까지 어디서나 볼 수 있다. 벤피카 교우, 또말가는 길의 부부, 파티마 루트의 아주머니, 아나지아의 부녀가 운영하는 펍, 포르투갈길에서 입 소문난 페르난다 알베르게 주인 부부. 사람 냄새나는 맛에 까미노를 걷는 게 아닌가 싶다. 스페인길도 그러하겠지만 유달리 포르투갈길에서 그 내음이 더욱 진하게 느껴진다. 미술 하는 후배는 은퇴하면 남편과 포르투갈에서 살고 싶다고 했다. 지중해의 눈이 시린 짙푸른 하늘과 아름다운 경치이겠거니 여겼다. 맑고 아름다운 경치는 기본, 순박하고 친절한 인심이야말로 후배가 포르투갈에 빠지게 된 결정적 요소이진 않았을까! 

  

  순례길을 걷는 것도 일종의 여행이다. 모두가 구도를 하듯 고행을 즐길 필요가 없다. 이삼십 km를 애써 걸어 기진맥진한 몸을 이끌고 숙소에 도착하여 알베르게 주방에서 대충 끼니를 때우는 건 허망하다. 그러니 여행의 즐거움을 만끽하기에 식도락만 한 게 없다. 스페인길도 그러하지만 포르투갈길 역시 먹거리가 풍성하다. 지중해의 풍족한 햇살이 주는 축복이다. 작가는 지중해 연안을 여행할 때 좋은 점으로 저렴하고 양질의 로컬 와인과 싱싱한 올리브 조림, 풍미 가득한 치즈를 꼽는다. 포르투갈길에서 흔히 접하는 메뉴이다. 포르투갈길의 장점 중 하나가 물가가 싸다는 것이다. 포르투갈 빵을 예로 들겠다. 주먹 두 개만 한 빵 6~7 개 한 봉지에 0.75 유로란다. 저렴한데 맛있기 조차하다. 그래서 빵의 어원이 포르투갈인가 보다. 어제 파리바게트에서 소금 빵을 샀다. 5개에 만원이다. 크기도 주먹 하나 반보다 작다. 나름 시그니처 아이템이지만 양으로 따지면 10배 이상 차이가 난다. 빵 표면에 슬라이스 한 생마늘을 문질러 마늘향을 입힌 다음 올리브유를 두르고 토마토 슬라이스를 얹혀 소금을 뿌린 빵 꼰 토마테. 돌아오는 주말에 두툼하게 썬 바케트나 반으로 가른 베이글로 만들어 먹을 작정이다. 7월 무더위가 시작될 즈음에는 맥주에 레모네이드를 적절한 비율로 섞은 끌라라에 도전할 계획이다. 레시피가 1천 가지가 넘는다는 바깔라우(대구), 새끼 돼지 통구이인 레이탕. 스페인의 '순례자 메뉴'와 비슷한 플라투 두 지아(오늘의 접시)까지. 먹거리가 풍부하니 식도락을 즐기기 제격이다. 내년 프랑스길을 걸은 다음 다시 산티아고 순례길을 트레킹 한다면 주저하지 않고 포르투갈 센트럴길을 택할 것이다. 다채로운 식도락에 코로나 여파로 물가가 올랐을 테지만 여전히 저렴하리라 기대된다.


  누가 가라고 떠밀기는커녕 왜 사서 고생이냐는 데도 왜 순례길을 기꺼이 걸으려는 걸까? 신앙이 없으니 믿음과 구원을 위함은 아니다. 나를 찾고자 함도 아닐 것이다. 험한 산을 오르거나 하프 마라톤이나 100km 이상 장거리 라이딩을 한 경험으로는 육체가 부담을 느끼는 환경에서 나를 찾을 겨를이 없다. 그저 숨 몰아쉬며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것에 급급할 뿐이다. 어쩌면 지금껏 살아왔던 시간들을 너무 쉽사리 지나쳐 보냈다는 아쉬움이 한 가지 이유일 게다. 마치 작가가 어려웠던 길을 생생히 기억하고 무난했던 길은 쉬이 잊었듯이 말이다. 쉽게 보내고 무던하게 지나쳐 이미 박제가 돼버린 과거에 연연하고 싶지 않다. 까미노를 걸으며 겪게 될 고행을 묵묵히 받아낼 수 있다면 다가올 미래의 시간들도 좀 더 충실할 수 있겠다. 작가가 지적한 것처럼 젊은이들은 젊음의 시간을 소비, 아니 낭비해도 된다. 허튼 낭비가 아까울 수 있으나 도전과 실패에서 체험하고 얻을 것이 많다. 그러나 내 나이 또래에선 이제 소중한 시간을 아껴 담아 살뜰하게 꾸려야 한다. 요즘 생애주기 펀드(TDF,  Target Date Fund)가 각광이다. 은퇴 시기에 맞춰 생애 주기 별로 주식과 채권 비중을 조절해준다. 젊었을 땐 주식 비중이 높고 은퇴 시기에 가까울수록 채권 비중이 늘어난다. 채권 역시 위험 자산이지만 주식보다 안전하기 때문이다. 경험을 위한 시간은 주식과 비슷하다. 젊을 때는 실패를 여러 번 해도 만회할 기회가 많다. 까미노를 걷는 다양한 연령대는 각자의 위치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나름의 시간을 즐길 것이다. 누구는 발랄하게 어떤 이는 차분하게. 나는 그저 17년 넘은 로망에 몸을 맡기고 싶다.  뮤지컬 연출가인 박칼린은 스트레스가 극심할 때마다 자연에 몸을 맡긴다고 한다. 자연의 거대한 풍광에 서면 어떤 스트레스나 압박감도 사그라기 때문이란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쌓인 은밀한 스트레스를 거둬 내고 싶은 본능 또한 한몫을 차지하겠다고 나선 지도 모른다. 


  로마 제국의 영화가 아직까지 유럽 곳곳에 유산으로 남아 있다. 까미노 순례를 하다 보면 로마 유적을 쉽게 볼 수 있다. 포르투갈길에서 로만 로드가 중간중간 등장한다. 길 가장자리가 넓고 평편하게 박석이 깔려 있다. 아마 마차 수레바퀴가 지나는 부분일 것이다. 길 안쪽은 주먹만 한 돌들이 들쭉날쭉하게 자리 잡아 포장되었다. 아주 오래전에 이 길을 말들이 가뿐 숨을 내지르며 질주했을 것이다. 산티아고 가는 길이 끊임없이 새로 개통되어 이어지고 있다. 비슷하게 영국 도버부터 이탈리아까지 이어진 로만 로드 1,700km를 걷는 트레커들이 제법 늘고 있다. 몇 년 전 직장을 이직하는 휴지기에 선배 한 분이 서울에서 목포까지 도보로 국토 종단을 했다. 응원차 아침 일찍 KTX로 천안에 들러 두어 시간 같이 걸은 다음 선배가 천안을 빠져나가는 걸 보고 집으로 되돌아왔다. 코로나가 확산되기 전인 2020년 10월에는 이틀간 해파랑길을 걸은 적이 있다. 고성까지 완주할 예정이었으나 2년 가까이 멈춘 상태다. 생장으로 떠나기 전에 해파랑길 750km를 먼저 걸을 작정이다. 올여름이 지나면 길을 나서야겠다.


  1980년생 이후로 독일인 평균 키가 작아지고 있다. 독일에서도 키가 줄어드는 게 화두라는데 그 원인을 모른단다. 추정컨대 이민이 원인일 것이다. 터키, 중동, 아시아에서 넘어오는 이민자들이 독일 통일 이후에 급격히 늘어났기 때문이다. 게르만 민족보다 유전적으로 키가 작은 인구 비중이 꽤 늘었다. 지난 20년간 이민자가 300만 명 이상 늘어 이제 1,040만 명을 넘어섰다. 독일인 7~8 명중 한 명은 이민자인 셈이다. 북한 주민들이 오랜 기간 이어진 식량난 탓에 우리와 체격 차이가 제법 난다. 2025 년이면 광복된 지 80 년이다. 이데올로기와 전쟁의 상흔과 갈등으로 남남보다 더 못한 사이가 된 지 너무 긴 세월을 보내왔다. 해파랑길과 내년 까미노를 무사히 완주한 다음에 콤포 스텔라 대성당에서 푸메이로 의식과 순례자 미사를 드리며 조금이라도 우리의 동질감이 회복되기를 기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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