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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아 Aug 31. 2023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1 광해군일기

경험 부족의 아쉬움이 남는 폐주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로 세간에 더욱 잘 알려진 광해군은 선조와 공빈 김 씨 사이에서 태어난 둘째 아들로 자신의 생모인 공빈 김 씨는 산후통으로 광해군이 세 살 되던 때 일찍 세상을 떠났다. 어미를 잃고 외롭게 자랐지만 문제아였던 형 임해군과는 달리 모범생으로 살았기에 대신들의 평판이 좋았고 정철이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해야 한다고 주장하다 유배당하는 사건까지 발생할 만큼 누가 봐도 세자로서 부족한 점이 없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급하게 세자로 책봉된 뒤 피난길에 오른 광해군은 아버지 선조와 분조(조정을 둘로 나눔) 하여 요동으로 가길 원했던 선조는 의주로, 광해군은 함경도 방향으로 향했다. 하지만 광해군이 함경도로 미처 향하기도 전에 이미 가토가 함경도를 점령한 상황이라 영변에서부터 평양성 주위를 7개월 동안 떠돌면서 분조를 이끌었다. 하지만 광해군을 제외한 다른 왕자들은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란 말처럼 임해군과 순화군은 전시 상황임에도 패악질을 하며 왜군의 포로가 되어 나라에 부담을 주는 만행을 저질렀다.


 두 번의 왜란은 조선의 근간을 흔들어 버린 조선 역사상 최악의 사건이었다. 특히 전쟁 중 전사하거나 포로로 잡혀가고 학살과 굶주림으로 인구수가 급격히 줄어들었으며 논과 밭은 황폐 해졌다. 당시 유교적 신분질서도 와해되고 있어 매관매직이 남발되었고 전공을 쌓은 이는 면천되거나 신분이 상승되어서 피라미드식 신분 체계는 무너 저버렸다. 특히 <도자기 전쟁>으로도 불리는 왜란은 기술 좋은 도공들이 거의 대부분 일본으로 붙잡혀가 조선의 도자기 문화에 큰 타격을 주었다.


 선조는 왜란 중 군주로서 절대 하지 말아야 할 것 중 두 가지 큰 실수를 범했는데 하나가 명나라로 망명하려고 했던 것과 다른 하나는 전선에서 목숨 걸고 싸운 전쟁 영웅에 대한 적절한 대우를 하지 않고 그들의 공적을 폄하한 것이다. 심지어 무공을 세운 장군들을 질투하며 공신 명단에 없거나 별 볼 일 없는 것으로 치부했다. 군주로서 책임은 지지 못할망정 무공을 세운 신하와 세자를 질투하는 왕의 자리가 어울리지 않는 질투의 화신이자 콤플렉스 덩어리 그 자체였다.


 설상가상으로 전쟁 중 광해군의 행적을 높게 평가했던 명나라는 전후 광해군의 세자 책봉에 대한 승인을 꺼려했고 의인왕후가 세상을 떠났다. 새롭게 중전으로 간택된 인목왕후 김 씨와 선조 사이에서 태어난 유일한 적자 영창대군의 탄생은 광해군의 세자 자리를 방해할 뿐만 아니라 위협적인 존재가 되었다. 당시 정권을 잡았던 북인의 일파, 소북의 유영경이 이끌던 유당은 영창대군의 지지세력으로 대신들마저 광해군을 저버리는 사면초가의 상황에서 전쟁 중 참된 리더로 추앙받던 광해군은 무려 10년이나 불안과 우울의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선조의 급작스러운 죽음으로 왕위에 오른 광해군은 정치적 지지 세력이 약할 수밖에 없었다. 영창대군파인 유영경을 유배 보내 반대파를 제거하며 오현 종사의 승인으로 대신들을 지지를 얻게 된 후 점점 왕실은 안정을 찾게 되었다. 공납의 폐단으로 어려운 백성들을 위해 이이가 주장했던 대동수미법을 기반으로 대동법을 실시하여 경기도에 국한되기는 했지만 현실적인 조세 부과를 하려고 했으며 군사를 강화하여 북방에 대한 대비책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런 광해군의 개혁에도 불구하고 시대적 요구에는 한참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었으며 보수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하여 광해군을 개혁군주로 평가하는 것에도 무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전후 복구를 위해 많은 노력을 했지만 광해군을 실패의 길로 이끈 것은 바로 ‘옥사’였다. 황해도 봉산 땅에서 시작된 봉산옥사를 필두로 황당무계한 일로 역모라 추궁하였으며 광해군은 친히 국문장에 나와 친국하는 모습을 보였다. 계축옥사로 영창대군이 죽임을 당하고 인목왕후까지 폐모론에 시달렸으며 수많은 옥사로 정국이 불안해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당시 여진족의 통합으로 급격히 성장한 금나라는 후금이라는 국명으로 명나라를 위협하는 존재가 되었는데 광해군은 전장에서 익힌 국제 정세의 뛰어난 감각으로 명에 사대를 하지만 후금과 화친하는 중립외교를 펼쳤다. 특히 강홍립 장군에게 밀서를 주어 후금에게 투항하게 함으로 후금을 적을 두려고 하지 않았지만 후금의 화친 요청에 성리학의 추종자들은 거품을 물고 반대하였다. 하지만 광해군의 중립외교 덕분에 날로 강성해지는 후금의 야욕으로부터 안전할 수 있었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형과 동생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폐위시킨 폐모살제의 폐륜 행위는 서인들에게 명문을 주었고 결국 반정의 빌미를 제공하여 능양군을 중심으로 일어난 세력에 의해 폐위되고 만다. 험난했던 16년간의 세자 생활 동안 항상 죽음의 위협을 벗어나지 못해 늘 불안과 위협에 시달렸던 광해군은 반쪽짜리 개혁군주로 평가받고 있지만 당시 국제 정세를 꿰뚫어 보는 감각을 지닌 몇 안 되는 군주였음은 분명하다. 만약 광해군이 폐위되지 않았더라면 병자호란이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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