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지은 작가님께
안녕하세요.
틈틈이 보내주신 편지 잘 받았습니다. 가까운 친구와도 카카오톡으로는 하지 않을 것 같은 이야기를 지은 작가님께 잔뜩 듣게 되어 기뻤어요. 작가님이 마주 했던 어스름한 새벽의 시간을 최근 저도 자주 보내고 있답니다. 저는 작년에 출산을 했거든요. 카카오톡도 주고받은 적 없는 사이에 너무 큰 정보일까요? 지은 작가님의 상상대로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평소엔 조용하고 비밀스러운 구석이 있는 사람으로 남아 있고 싶었는데, 갑자기 와장창 모든 걸 망쳐놓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작가님께서는 아니라고 말씀해 주시겠지 만요.
어른의 정의에 대해 이야기해 주셨죠. 작가님의 표현대로라면 전 어른이 맞네요. ‘매사에 정의를 잘 내리지 못하는 사람’이요. 정의도 결정도 잘 내리지 못해, 임신과 출산에 대해서도 고민하다 말고 하다 말고 했지만 최최종_final_fin 버전의 결정으로 저는 엄마가 되었습니다. 너무 재미없는 존재 아닐까요. 드라마나 영화 속의 엄마에게 재미있는 일은 일어나지 않잖아요. 제가 인생의 주인공이던 시절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탐험할 미지의 공간이 남아있던 시절은 있었던 것 같아요. 장래가 결정되지도 자아가 확립되지도 않아 완성형이 궁금해지는 존재였던 적이요. 하지만 엄마들에게 그런 게 있을까요. 제가 어떤 음악을 듣고, 저의 ‘여름방학 리스트’에는 어떤 게 적히는지, 꿈은 무엇인지와 같은 걸 궁금해하는 사람은 없겠지요. 만나는 사람도 없이 집에서 주로 아기와 시간을 보내다 보니, 엄마라는 정체성 외에 저의 나머지 모습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아요. 저는 고작 엄마가 된 지 10개월 밖에 되지 않았고 30년이 훌쩍 넘는 시간을 다른 모습으로 살아왔는데 말이에요.
엄마가 되기 전의 제가 대단한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해버렸네요. 작가님께서는 현대미술을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고 하셨지요. 저도 그래요. 인상을 팍 쓰고 작품을 몇 초간 째려보며 이해하는 척하는 게 제 감상의 대부분이긴 하지만 미술관 속 현대미술 작품 사이에 놓이면 어깨가 으쓱해집니다. 대중문화에서 조금 떨어진 어려운 예술 세계를 탐닉하는 저의 모습이 마음에 들거든요(날 사랑하는 게 아니고 날 사랑하고 있단 너의 마음을 사랑하고 있는 건 아닌지……). 더 어릴 적에는 미술 작품 옆에 이름을 내걸 수 있는 사람이 되지는 못 해도, ‘나 이 사람 알아’ 혹은 ‘나 이 사람하고 같이 일해봤어’ 정도는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줄 알았어요.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렇게 되지 않을 거라는 걸 금방 알아차렸답니다. 그래서 인스타그램도 빠르게 흥미를 잃고 앱을 지운 지 오래되었어요. SNS에 기록될 거리가 없는 일상, 생략되는 시간, 의미 없는 시간으로만 이루어진 인생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요즘 자주 생각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제 인생에서 바로 지금, 양육자인 나와 기타 등등인 나의 모습이 함께 존재하려면 어떻게 할 수 있을까 고민해요.
그러기 위해 저는 글을 써요. 책도 읽고요. 사실 쉽지 않아요. 책은 하루에 한 두 페이지 읽을까 말까 한 날이 많고, 글도 고작 한 두 문장 적으면 다행이지요. 만성적인 수면 부족, 출산 후 더 안 좋아진 목 어깨 허리가 자꾸 뭘 그리 하려고 하냐고 유혹합니다. 이들이 제 안의 소시민이에요. 그래도 소시민과의 싸움에서 승률이 나쁘지 않아요. 유혹에 지는 날도 있지만 꾸준히 쓰고 있어요. 지은님께서 편지를 보내주신 것처럼 저도 지금의 나를 잊지 않도록 누군가에게 편지를 계속 띄우고 있었나 봐요. 어딘가에 닿기를 바라면서요.
우스운 이야기 해 드릴까요? 글을 쓰기 시작하니 제가 작가라도 된 것처럼 진지해진 거 있죠. 문장 하나하나에 힘을 주게 되고 글 조회수에 연연하게 되었어요. 블로그 이웃 수는 왜 그대로 인지, 브런치 구독자는 어떻게 해야 늘릴 수 있는지 근심해요. 역시 성장 만이 모토인 시대를 관통하는 세대라 그런지 글쓰기에서도 그저 확장과 번영을 바랍니다. 조용히 내면을 돌아보는 척하면서 내심 무언가가 되고 싶은 거예요. 회사도 나가지 않는 상태이고 엄마라는 타이틀이 아직 적응이 되지 않다 보니 스스로를 정의할 수 있는 다른 무언가를 쫓고 있나 봐요. 파워 블로거나 인기 브런치 작가 같은 거요. 안 되면 유명 트위터리안이라도……(제일 어려운 일 같습니다).
이제 적응해야겠지요. 달라진 저의 신분에요. 한동안 양육자로서의 삶에 집중하고 나면 다시 나를 찾는 시간을 가질 수 있겠지요? 내가 뭐라고 나를 찾느니 마느니 하는지 부끄럽기도 해요. 보물 이어야 꽁꽁 숨겨놓고 보물 찾기를 하지요. 전 아무것도 아닌데. 회사에 복직한다고 멋진 커리어우먼으로 변신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에 쫓기는 흔한 워킹맘이 될 뿐인데 애초에 뭘 찾겠다고 뜬 구름을 잡는지 모르겠습니다. 이것도 모르고 저것도 모르겠네요.
엄마가 되고 난 후에도 모르는 게 많았어요. 출산에 대한 고민이 깊었고 어린 나이가 아니라고 해도 의외의 부분에서 답을 몰라 헤맸습니다. 제 아기는 여자 아이인데요, 백일 사진을 찍으려 한복을 대여해야 하는데 분홍치마를 선뜻 고르지 못하겠더라고요. 자기 손 발도 모르는 아가에게 분홍색으로 성별의 굴레를 씌우는 것에 거부감이 들었어요. 그런데 조금 더 생각해 보니 아가는 크면서 한동안 분홍색을 친숙하게 여기게 될 가능성이 높은데, 자기 백일 사진을 보고 왜 어두운 색 옷을 입고 있냐고 울상을 지으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에 미쳤어요. 여기까지 오니 제가 가진 신념이 괜한 고집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습니다. 전 고민 끝에 안전한 분홍치마를 골랐어요. 제 행동은 왜 이리 자연스럽지 못하고 요란한지 모르겠습니다. 모르겠다는 말을 이렇게 쉽게 내뱉으니 속은 시원해요. 지은 작가님 덕분이에요. 감사해요.
감사한 것들을 더 적어보려 해요. 작가님 말씀처럼 세상의 도탄 앞에 방관자일 수도, 생존자일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생존했기 때문에 방관하기도 하는 것 아닐까요? 많은 것을 목도했기에 흑과 백으로 세상을 구분 짓지 못하고 도리어 입을 다물게 되는 순간은 저에게도 있었어요. 그래도 완전히 놓아 버리지 않겠다는 지은 작가님의 다짐에 저도 용기를 얻습니다. 전 용기 있는 사람은 아니에요. 그래서 오히려 세상의 수많은 비극 앞에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누군가 호통을 친다면 더 주춤할지도 몰라요. 작가님의 솔직한 고백에 저도 조심조심 나아갈 용기를 얻어요.
단호하게 말해주어 고맙습니다. 세상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일이 전부가 아니라고, 우리는 영웅이 아니라고, 세상을 외면할 수도 있다고요. 아픔을 잊기 위해 즐거움을 누려야 한다고요. 몇 년 전에 유행했던 말이 있지요. ‘탈조선’이라는 말이요. 희망 없는 한국 사회를 전근대 왕조 국가인 조선에 빗대고 여기서 벗어나야 한다는 자조적인 인식에서 나온 말로 알고 있어요.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한마디로 나만 살겠다는 거잖아요. 하지만 그 말이 나온 배경도 이해해요. 우리 사회가 주는 좌절이 끝도 없으니 그냥 탈출하는 게 답으로 보이기도 하겠지요. 탈출하는 대신 같이 조금씩 정화해 나가려면 작가님 말씀대로 깔깔 웃고, 노래하고, 춤을 춰야겠어요. 버티고 견디는 힘은 결국 거기에서 나오니까요.
저도 작가님께 영감을 받아 ‘여름방학 리스트’를 작성해 보며 편지를 마칠까 해요. 작가님의 리스트를 응원합니다. 작가님이 들려주시는 브람스 인터메조 Op.118 No.2는 언젠가 꼭 들어보고 싶네요. 작가님과 정말 잘 어울리는 아름다운 곡이에요.
앞으로 조금씩 하고 싶은 것들
- 밑반찬 사지 않고 만들어 먹기
- 허리 통증을 방지할 수 있도록 하복부와 중둔근 근육 만들기
- 유사시 아기(9킬로그램)를 안고 뛸 수 있는 근력 만들기
- 블로그 통계는 매일 말고 주간으로만 확인하기
- 딸과 함께 페미니즘 공부하기
언젠가 또 편지를 보낼 수 있기를 바라봅니다.
당신께 꺼지지 않는 지지와 사랑을 보내는
무느무느 올림