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운설 Jul 06. 2021

궁극의 소리를 찾아서 - 리니어 트레킹 턴테이블 사용기

파이오니어 PL-L1000

  메타버스 시대에 한물간 빈티지 아날로그 오디오가 인기몰이를 하고 있습니다. 2010 년대부터 불기 시작한 LP와 턴 테이블 복고풍이 대표적 사례입니다. 요즘은 카세트테이프와 카세트 데크마저 마니아 층을 넘어 유행의 조짐이 보이고 있습니다.


   2011 년부터 매년 서울 레코드 페어가 열립니다. 신보나 중고 음반과 음악 관련 상품들을 판매하는 부스가 마련되는 장터입니다. 작년에는 코로나19로 행사가 취소되었지만 1만 명이 넘는 국내 최대의 레코드 축제로 부상한 LP 페스티벌입니다. 레코드 페어나 황학동 중고시장, 혹은 용산 전자상가나 충무로 지하 레코드 가게를 들릴 때마다 LP가 각광받기 전에 왜 미리 중고 음반을 수집해 놓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에 사로잡히곤 합니다. 2008 ~ 2009 년 당시만 해도 웬만한 클래식, 국내 가요 음반 한 장당 1천 원 남짓에 구할 수 있었거든요. 제가 턴 테이블을 들여 LP를 모으기 시작한 때가 2010 년 겨울이었으니 불과 1 년만 일찍 시작했었으면 하는 후회가 큽니다. 그러나 항상 만시지탄인가 봅니다. LP를 수집하기 시작했을 때에도 보통 장당 3천 원 꼴, 좀 비싸다고 여겨지면 5천 원에서 8천 원을 호가했었으니 지금과는 격세지감이죠. 언제나 늦었다고 할 때야말로 이르다는 옛말이 맞습니다.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랩과 빠른 비트, EDM으로 무장한 디지털 음원이 주도하는 주류 음악에 역행하여 LP가 인기를 끌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LP로 올드 가요나 팝을 듣다 보면 내가 정말 장년이 되었구나라는 생각이 들고 이러다 시대에 뒤떨어지는 건 아닌가 하는 불안에 휩싸이곤 합니다. 그러나 군더더기 하나 없이 무미건조하게 들리는 날 선 소리가 아닌 가슴을 울리는 뭉툭하면서도 선명한 소리야말로 LP의 진정한 맛이라 여겨집니다.


  스팀으로 뽑은 아메리카노가 CD라면 한 줄기 한 줄기 정성 다해 내려 시간을 두고 추출한 드립 커피가 LP라 비유할 수 있습니다. 병입 된 지 몇 년 되지 않아 묵직한 탄닌의 텁텁함만이 강조되는 영한 와인이 CD라면 공기 잘 통하고 서늘한 카브에서 오랜 세월 와인의 잠재력과 풍미를 한 껏 일깨워 떨떠름한 탄닌이 부드럽고 다채로운 향기로 승화된 올드 빈티지 와인이 LP라 할만하지요.


  아날로그를 시작한 지 10 년이 되어가는 데도 여전히 초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날로그는 톤암과 카트리지에 따라서 다양한 음색을 즐길 수 있다는 매력이 있습니다. 애써 비싼 턴 테이블을 여러 대 구하는 대신에 적당한 가격대의 톤암과 카트리지를 다양하게 마련해 놓으면 되는 것이죠. 이런 사실을 알면서도 정작 그간 장만한 카트리지가 4 개 밖에 되지 않습니다. 설치할 엄두를 내지 못하니 여분의 톤암을 구비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고요.  겨우 침압을 맞추고 오버행을 조절하는 초보적인 세팅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애꿎은 턴 테이블만 6번 바꿈질을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정착한 게 럭스만 PD-121과 토렌스 320MK III입니다. 럭스만 PD-121를 들일 때는 내심 내 생애 마지막 바꿈질이라 다짐했습니다. 친한 선배의 지인이 급하게 내놓은 걸 바로 입양했는데요. 원매자께서 어렵게 구해서 장착한 카본 암대가 달린 톤암으로 업그레이드된 모델입니다. 카본 암대와 오토폰 브론즈가 재현해주는 섬세한 소리가 정말 예술이고요. 토렌 턴은 둘째 누님 댁으로 장기 원정 보냈습니다. 누님이 질릴 때 반납받을 예정으로요.   


[럭스만 PD-121]


  그럼에도 가끔 장터에서 리니어 트레킹 방식의 턴테이블이 출현하면 한 번 써보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히곤 했습니다.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우선 리니어 트레킹 방식의 희소성에 있습니다. 럭스만 턴처럼 대부분의 턴들은 톤암이 턴테이블 상단 우측에 위치합니다. 톤암이 두 개인 모델일 경우에는 상단 좌측에 하나 더 장착합니다. 듀얼 암을 쓸 때는 보통 롱 암과 숏 암으로 구성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리니어 트레킹 방식은 톤암이 상단 뒷부분, 아니면 중앙 우측 부분에 장착되어 있습니다. 그만큼 외관이 상이하여 이색적입니다. 익숙한 것을 지겨워하는 성격 탓인지 독특한 구동 방식에 호기심이 일었습니다. 두 번째로는 재생의 완벽성 때문입니다. 럭스만과 같이 상단 오른쪽에 장착된 방사형 톤암의 경우 LP의 위치에 따라 카트리지의  바늘이 소리골의 중심을 정확하게 트레킹 할 수 없습니다. 도입 부분에 오버행을 맞추면 LP의 후반부나 종료 부분에서는 그루브 중심에서 벗어나 측면을 긁으며 재생하게 됩니다. 따라서 아무리 오버행을 맞춘다고 해도 어느 정도의 왜곡을 피할 수 없는 것이죠. 반면 리니어 트레킹 방식은 LP 중심축의 수평선과 정확히 수직으로 직교하여 소리골의 중심에서 그대로 재생해주기 때문에 음의 왜곡 없이 녹음된 그대로 소리를 들려줄 수 있습니다.


[방사형 톤암의 오버행 편차]



[리니어 트레킹 방식의 장점,  출처 : vinylengine]


  원음을 그대로 재생해줄 수 있다는 장점에도 선뜻 리니어 트레킹 턴 테이블을 입양하기에 주저했습니다. 인터넷 검색 결과 내구성이 약해 유지 보수가 쉽지 않고  수리 또한 만만치 않다는 중론 때문입니다. 장터에 나온 리니어 턴 매물들이 하이엔드 라인업도 아니고 디자인마저 그다지 마뜩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작년에 JBL 166을 양도해주신 동호회 회원님 댁에서 고장 난 채 10년가량 방치한 파이오니아 PL-L1000을 보곤 한눈에 반해 버렸습니다. 인자하고 후덕한 인상의 할아버지, 할머니. 노부부께서 20 년 이상 정성스레 아끼며 감상했던 기기라서 그런지 더 마음이 갔습니다. 시크하게 검은색으로 무장한 베이스, 튼튼한 생김새, 묵직한 리니어 톤암, 조그셔틀로 이동하는 암대도 매력적이었습니다. 정비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무엇보다 파이오니아가 야심차게 만든 플래그쉽 리니어 턴으로 80 년대 초 발매 당시 정가 10만 엔을 상회한 턴이라는 사실에 놀라기도 했습니다. 구글 검색을 하니 해외에서 아직도 유저들 사이에 호평받는 인기 모델이더군요. 구글링으로 유저 매뉴얼도 구했습니다.


  전원 버튼을 누르면 암대가 이동은 하지만 톤암이 떨어지지 않아 방치된 상태였습니다. 용산에 턴 테이블 정비를 잘해주는 업소에 의뢰했습니다. 리니어 턴이 정비하기 어려워 어쩌면 정비가 안될 수도 있고 복원이 안되더라도 기본 경비가 소요된다는 말에 잠시 주저되었지만 정비를 의뢰했습니다. 결국 당초 예상했던 정비 비용보다 15만 원가량 더 나왔습니다. 예상보다 비용이 더 커진 건 디폴트 RCA 선재가 낡아 웨스턴 일렉 1930 년대 선재로 RCA 케이블을 교체했기 때문이에요. 인수한 대금에 수리 비용까지 만만찮게 지출되었지만 복원이 잘 마무리되었습니다. 빈티지 슈어 카트리지로 감상하니 매력적인 음악을 들려줍니다. V15 타입 4가 클래식 현악에도 매칭이 좋은 것 같습니다. V15 타입 4도 오토폰 브론즈처럼 가늘고 섬세한 소리 성향입니다. 브론즈가 여성 소프라노라면 V15 타입 4는 카스트라토입니다. 가녀리면서도 폭발적인 에너지가 넘치는 카스트라토가 슈어 V15이고요. 4옥타브 솔, 라를 넘나드는 소프라노 콜로라투라야말로 오토폰 브론즈가 아닐까 해요.


앞으로 메인 턴을 오토폰 브론즈의 럭스만 PD 121으로 삼고 PL-L1000은 서브 턴으로 사용하며 이 앨범 저 앨범 감상하렵니다. 시간 나는 대로 자주 들으면서 아끼며 광을 내주어야죠.


[파이오니아 PL-L1000]


[파이오니아 PL-L1000 재생 동영상 - 행진 일부분]


[파이오니아 PL-L1000 재생 동영상 - 립스틱 짙게 바르고]


매거진의 이전글 대화면 선택 - 더프리미어 9 or 85인치 8K?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