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파리는 미웠다가 좋았다가 또 실망했다가 끝내는, 달콤함을.
"저.. 기요"
"네, 사진 찍어 드릴까요?"
"아뇨, 저 자리 좀 맡아주시겠어요?"
여기는 노트르담 대성당의 탑을 올라가기 위한 줄.
춥게 몰아치는 바람을 꾹꾹 참고 견디다가 나온 말.
"저기에서 머플러 금방 사고 오려고요."
성당 맞은편 길가에 있는 자그마한 상점을 가리키며 말하는 나를 보고 충분히 납득한다는 듯 걱정 말고 다녀오라던 외국인 모녀.
파리의 일교차가 이렇게 심하던가.
참아보려고 했지만 정말이지 너무 추웠다.
그렇게 파리에서 처음으로 산 물건, 머플러.
머플러 하나로 목을 여며도 추운 것은 마찬가지.
그냥 돌아갈까, 탑을 꼭 가야 하나, 가기 싫다 정말!
마음속으로는 오르는걸 수백 번 포기했지만,
파리에서 전경을 바라볼 수 있는 곳 중 가장 기대했던 곳.
게다가 오늘은 파리에서 제대로 된 일정을 시작하는 첫날.
이를 악물고 달달달 떨며 줄을 기다렸고, 마침내 입장을 하기 시작했다.
내부로 들어온 것만 해도 감지덕지했건만,
하, 숭숭 뚫려있는 탑으로 올라가는 길은 춥긴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탑 꼭대기로 올라가는 계단통로는 너무 좁아서 그 안에서 빙그르르 돌며 오르니 어지럽기까지 했다.
게다가 멈출 수도 없었다.
바짝 붙어서 올라오는 사람들 덕에 콩나물시루처럼 바짝 붙어 올라갔고
이따금 지친 사람들은 옆으로 물러나 숨을 고르곤 했다.
아, 여기는 어디인가.
성당에서 내 죄를 뉘우치는 순간이 있다고 하더니
이 곳에 오르며 나는 그간 지은 죄들에 대해 강제로 속죄의 시간을 가졌다.
어지럽고 숨차다, 숨차고 어지럽다를 반복하며 기계적으로 발을 움직인 끝에 마침내.
드디어 올라온 걸까?
싶었지만 딱 절반이라는, 기념품 가게.
여기에서 돌아가는 사람도 꽤 있었다.
그렇지만 반이나 왔는데 그냥 갈 수는 없었다.
그래, 이렇게 된 거 끝까지 보자. 하는 독기마저 품은 심정으로 다시 오르기 시작했다.
하아, 여기야.
몰아치는 바람에 휘청이고 후들거리는 다리를 참으며 오른 정상!
그런데 이게 웬걸! 철망이 쳐져 있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어디 한번 보자!' 심정으로 내려본 파리는,
그냥 파리였다.
두고 보자! 했던 마음과
이게 뭐야, 싶었던 기분.
다시 파리에 오게 된다면 탑은 절대 안 올 거야. 결심한 날.
노트르담 성당 탑을 기다리던 줄은 추웠다.
탑을 오르는 계단은 좁고 길었고 높아서
오르는 동안 '내가 진정 무슨 죄를 지은 건가'
속죄마저 했던, 쓰디쓴 추억.
온통 춥고 다리마저 후들거리게 했으며 그렇게 오른 정상에서는 철망이 눈에 가득 들어왔던
노트르담 대성당은,
이런 모습도 보여주었다.
일요일, 오전 9시.
이 곳은 파리 노트르담 대 성당이다.
어떤 설명이 필요할까.
예비신자 교리를 받고 있던 어린 신자의,
추워, 좁아, 힘들어, 돌아가고 싶어!
어린 투정이 모두 멈추었던 순간.
천 년 전 걸작.
잔다르크의 재판을 한 곳.
앙리 4세의 결혼식이 열린 곳.
북쪽은 성모 마리아의 문
중앙은 최후 심판의 문
남쪽은 성 안나의 문이 있는 곳.
색색의 유리를 통과하는 빛은,
그 날 시간에만 만날 수 있었던 빛깔.
장미창이라는 화려한 애칭보다
백합같이 고결한 단어가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소원을 빌었다.
툴툴거린 사람의 소망도 들어준다면
부디, 하는 마음으로.
10유로에 보드라운 머플러를
파는 거리에는
천 년을 지켜온 성당이 있다.
북쪽 탑 옆, 386개의 계단을 오르면 파리의 가장 오래된 전망을 만날 수 있는 장소.
계단을 오르며 지난 죄를 강제로 뉘우치게 되는 곳.
올라서는 철장 너머로 얼굴을 내밀고 깨끗하고 단정한 파리를 내려다보고
성당 안에서는 2유로의 촛불을 밝히며 슬쩍, 소망을 빌어볼 수 있는
센 강의 시테 섬에 자리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대성당,
쌉싸름한 파리, 그리고 달콤한 도시에서의 하루가 시작된 날.
백 년이 되고 천 년이 넘으면 뭐하나.
엘리베이터도 없는 건물 같으니! 하며 다시 헥헥거렸던 순간.
그렇다.
뉘우침은 짧고 불평은 길다.
여기는 개선문.
노트르담 대성당 탑에 이어 다시 이어지는 끝없는 터널.
한도 끝도 없이 올라가니 여기가 개선문인지 어디인지도 모르겠던 때.
미생에서 그랬던가.
"네가 이루고 싶은 게 있으면 체력을 먼저 길러라. 체력이 약하면 빨리 편안함을 찾게 되고 그러면 인내심이 떨어진다."
그 말이 떠오르며, 파리에 오기 전에 여행책자를 보는 것이 아니라 운동장을 한 바퀴 뛰어야 했음을 깨달았던 순간. 그래도 나름 두 번째라고 터득한 방법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오르면 된다-으로 올라갔던 개선문.
드디어 개선문 정상.
그리고 내 눈앞에 펼쳐진 열 두개 대로로 펼쳐진 야경.
하, 여기가 파리야. 싶었던 순간.
360도 돌아도 어느 것 하나 가리는 것이 없었던,
온 눈에 담을 수 있었던 파리.
그리고 더 행복했던 건,
아름다움을 나눌 사람이 있다는 것.
이렇게 '저것 봐!' 하면 같이 '와, 정말 아름다워!' 공감해줄 사람이 있었던,
파리에서 유일하게 동행했던 그 순간.
그렇게 개선문을 오르며,
'하아 또야, 또. 이 놈의 엘리베이터도 없는 천년 된 건물' 하던 쌉싸름함.
그리고 전혀 춥지 않았던- 추웠을까? 아마도 난 느끼지 못했던 그 어느 밤, 달콤한 기억.
마레에서의 어느 날,
새벽에 내린 비로 축축한 아침을 맞았다.
과일 조금과 요거트를 먹으며 한기를 느꼈다.
아무도 없는 방, 오래된 선반에 놓인 열쇠.
칠이 벗겨진 나무 침대 옆에 놓인 캐리어,
그것보다 외로운 건 혼자라는 것.
아무도 없는 낯선 곳에서 철저하게 혼자라는 것.
모닝콜을 부탁할 호텔 매니저도
컨디션은 괜찮은지 물어줄 가이드도
오늘은 어느 곳에 갈지 확인할 룸메이트도 없이
정말, 혼자.
비가 내린 뒤의 날씨는 스산하기까지 했다.
아침도 쌀쌀하더니 오후가 되어도 개지 않는다.
마레지구가 이렇게 회색빛처럼 보인 날은 처음이었다.
간 밤에 너무 추워서 잠을 세 번이나 깼더니
정신도 몽롱하고 피곤하다.
궂은 날씨에 시무룩할 시간이 없었다.
오늘 저녁까지 잠을 깰 순 없어.
옷깃을 여미고 마레 지구의 유니클로로 향했다. 그리고 두툼한 맨투맨티셔츠를 골랐다.
조금 나아진 기분으로 집에 오다가 상점 쇼윈도에 눈에 쏙 들어온 핑크색 니트.
아, 마치 피죤니트*다!
보드랍고 푹신해 보이는, 니트에 첫 눈에 반해 마쥬에서 사 온 것.
흐린 날엔 한국의 한 겨울만큼 추운 그때에 사서,
한국으로 돌아와 그 해 겨울 포근하게 입은 옷들
마레지구에서 유니클로라니,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면서도 '그래도 파리 컬렉션이야!'했던 생각.
이렇듯 내가 아주 춥고, 외롭고, 서툰
쌉싸름한 파리에 대처하는 법은.
단순했다.
사실 나는, 알고 있다.
나를 풀어줄 방법은 아주 단순하다는 것을.
그리고 쌉싸름한 도시가 달콤한 내음을
곳곳에서 풍긴다는 것도.
대학교 캠퍼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을 떠올려보면
반짝이는 호숫가나 박물관이 아닌
문과대 뒷 뜰, 벚나무 한 그루가 있던 곳이다.
4월의 따뜻했던 날,
향긋한 바람에 분홍색 잎들이 눈 앞에 흩날리던,
꽃 잎이 내 머리카락에 사륵 내려앉은 소리마저 들렸던 그 순간을.
우리가 세상을 눈으로만 바라보지 않듯이
그 날의 온도, 들리는 소리, 그리고 눈을 감아버리게 하는 빛까지.
우리는 '순간'을 그 모든 감각으로 느낀다.
파리 역시 그랬다.
파리와 나는 살아있기에.
우리가 완벽한 모습으로 만나는 타이밍은,
예측할 수 없었다.
그것은 마치, 연인의 밀고 당기는 그것처럼.
새벽에 날카롭게 추웠던 날의 보쥬광장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광장이라는 수식어를 도저히 떠올릴 수 없었다. 그러나 온기가 찾아든 저녁에 다시 찾자 평화로운 모습으로, 그 자리에 있었다. '이 모습을, 기대했지?' 하면서.
모네의 수련을 보겠다고 '오랑주리 미술관'에 가는 날을 손꼽아 기다렸지만, 내가 도착한 전 주에 수련을 다른 나라에 통째로 빌려주었다는 말을 듣고 그저 하염없이 마레지구를 거닐었고 계획 없이 걸으며 디저트를 먹기도 했다. 피에르에르메를 연신 외쳐대는 친구 덕에 들어가서 먹기도 하고 현지인들이 줄을 서있는 베이커리에 따라 줄을 서기도 했다. 그리고 저녁으로는 내가 가장 좋아했던, 마레의 레스토랑에서 알록달록한 샐러드를 먹었다.
아름다운 색 담아낸 '수련' 작품을 보지 못한 날,
형형색색, 달콤한 디저트로 기억에 남은 날.
파리와의 밀당에서, 이기는 방법.
단순한 나를 즐겁게 만들 것을 찾아라.
그것은 예술이나 고급 레스토랑, 명품이 아닌
아주 작은 것이 될 수도있다.
평상시에 내가 좋아하는 것들은
분명 그곳에도 있을 것이다.
아주 익숙해서 놓쳐버린 것을 찾기를.
그것들은 당신에게 힘을 주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될 테니까.
그래도 우울하다면, 그냥 그대로 있어도 좋아,
어쩌면 슬쩍 파리가 먼저 다가와줄 수 있으니까.
뜻밖의 모습으로 다가올 파리를 못 이기는 척- 받아주기를.
쌉싸름한 파리에서 달콤함을 찾는 방법은 다음 편에서도 이어집니다 :)
혹시라도 저와 같이 춥고 차가운 날씨, 모네의 수련이 없는 오랑주리 미술관, 좁고 높은 계단, 허약한 체력, 또는 문득 혼자이기에 몹시 외로운 날엔 그것을 달래 줄 소소한- 그러나 나를 즐겁게 하기엔 충분한 것들을 만나보시기를 :) 어쩌면 금세 '음, 꽤 괜찮네.'라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니까요. - 아주 단순한 여행자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