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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록은 Oct 02. 2019

무가치한 말들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 낭독회를 다녀와서


얼마 전 빠이 여행에서 돌아온 친구가, 그곳에서 만난 어느 멋진 누나가 추천해준 은유 작가의 책을 내게 소개해줬다. 말도 안 되는 여행의 끈, 빠이의 연이 준 선물들. 몇 번을 애써도 도무지 닿지 않던 은유 작가와의 만남이 밤새 그 친구와 술을 마시다 이뤄진 것도 우연이 아닌 것 같다. 술에 취해 흐릿한 눈과 말 안 듣는 손으로 꾸역꾸역 짚어가며 낭독회 신청 문자를 보냈고, 그날 저녁 드디어 은유 작가를 만날 수 있었다.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에 받은, 가보로 남길 싸인


낭독회는 보이지 않아 잊고 있었던, 기억하거나 인지하지 못했던 사실들을 마주하는 시간이었다. 사회의 공고한 구조가 누구든 약한 순서대로 짓눌러 버린다는 걸 말이다. 낭독회가 끝나고 싸인을 받고 나서도 뒤엉킨 고민들에 머리가 약간 멍했다. 기자가 아닌 기자 준비생으로 마주하는 세상의 면면은 누군가 보기엔 보잘것없는 질문들을 낳는다. 여기, 지금, 기자라면 어떻게 해야 하나, 같은 것들.


무력한 아이들과 학생들의 무기력함에 함께 젖어가는 선생님들. 또다시 층층이 굳어져버린 무기력, 학습된 침묵, 학습된 외면. 취재원으로 가치를 갖지 못하는 가장 낮은 곳의, 가장자리의 인간들. 그런데 이들이 입을 벙끗할 생각도 못하게 만든 이가 바로 기자, 언론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머릴 떠나지 않았다. 전해지지 않는다면 누가 말하려는 노력을 하겠나. 발언의 배분에 있어 언론이 중죄를 짓고 있다는 걸, 새삼 깨우치는 자리였다. 


우리 중 대다수가 노동자가 되면서도 어릴 적 꿈이 '노동자'인 사람은 없듯이, 90%의 잘나지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달하지 않는 언론의 행태는 함부로 ‘잘나지 않음’을 꿈꿀 수 없게 만드는 게 아닐까. 그들의 목소리를 가공하지 않고 온전히 전달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은유 작가가 이번 책에서 인터뷰 내용에 최대한 개입하지 않으려 했던 것도 그 이유에서였다고 한다.


은유 작가와의 만남에서 울컥하는 몇 번의 고비를 넘기고 내게 남은 작은 흔적이 있다면 이것이다. 타인을 나와 같이 생생하게 호흡하는 인간으로 대하기. 그들의 일상을, 가치를, 의미를 함부로 재단하거나 납작하게 만들거나 고착화된 이미지로 소비하지 않기. 더 넓고 깊은 상상력을 동원하기. 타인은 언제나 내 상상의 폭 너머에 있음을 기억하기. 


은유 작가의 <다가오는 말들> 마지막 구절은 지금 내가 하는 보잘것없는 고민들과 다짐이 훗날 기자가 되어서 쓸모가 있으리란 작은 희망을 준다. 


삶은 상호의존적이라는 점은 무시되고 개개인은 고립된 채 자기 이익을 챙기는 것에 최상의 가치를 두도록 세상이 우리를 길들이고 있기에 무가치하고 무의미해 보이는 일들에 무모하게 시간을 보낸 것들만 곁에 남아 있다. 무던한 사람, 철 지난 노래, 변치 않는 신념, 짠 눈물 같은 것들.



매년 조금 따뜻하고 조금 산산한 계절이 오면 돗자리를 챙겨 한강으로 나가는 친구들. 철 지난 팝송을, 오래된 가요를 틀고서 하늘, 별, 구름, 바람, 물에 둘러싸인 오후를 보내는 날들. 해가 강 너머로 기울고, 하늘 한편을 붉고 푸르고 보라, 자주, 분홍빛으로 물들이는 걸 바라보다, 대교에 불이 켜지고 하늘엔 별이 켜질 때쯤 나른하게 취하여 추억을 씹다, 바람과 물기가 싸고도는 사이에 십 분쯤 가벼운 잠을 청하다, 곧 일어나서 다시 이야기를 하다, 눈물을 짓다. 신의 존재나 동물과 여성의 삶 따위의 것들에 열을 올리다 뭉근히 감정이 치미는, 이 순간을 모두가 누렸으면 하는 쓸데없는 꿈을 꾼다. 나른하고 가볍고 눈물 나는 신념을 오래도록 나누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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