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유가 에스프레소에 섞이듯, 나와 그들이 만나는 순간은 달콤하다.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를 본 사람이라면 잊지 못하는 장면이 있을 것이다.
남자 주인공이 타임슬립을 해서 1920년대 한 선술집으로 들어서자 시끌벅적한 사람들 사이로
"난 해밍웨이요." "난 피카소." "살바도르 달리" 하며
'아무런' 자기들을 '아무렇지 않게' 소개하던 장면.
이름만 들어도 설레는 그들이 모두 한 곳에서 작품에 대한 아니 사실은 서툰 사랑에 대한
열정을 꽃피웠던 장소.
그런 카페.
미드나잇 인 파리 : 우디 앨런의 감독의 영화로 1920년대 파리의 예술적 흥취에 매료된 시나리오 작가가 소설을 집필하면서 겪게 되는 방황과 고민을 유머러스하게 풀어내는 로맨틱 코미디 영화
카페 레뒤마고는 당대 지성인들이 모였던 곳이다. 레뒤마고는 (Les는 복수명사, Deux는 둘, Magors는 중국풍 인형) 두 개의 중국풍 인형이라는 뜻이다. 원래는 비단가게가 있던 자리였고, 카페로 바뀌면서 인테리어를 상당 부분 반영하며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20세기를 상징하는 파리의 문학가와 지성인들. 단골로는 실존주의 철학과 문학을 대표하는 샤르트르, 프랑스 여성 문학의 거장 보부아르, 그리고 어린왕자의 생텍쥐베리, 파블로 피카소, 헤밍웨이, 앙드레 지드까지. 특히나 당시에도 인기가 많았던 파블로 피카소가 이 카페에서는 유명세에 밀려 자리에 앉지 못하기도 했다고 한다. "피카소, 오늘은 자리가 없으니 헤밍웨이가 일어나면 알려줄게요." 하는 말을 듣기도 했다고. 또한 샤르트르와 보부와르의 로맨스가 일어났던 곳이기도 하다.
카페 레뒤마고는 생제르망 거리에 있다. 예술인의 마을 몽마르뜨 언덕, 로맨틱한 세느 강변, 파리의 발상지 시테섬, 그리고 심장 에펠탑, 현대미술의 상징 퐁피두센터와는 전혀 다른 파리의 매력을 느낄 수 있는 생제르망. 예전에는 문화의 거리로 유명했지만 현재는 고급스러운 상점들이 들어서며 명품 브랜드는 물론 프랑스 고유의 유서 깊은 브랜드 숍이 많은 곳이다. 모두 프랑스에서 소위 ‘잘 나간다’는 브랜드들이라고. 샹젤리제 거리는 관광객들이 선호하는 편이지만, 생 제르망 거리는 현지인들이 즐겨 찾는 쇼핑거리라고 한다. 실제로 카페 레뒤마고는 루이뷔통 샵 바로 옆에 있었다.
"헤밍웨이 씨, 지금의 수입 액수에 너무
연연하지 마세요. 중요한 건 글을 쓸 수 있다는
사실이잖아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단편을 써도
사는 사람이 없을 거예요."
'내가 처음 스콧 피츠제럴드를 만났을 때
아주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그와 함께 있을 때 이상한 일이 많이 벌어졌지만,
그 일만은 결코 잊을 수 없다.'
-파리는 날마다 축제 中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파리에 7년을 살았을 때
쓴 에세이, 그 들의 풋풋해서 뜨거웠던 시절)
그 들이 가장 가난했던 시절,
초라한 낙원이 되어준 곳.
레뒤마고는 지금도 예술가와 문학가를 후원하고 있다. 단지 카페의 외형만 백 년이라는 시간 동안 존재하는 것이 아닌, 예술을 사랑하고 예술가를 아끼는 마음이 그대로 이어져 오는 곳이다. 커피 가격이 다소 다른 곳보다 높긴 하지만, 후원금의 일부라고 생각한다면 이 역시도 꽤 괜찮게 느껴진다.
1933년부터 '레뒤마고 문학상'을 주최하고 있는,
또 한 명의 피카소, 랭보, 헤밍웨이가
어느 한 테이블에 있을지도 모르는
과거의 그들을 추억하고,
미래의 그들을 만날 준비가 된 사람들이 있는
젊은 시절 나폴레옹이 술 값 대신
모자를 두고 갔다는
매력적인 그곳, 레뒤마고.
그곳에 꼭 가보고 싶었다.
여행자 차림이 아닌, 평상시 내 모습대로.
아니 사실은 조금 더 산뜻한 모습으로.
나도 그 날에 있었다면 아마 이렇게 왔을 테니까.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나러 가는 길이니까.
캐리어에 넣어온 옷 중 유일한 원피스를 입고
군데군데 굽이 벗겨진 하이힐을 신었다.
이 곳에서 마지막으로 신고, Au revoir- (안녕) 하기 위해.
생제르망 거리를 따라 도착한 레뒤마고는,
말 그대로 명소였다.
노천카페의 자유로운 모습도
예술가들이 밤 낮 머무르며 한가롭게 지낼 분위기도 더 이상 아니었다.
테라스와 내부 자리를 가득 채운 사람들은
어느 테이블 자리 한 곳이 나면 들어가서 앉을 만큼 북적였고,
사색에 잠길 수도,
그 들의 책도 펼쳐놓고 읽을 수는 없었다.
여기는, 2000년도 훨씬 지난
레뒤마고니까.
그렇지만,
그 날과 똑같이 존재하는 이 곳에
그들이 머물렀던 자리에 도착한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가슴이 벅찼다.
여기는 파리의 레뒤마고,
하나도 여유롭지 않고
광화문 스타벅스같이 번잡한,
뭇 후기들처럼 커피 가격도 비싸며
특별히 맛있지도 않은.
그러나,
'이 곳에 앉았을까?' 상상하게 되는
따뜻한 우유 주전자마저 낭만적인
옆자리 외국인이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거는
한참 대화를 나눈 뜻밖의 친구가 생긴
웨이터는 찡긋 윙크를 해주는
함께 나온 레뒤마고 초콜릿을 깨물어 베어 먹으면
달콤함이 온몸에 퍼지는
이 곳은 레뒤마고.
카페 크렘 (Cafe creme)을 주문하면 우유와 에스프레소를 담은 주전자가 함께 나오는 곳.
씁쓰름한 에스프레소에 고소한 우유를 섞고,
생각보다 맛있는 라떼를 한 모금 마시며 어쩐지 처음 앉아본 테라스에서 그 분위기에 나도 따라 녹아들 수 있는 곳. 생제르망 거리의 맛이 좋은 커피가 있는, 카페 레뒤마고.
우유가 에스프레소에 섞이듯
나와 그들이 만나는
꽤 달콤한 장소.
"Au revoir (오 흐브아)" 하고 손을 흔들고 나와 생제르망 거리를 걸으면, 파리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신은 하이힐의 또각 거림마저 경쾌하게 들리는 곳.
어느 멋진 날 파리에서는
누군가가 대시할 수도 있다.
달콤함에 빠지는 순간을 기대하겠지만
그 상대가 할아버지여도 쌉싸름해하지 말기를.
아쉬움은 뒤로 하고 즐겁게 대화를 나눠도 된다.
로맨스는 생기지 않지만, 추억은 만들 수 있으니까.
천천히 거리를 걸으며 서툰 이야기를 주고받아도,
가끔 알아듣지 못해 리액션에 충실하게 될지라도
혼자 걷는 것보다는 즐거우며
이따금 같이 웃음을 터트리다 보면
어제 왔던 혹은 언젠가 또 갈 것 같은 생제르망 거리에 추억을 입힐 수 있을 테니까.
카페 레뒤마고,
테라스와 내부에도 자리가 가득 찬
현지와 외국인들의 다양한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어쩌면 나와 취향이 같은, 그리운 사람도 같을
다르지만 같은 사람들로 가득한 곳.
파리에서 하루쯤은, 머물러 보기를.
혹시 알까.
저기 저 구석에 앉은 누군가의 소설, 그림, 사진의 배경이 될지도 모르니까.
그렇지 않다고 해도,
내 옆자리 여행자의 기억 속에만 머무를지라도, 꽤 매력적일 테니까.
파리에서의 어느 멋진 날,
평범하지만 특별했던 레뒤마고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