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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앤나 Dec 27. 2020

도서관의 농담

도서관을 떠나는 책들을 위하여 

<도서관의 농담>
도서관을 떠나는 책들을 위하여     



지난 6월 30일 도서관이 공식적으로 문을 닫았다.      

지역 신문에는 별도로 보도되지 않았다. 아마 상황이 여의치 않았던 터라 폐관식 소식이나 광고를 게재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도서관 입구에 작은 입간판으로 나온 것이 전부였다. 그다음 날인가, 도서관을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하거나 그동안 고마웠다는 편지들이 창가에 붙기 시작했다. 어느 날은 창문 아래 양초가 타고 있기도 했고, 어느 저녁엔 꽃다발이 놓여있었다. 도서관 문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것들에 문은 닫히지 못했다.      


폐관식은 조촐하게 열렸다. 도서관 관계자와 평소에 찾아오던 주민들로 서른 명 남짓 모였다. 행사는 평범했지만 약간의 독특한 풍경이라면 '모의 경매'가 열렸다는 것이다. 도서관의 책들은 다시 분류되어 필요한 곳에 보내진다고 했지만, 그중에는 폐기될 책들도 있었다. 출처가 없거나 분류가 어려운 책들로 특히 저자가 직접 쓴 원고로 만든 사가본들이 그러했다. 이러한 책들은 대부분 기증자가 찾아가게끔 했는데, 끝까지 연락이 닿지 않아 남게 된 서른 두권의 책들이 있었다. 방문객 중 누군가 이 책들을 기념하기 위한 모의 경매를 열자고 했고, 그제야 조용하던 행사가 떠들썩해지며 저마다 마음에 드는 책을 위해 손을 들었다.     


혹시 이 책들의 출처나 작가를 알고 있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니 소개를 해 보자면 <찻주전자가 있는 정물화> <무한의 기원에 대하여> <손으로 만드는 기타> <이 책을 빌리지 마라> 등이다. 전혀 들어본 적이 없다고 갸웃거렸다면, 그것이 맞다. 이 책들은 세상에 없는 책이다. 가상의 도서관에 모인 가상의 책들 <도서관을 떠나는 책들을 위하여>에 대한 이야기다.     


2020년 제16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서른두 권의 희귀한 책을 소개한 비범한 소설. 작가는 현재 사회 문제와 다소 동떨어진 주제를 다룬 책이 수상작으로 선정된 것에 예상치 못한 놀라움을 전했다. 그도 그럴 것이 가상의 도서관이 소개하는 가상의 책들이라니. 이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나, 싶어진다면 다음에 소개될 한 줄의 심사평이 그 답을 찾는데 도움이 될까. “결코 사라지지 않을 책과 삶에 바치는 애서가의 연서.” 사라지는 인생과 사라지지 않는 책. 어느 것을 가상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인간의 존재와 삶의 의미가 부딪쳐 소설로 흔적을 남겼다.




모든 책은 존재한다. 



하나의 삶처럼. 책에 대해 의미가 있다거나 특별하다는 말을 덧붙이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존재하고 있으며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주목받기 위해 세상에 나온 것이 아니듯. 다만 누군가 한 명이라도 그 책을 좋아하게 된다면 또 하나의 의미가 생길 뿐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는 인정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존재하기 위해서다. 만약 누군가를 좋아하게 된다면 그 역시, 타인의 주목을 받아서가 아니라 나의 주목을 끌기 때문이다. 홀로 온전히 존재하는 것들, 그들의 이야기가 있었다.



숫자가 아닌 문장이 있는 곳

호펜타운 도서관의 책들은 어디에 분류될 수 없기에 모였다. 대량으로 생산되지도 않았지만 어떤 카테고리에 들어맞지도 않았다. 청구번호 무엇으로 불리기에 아쉬운 그 어느 삶과 닮지 않았던가. 출생지역, 시간, 날짜, 성별로 삶은 단 한 줄이라도 설명할 수 있을까. 쪼갠 단어를 합쳐도 쓸 수 없는 문장이 적히는 것이 삶이라면, 출생과 사망 사이에 삶이 적은 한줄, 도서관에 남아있다면.


사람의 출생과 사망은 주민센터에 기록되지만, 살았던 그리고 남기고 싶었던 이야기는 문장으로 남지 않는다. 모든 사람의 한 줄을 동네의 도서관에서 찾아볼 수 있다면, 세상의 단 한 곳, 다시 없을 곳으로 도서관이 있어준다면. 사람들은 삶을 더 의미있게 살아가려고 하지 않을까.   


주민센터에 기록이, 도서관에 의미가,

그렇다면 세상은 예술이 될 지도 모르기에.


뉴욕 브루클린 지역의 한 도서관에는 4만 권의 일기장이 있다. 브루클린 아트 라이브러리(Brooklyn Art Library)는 사람들의 일기장을 보관하는 곳이다.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도 작품이 될 수는 없을까? 그렇게 시작된 프로젝트는 지금까지 130 개국 이상의 사람들이 참여했고 서로 다른 지역, 연령, 직업, 환경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가 도서관에 모여들었다. 그렇게 일기장은 작품이자 책으로 보관이 되고 있다. 일기장들은 이 곳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도서관 버스를 타고 다른 지역의 미술관, 박물관, 학교와 호텔 등 다양한 장소와 콜라보레이션을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가고 있다. 


정보가 아닌 의미로 삶을 기억하는 일, 도서관만 할 수 있는 일이 아닐까. 개관기념일도 좋고 올 해의 마지막 날도 좋다. 방문객을 대상으로 한 장의 종이를 나눠준 후에 다양한 주제에 따라 자유롭게 내용을 채워서 받는다면 어떨까? 내 삶이 한 권의 책이라면 올 해의 소제목을 적어보기, 차마 아쉬움이 남지 않도록 세상에 할 말을 남겨보기처럼 나이기에 할 수 있고 도서관이기에 남길 수 있는 말들이 적힌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이 의미 있는 이유는 우리와 관련된 물건과 이야기들로 채워졌기 때문이다. 내가 사는 동네의 도서관에 나와 이웃의 흔적이 모여 있는 것 만으로도, 어떻게 특별하지 않을까. 흔적이 없는 시대다. 클릭으로 지울 수 없는 기억들이 지역에 차곡차곡 쌓여간다면, 나의 성장과 생애의 순간들이 문장으로 남아있다면. 주민센터엔 나의 기록이 있고, 도서관엔 나의 의미가 있다면. 더 좋은 이야기를 적어가고 싶어질테니까.



도서관 한 곳, 종이가 없는 책이 있다면

도서관의 어느 곳엔 종이가 없는 책들이 있다면 좋겠다. 비가 쏟아지던 날, 쉴 곳을 찾기 위해 도서관에 들어온 레나는 그 이후로도 틈틈이 도서관을 찾아왔지만 책을 읽지는 않았다. 대신 글씨 옆의 공간에 그림을 그렸다. 훼손된 표지를 그림으로 수선하고, 표지가 없던 사가본에 새로운 옷을 입혔다. 그녀는 난독증이 있는 자신을 위해 책을 읽어주는 사서 에드워드에게 말한다. 모든 사람이 어둠속에서도 읽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건 바로 사람이라고. 촉감으로, 떨림으로, 숨결로, 읽을 수 있는 것이 말이 아닌 마음이라는 것을 느낄 때 문장 속 단어 하나, 쉼표 하나 더 오래 들여다 볼까.


빈센트 쿠프만의 책들은 그림으로만 채워졌거나 숫자로만 풀이되기도 했다. 책을 이루는 요소를 책의 바깥으로 꺼낸다면 더 재미있을 것이다. 눈에 밟히는 단어와 발에 채이는 그림으로, 도서관을 걷는 쏠쏠한 재미가 생길테까. 돌맹이와 나뭇잎도 좋다. 뉴런던공립도서관은 돌에 그림을 그리는 'Rock Painting' 수업을 운영하며, 종로 주민센터는 깨진 그릇을 모아 예술 작품을 만들고 있다. 

아이들을 위한 애정어린 말을 적은 조약돌로 어린이 도서관으로 가는 길목위를 꾸며도 좋을 것이고, 어느 날엔 떨어진 나뭇잎을 모아 편지를 적는 시간을 가져도 괜찮을 것이다. 다섯 글자, 스무 글자, 글자 수에 맞춰 마음을 표현하는 법을 알게 될 것이고, 전해주고 싶은 그 모양에 대해 고민하게 될 테니. 무엇보다 사람의 마음을 읽고 싶어지지 않을까.


소설 속 도서관은 문을 닫았다. 현실 속 도서관도 점차 문을 닫게 될 지도 모른다. 커다란 공간들이 사라지는 지금 도서관은 어디로 가고 있을까. 만약 그곳이 지금 이 거리가 된다면, 너무도 평범해서 이름을 붙일 수 없는 공간에 도서관이 생겨서 가지 않아도 머물 수 있다면 마치 소설같을까. 





길가의 벤치 위, 신호등 옆, 게시판 근처에 작은 도서관을 상상해본다. 곳곳마다 주제와 어울리는 책이나, 그 어느 거리와 어울리는 문장이 들어있어도 좋을 것이다. 스마트폰 QR코드로 작은 도서관에서 책을 꺼내어 벤치에서 바로 읽을 수 있다면, 거리로 나온 도서관의 작은 인사가 어떻게 반갑지 않을까. 어떤 거리 한 켠에는 시집과 엽서가 채워진 도서함이 있고, 또 밤이 늦도록 배회하는 사람들이 있는 거리에는 도서함을 비추는 아늑한 조명이 있다면 좋겠다. 늦은 밤, 어떤 위로를 읽어갈 수 있도록.


심사위원은 이 책을 두고 한 편의 긴 농담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저마다의 농담이 될 거라고 덧붙여본다. 빈센트가 쓴, 레나가 그린, 그리고 에드워드가 소개한 가상의 책들은 그들의 소설이자 이제 우리의 이야기가 되었기에. 마침내 독자가 웃어넘길 농담이 될 것이기에.


재단의 157번째로 또 하나의 도서관이 개관하기를 바라본다. 유머와 해학을 주제로 다루는 책으로 가장한 '농담하는 도서관'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주민의 문장이 한 줄씩 데이터로 쌓여서 검색할 수도 있고, 지역의 백과사전도 되는 곳. '세상에 이런 책이 있다면 좋을 텐데'를 주제로 묶어낸 책이 있고, 실제로 그런 책을 펼쳐내 옆에 꽂아둔 도서관. 돌멩이와 나뭇잎, 깨진 그릇같이 쓸모없는 것으로 쏠쏠히 재밌는 풍경을 만들어내며, 어느 길거리 벤치를 분점이라고 부르는 농담 같은 도서관이 문을 연다면. 


"그 책들을 찾아 나서기를, 즉 그것을 직접 쓰기를." <당신이 읽을 수 없는 100권의 책> 중


아직 쓰이지 않은 소설의 첫 문장은 다음과 같다. 

2020년의 마지막 날, 농담처럼 도서관이 생겼다. 

말도 안 되게 작은 도서관에 동네 사람들의 문장이 모두 적혀있다. 



칼럼은 2020년 12월호, 월간 국회도서관에 썼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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