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존재하는 이유

서평 12: 《위로를 주는 빵집, 오렌지 베이커리》

by illa mulier

“뚜렷한 원인은 없었다.” 누구도 걱정시키지 않던 말괄량이 키티가 열네 살이 되면서 갑자기 깊은 슬픔에 빠져 입을 닫았다. 본격적으로 정신건강 상담을 받게 되자 키티는 ‘정상’인 척하던 가면을 벗어던지고 더 커다란 절망과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불안에 휩싸였고, 학교는커녕 집 밖에도 나가지 못했다. 키티는 “마치 블록 하나를 너무 빨리 빼내는 바람에 순식간에 무너진 젠가처럼” 자신이 무너졌다고 했다. 어떤 형태로도 존재하고 싶지 않았던 그때, 아빠 앨의 빵 굽기가 키티를 건져냈다.


앨은 막내 딸이 집중할 만한 활동을 찾아주려고 부단히 애썼다. 정원 가꾸기, 공예, 바느질, 담벼락 칠하기는 다 소용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빵을 굽다가 키티에게 “직접 해볼래?” 하고 물었는데 키티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돌멩이 같기만 하던 반죽이 찬란하게 변하는 모습은 키티에게 놀라움을 선사했다. 그때부터 키티는 매일 빵 굽는 시간을 위해 살기 시작했다. 원인 모를 우울감에 빠져 존재의 의미를 몽땅 잃어버린 키티에게 빵 굽기가 살아갈 목적을 심어 주었다.


주변 사람들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키티를 도와주었다. 가족들은 키티가 만들어 내는 엄청난 양의 빵을 이웃들에게 나눠주었고, 이웃들은 자기 집 오븐을 쓰라고 허락해 주기도 했다.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앨은 키티를 돕기 위해 일을 접었고, 가족들은 비정상적으로 빵 굽기에 집중하는 키티의 모든 변화를 묵인해 주었다. 이렇게 빵을 구워 주변에 나누어주면서 빵 구독 서비스를 시작하게 되었다. 사람들의 반응이 궁금했던 키티는 드디어 집 밖으로 발을 내디뎠다.


마음속 어둠에 짓눌리던 키티가 베이킹에 집중할 수 있다는 사실이 반가워 가족들은 모든 것을 감수했다. 주방 전체가 베이커리가 되었고, 키티의 언니와 오빠는 한동안 뒷전으로 밀려났다. 그렇다고 키티의 부정적인 감정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몇몇 유명한 베이커리를 찾아다니다가 조금이라도 일이 틀어지면 키티는 여지없이 공황에 빠졌다. 베이킹이 그런 감정을 덜 느끼도록 막아주고 있었고, 베이킹을 멈추면 온전한 정신을 지킬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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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지나면서 키티는 나름의 삶의 균형을 찾아갔다. 주중에는 아빠 앨과 함께 다양한 빵 굽기를 실험하면서 빵 구독 서비스도 이어 나갔고 토요일마다 팝업 매장도 열었다. 그러는 내내 정신건강 센터에서 정기적으로 상담을 받았다. 파도처럼 몰려오는 어둠을 베이킹으로 몰아내던 키티는 “내가 제대로 생각할 수 있는 건 빵뿐이었고, 베이킹은 내가 존재하는 이유였다.”라고 고백했다. 그런 키티를 위해 앨과 케이트 부부는 베이커리를 차리기로 했다. 크라우드펀딩을 개설해 후원금을 모았고, 가게 벽에 후원자 이름을 새겼다.


가게를 열고 얼마 안 되어 드디어 한계가 왔다. 키티는 자신이 베이킹에 너무 집착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아주 오랜만에 쉼을 가졌다. 하지만 에너지를 분출하지 않자 부정적인 감정들이 다시 몰려왔다. 키티는 빵에 대한 마음의 욕구와 자기 몸의 욕구 사이에서 균형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조금씩 해법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팟캐스트를 듣고, 덴마크어를 배우고, 욕조에서 〈쿵푸 팬더〉를 보면서 만두를 먹는 것처럼 사소한 일들이 도움이 되었다. 십 대 후반에 어엿한 베이커가 된 키티는 올해 스무 살이 되었다.


키티가 어두운 내면을 이기고 일상을 회복하도록 돕기 위해 가족들은 모든 것을 감내했다. 문득 나의 10대, 20대가 떠올랐다. 정신질환을 겪지는 않았지만 나는 진정한 나를 찾지 못한 채 비대한 자아를 뒤집어쓰고 보기 민망한 언행을 일삼았었다. 그때 참 많은 사람이 나를 참아주고 받아주었다. 그 말 없는 수용이 얼마나 고마운 일이었는지 이제야 깨닫는다. 덕분에 혼란했던 시기를 무난히 건너서 늦게나마 나만의 존재 이유를 조금씩 찾아가고 있다. 정녕 홀로 우뚝 서는 인생은 없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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